불교신문 창간 주역 청담스님…현대 한국불교의 주춧돌을 놓다
불교신문 창간 주역 청담스님…현대 한국불교의 주춧돌을 놓다
  • 장영섭 기자
  • 승인 2019.10.25 14:1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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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60주년 맞이 특별기획’

불교정화운동 총지휘
통합종단 출범으로 결실
1960년 불교신문 창간 등
종단 청사진 제시하며
불교 넘어 ‘국민정화’ 추진
불교정화운동의 중심이자 조계종 제2대 종정을 지낸 청담스님은 불교신문 창간 등으로 현대 한국불교의 발전기반을 구축했다.
불교정화운동의 중심이자 조계종 제2대 종정을 지낸 청담스님은 불교신문 창간 등으로 현대 한국불교의 발전기반을 구축했다.

 

1960년 창간된 불교신문의 시작은 곧 대한불교조계종의 시작이었다. 청담 순호대종사(靑潭淳浩, 1902~1971)는 불교신문의 초대 발행인이자 종단을 출범시킨 주역이었다. 정화운동의 결실로 탄생한 오늘날의 조계종단의 기반을 스님이 닦았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한국불교의 청정성을 회복하고 불교중흥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점에서 근현대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 평가된다.

청담스님은 구한말이었던 190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청담문도회가 발간한 <청담대종사 전서(全書)>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독서와 사색을 즐기던 철학적인 소년이었고 3·1 운동 시위에 가담했던 정의로운 소년이었다. 불교와의 인연은 금강산 마하연에서 수행하던 박포명 스님과 조우하면서 싹텄다.

왜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찬 줄 아느냐? 마음이 뜨겁다고 생각하고 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라는 말에 인생의 전기가 마련됐다. 마음의 원리를 구하고자 출가했고 첫 출가는 일본에서 이뤄졌다. 일제강점기, 지피지기의 심정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 스님은 1924년 효고현(兵庫縣) 쇼운지(松雲寺)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현지 스님들이 부부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해 귀국했다.

이후 경남 고성 옥천사에서 석전 박한영 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다. 그야말로 뼈를 깎는 두타행으로 일관하다가 최고의 선승으로 존경받던 만공스님 문하에서 비로소 도통했다.

예부터 모든 불조는 어리석기 그지없으니(上來佛祖鈍痴漢), 어찌 현학(衒學)의 이치를 제대로 깨우쳤겠는가(安得了知衒邊事)? 만약 나에게 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若人間我何所能), 길가의 오래된 탑이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리(路傍古塔傾西方).”

청담스님의 오도송에 만공스님은 인가를 내렸다. 청담스님이 선지식의 반열에 오르던 순간이다. 1947년 봉암사 결사에 참여하며 수행의 모범을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청담스님의 역사적 의미는 투절한 수행력과 함께 중생구제라는 사회적 실천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암울했던 시절 민족불교운동에 앞장섰다. 개운사 강원의 학인 신분으로 1928년 조선불교학인대회를 주도했고 항일불교의 선봉으로 부상했다. 이후 비구승이 한국불교의 독립성을 수호하기 위해 설립한 선학원의 이사를 맡으면서 젊은 수행자들의 기수가 됐다.

불교정화를 총체적으로 기획한 것도 이 무렵이다. 불교정화운동은 대처승 등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은 당시의 인습을 혁파하자는 취지였다. 단순히 승려의 파계 문제를 넘어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에 묶여 국가에 예속된 불교의 자주화를 이루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교단을 장악한 대처승의 위세는 변함이 없었다.

좀처럼 돌파구를 찾지 못하던 와중 대처승은 사찰에서 나가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로 길이 열렸다. 19549월 전국비구승대회가 열렸으며 청담스님은 도총섭과 총무원장으로 추대돼 정화를 총지휘했다. 19624월 비구를 중심으로 한 통합종단이 출범하기까지 8년에 걸친 갈등과 혼란을 이겨내고 마침내 청정가풍의 복원을 성취했다.

한국불교의 오늘도 그 기원은 스님에게서 찾을 수 있다. 초대 종정이었던 효봉스님에 이어 196611월 제2대 종정에 청담스님이 추대됐다. 종정중심제였던 체제에서 스님은 역경 포교 도제양성3대 사업을 포함해 불교의식의 현대화와 군승제의 신설, 신도조직 강화,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및 불교회관 건립 등 6개 항의 종책을 추진했다.

포교의 현대화 활성화를 위해 불교방송국 설립 및 승가대학 신설을 목표로 세우기도 했다. 이들은 여러 난관과 부침을 겪기는 했으나 종단이 마침내 달성해낸 대작불사들이다. 불교신문의 창간도 이 가운데 하나다.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동시에 정화이념의 실현을 위한 홍보수단이었다. 196011일 청담스님에 의해 정화이념 홍보를 위한 기관지로 탄생한 불교신문은 60년이 흐른 지금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언론으로 성장했다.

