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기록 ‘잃어버린 성지’] <8> 서울 영국사
[현장기록 ‘잃어버린 성지’] <8> 서울 영국사
  • 박봉영 기자
  • 승인 2019.10.18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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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서원 알고보니 사찰터…숭유억불의 상징

도봉서원 발굴조사 결과
금강저 등 불교유물 출토

영국사 허물고 서원 건립
아픈 역사 문헌에만 남아

천년 민중과 함께한 불교
배척 당한 이유 되새겨야
도봉산 영국사(寧國寺)는 사찰이 폐사되고 그 자리에 유림의 서원이 세워진 것으로 확인된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만하다. 황량한 터로 남은 영국사 터는 조선 500년 숭유억불의 상징 같은 곳이다.
도봉산 영국사(寧國寺)는 사찰이 폐사되고 그 자리에 유림의 서원이 세워진 것으로 확인된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만하다. 황량한 터로 남은 영국사 터는 조선 500년 숭유억불의 상징 같은 곳이다.

조선 500년은 숭유억불의 시대다. 한국불교사에서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조선시대 암흑기를 맞았다. 국가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내세워 불교를 탄압했다. 조선 개국 공신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써 불교를 폄하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을 꿈꿨다. 1000년 똥안 민중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든 불교는 탄압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와 백성이 어려울 때마다 함께 극복하는데 앞장섰다.

국가정책에 힘입어 폐불에 앞장선 이들은 유림이었다. 유림은 국가의 강제적인 폐사 조치 보다 더 혹독하게 불교를 핍박했다. 사찰이 양반과 유생들의 유흥장이 되기도 했고 스님들이 노역에 강제 동원되기도 했다.

도봉산 영국사(寧國寺)는 사찰이 폐사되고 그 자리에 유림의 서원이 세워진 것으로 확인된 대표적인 곳이다. 숭유억불의 상징과도 같다. 천주교 성지가 돼버린 천진암, 왕실의 묘로 전락한 가야사의 아픔이 영국사 터에도 전해진다.

200910월 서울시는 도봉산 초입에 위치한 도봉서원을 서울시기념문화재로 지정했다. 국내 서원 가운데 서울시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데다가 조선시대 사림을 대표하는 조광조와 송시열을 배향하는 서원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이에 따라 도봉구는 2011년 도봉서원 원형을 찾기 위한 복원사업에 들어갔다. 도봉서원이 1871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헐린 뒤 1970년대 다시 세워졌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고자 원형 확인을 위한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유교 사원의 자리에서 불교 유물이 대거 발견된 것이다. 금동제 금강저와 금강령, 청동제 뚜껑항아리와 뚜껑합, 향로와 향완, 발우가 온전한 상태로 출토됐고, 연꽃무늬 수막새, 도깨비눈무늬 수막새, 넝쿨무늬 암막새 등 기와편도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명문이 있는 기와에서 대시주 효령대군의 이름도 확인됐다. 효령대군은 조선 3대 임금 태종의 둘째 아들로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전 강설회를 수차례 열도록 등 불교에 심취했다. 종로에 원각사를 건립할 때 조성도감 제조를 맡아 진두 지휘했고 <원각경>을 한글로 간행하기도 했다.

당시 발굴조사를 맡았던 서울문화유산연구원은 발견된 유물을 통해 도봉서원이 건립되기 전 영국사가 있었고 영국사 이전에 도봉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도봉서원 복원정비사업은 중단됐다. 도봉서원 복원을 요구하는 유교측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는 명확한 역사적 고증이 우선돼야 한다는 조계종단을 비롯한 불교계와 문화재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라 불교문화재연구소에 의뢰해 정밀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도봉서원은 양주목사로 부임한 남언경이 1573년 조광조의 학문과 사상,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됐다. 나중에 송시열을 추가 배향했다.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 폐지됐다가 1971년 복원했다. 매년 봄과 가을 춘향제와 추향제를 지내고 있다. 도봉서원은 심사정이 그린 도봉서원도(道峯書院圖)와 정선의 그림을 통해 그 원형을 짐작할 수 있다.

도봉서원은 여러 문헌을 통해 영국사 터에 세워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율곡 이이의 <율곡전서>와 대동여지도를 그린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은 이를 기록하고 있다. 발굴조사는 이를 증명한 것이다.
 

도봉서원을 복원하기 위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불교 유물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사찰을 허물고 서원을 세웠다는 문헌의 기록이 실제 확인된 것이다. 영국사 터에서 나온 금동제 금강저와 금강령.
도봉서원을 복원하기 위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불교 유물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사찰을 허물고 서원을 세웠다는 문헌의 기록이 실제 확인된 것이다. 영국사 터에서 나온 금동제 금강저와 금강령.

절이 헐리고 그 자리에 서원이 세워진 비운의 터. 영국사는 숭유억불의 상징이 될만하다. 영국사 터는 서울의 명산 도봉산 초입에 위치해 있다. 전철 1호선 도봉산역에서 1.5km 가량 깊숙히 들어가야 한다. 광륜사를 지나 무문관으로 유명한 천축사로 오르는 길목이다. 영국사 터까지 평지에 가깝다. 북한산국립공원 권역에 포함돼 있는 영국사 터는 황량하다.

영국사 터 한켠에는 초석을 비롯한 유구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발굴조사와 정밀조사에서 발견된 석재를 모아 놓았다. 깨진 기와 조각들도 차곡차곡 쌓여 있다. 지금은 도봉서원도 모두 해체된 상태. 정밀조사 후 다시 땅을 메워 빈터로 남아 있다.

영국사의 모습은 상상 속에서나 그려야 한다. 영국사를 떠올리며 지은 시가 남아 있다. 한글창제설에 등장하는 신미대사의 친동생으로 공조판서와 호조판서 등을 지낸 김수온이 지은 영국사. 영국사 터에서 발견된 대시주 효령대군명문 기와에서는 영국사가 존재했으나 김수온의 시에서는 영국사가 폐허로 전락한 듯한 인상을 풍긴다.

간수잔원사로우(澗水潺湲瀉路隅)
행인지점시승구(行人指點是僧區)

골짜기 물은 졸졸 길가로 흐르는데
행인이 가리키 곳 스님들 처소라네

피진객도욕추모(披蓁客到欲秋暮)
면벽선부사일포(面壁禪趺斜日晡)

수풀 헤치고 객이 이르니 가을 저물고
면벽 선 수행하던 자리 햇살이 비치네

삼생사묘무인식(三生事杳無人識)
불전중영상기무(佛殿重營尙記無)

삼생의 일 아득하여 아는 이 없으니
불전 다시 지은들 기억할 수 있을까

숭유억불 정책을 편 조선은 애써 불교를 깎아내렸다. 이를 근거로 수차례 사찰을 폐사시키는 조치도 단행했다. 1000년을 뿌리내려온 불교가 국가적으로 배척당한 배경과 이유가 있다. 조선 왕실과도 인연이 있었던 영국사가 서원으로 바뀌었던 이유도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600년이 지난 지금의 불교는 이를 가벼이 여길 수 없다.
 

[불교신문3527호/2019년10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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