이 마음, 생명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 그렇다면 이 생명은, 마음은 곧 우주의 핵심이며, 만물의 생명인 것이다. 영원한 실재인 이 생명, 이 마음을 떠나서 어느 곳에 인생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그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인생이며, 문자 그대로 신비이며 무사의(無邪疑)한 이 생명을, 이 마음을, 이 나를 바로만 깨닫고 보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모조리 해결된다.”

청담스님은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했고 비로소 해결했다. ‘마음은 누구에게나 편재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감각과 개체로서의 가 아니라 통찰과 전체로서의 나를 성취함으로써 얻게 되는 참된 행복을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불교정화의 궁극적 목표 역시 국민 개인의 마음을 맑히는 사회정화였다. 청담스님은 이를 전하고자 생의 마지막까지 군법당으로 대학교로 포교현장을 누볐다. 19711115일 원적에 들었으며 2만 여명의 사부대중이 운집한 다비식은 국장(國葬)에 버금가는 규모였다.
 

불교신문 제1호 1면에 실린 청담스님의 창간사
불교신문 제1호 1면에 실린 청담스님의 창간사

■ 청담스님과 불교신문

교세 확장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게 되길

<불교신문>196011일 창간됐다. 1962년 통합종단 출범 이전으로, 정화운동의 혼란이 여전하던 때다. 종단의 비구 측 총무원장이었던 청담스님은 언론매체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비구승과 대처승 간의 분쟁은 궁극적으로 명분싸움이었고 국민들의 여론을 유리하게 움직일 수 있는 홍보수단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더구나 대처 측은 이미 19594월 기관지 <현대불교>를 만들어 자신들의 정당성을 부르짖고 있었다(지금의 현대불교신문과는 무관). 비구 스님들도 급해졌다. 당시 비구 대처 분규는 종합일간지에서도 다룰 만큼 세간의 관심사였다. 지역의 유지인 대처승을 편드는 지방 기자들로 인해 자칫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졌다. 불교신문은 <현대불교>에 대한 대항마로 출발한 셈이다.

청담스님은 불교신문의 초대 편집인 겸 발행인이었다. 불교신문의 본래 명칭은 <대한불교>. 청담스님은 지령 제11면 창간사에서 신문을 발행하게 된 배경을 천명하고 있다. 제목은 끊임없는 鞭撻愛護(편달애호)로써 育成發展(육성발전)시키자.’

유구한 전통과 역사 그리고 오묘한 교리로써 이 나라 문화발전에 공헌을 했고 오늘날 수많은 신도를 옹()하는 우리 불교는 앞으로 더욱 많은 중생에게 포교하여 모든 국민에게 영적 구원을 주고 건전한 사회건설에 공헌할 사명을 띠고 있다그의 일단으로 우리는 조계종단의 기관지 <대한불교>를 창간한다고 밝혔다. 우리나라의 5000년 역사와 함께해온 불교를 통해 국민들을 각성시키고 계도하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드러나 있다.

불교신문을 종도 단결의 구심점으로 삼겠다는 원력도 확고했다. “종단의 발전상 필요한 과제를 비롯하여 평론, 교리, 문예 그리고 종보, 교계소식 등 다방면의 원고를 취급할 계획이라며 사부대중의 적극적인 협조와 동참을 강조했다.

우리는 포교 상은 물론이요 전국 각지에 그것도 심산유곡에 산재해 있는 각 사찰의 연락소식 교환 및 교리 연구 상으로도 항상(恒常) 간행물의 필요성을 통감했다우리 사부대중들은 물론 사회제위들의 한결같은 편달과 수호에 의하여 급속히 발전되어 교세 확장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구절에서도 불교의 사회적 위상 향상에 대한 꿈을 읽을 수 있다.

불교신문 창간은 비구를 중심으로 한 통합종단의 원만한 정착이 첫째 목적이었다. 실제로 여러 기획기사와 논설을 통해 일제 잔재 청산과 한국불교의 정통성 회복을 꾸준히 역설했다. 5(196051일자)에 실린 대처승은 진정한 ()일 수 없다는 요지의 1개면 특집기사가 단적인 예다.

창간된 해인 1960년을 총결산하는 기사는 전국승려대회에 관한 대대적인 보도와 분석이었다(11, 19601124일자). 1면 전체를 할애한 승려대회 기사를 통해 정화를 향한 비구승단의 비장한 결의를 대내외에 천명했다. 물론 눈앞의 현실만이 아니라 먼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도 착실했다.

1석존의 성탄절을 국정공휴일로 정하자는 사설은 정확히 15년 뒤 부처님오신날의 국가공휴일 제정으로 결실을 맺는다. 불교신문은 19651216일 기관지령의 제정으로 조계종단의 공식적인 기관지가 됐다. 종단과 불교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동시에 부처님 말씀을 널리 전하고 있다.

[불교신문3530호/2019년10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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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불자 2019-11-08 15:4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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