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으로 곳곳에 쓰러져 있는
벼들이 불쌍해 한숨이 나오고
자연 앞에 인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확인하면서
마음이 자꾸만 오그라들었다
아무래도 내 죄인 것 같아서…

안혜숙
안혜숙

솨아삭삭…. 소나긴가? 창문을 흔드는 소리에 후다닥 잠에서 깨어 방문부터 열었다. 어젯밤 늦은 귀가로 땅콩을 말리겠다고 장독대에 올려놓은 광주리 때문이었는데, 소나기는커녕 여전히 흐르는 별빛을 바라보면서 참 아름답다는 말이 새나왔다. 그리고 어제의 미열도 함께 밀려옴을 느끼는 순간, 오늘이 있다는 걸 어제는 몰랐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는 얼른 툇돌로 내려섰다. 휘익 스치는 바람이 옷깃에 묻어오는 걸 보면 가을바람이 분명했다.

강화에 와서 제일 좋은 게 날씨라고 입버릇처럼 자랑하다가 올 여름을 나면서는 가뭄으로 한 달간 고생을 했고, 가을이 오겠다 싶은 사이에 두세 차례 쏟아지는 폭우와 태풍으로 우리 집 담장이 무너졌다. 그 바람에 채소밭까지 엉망이 되어 심란해 있는데 이웃집 지붕이 날라 가 뒷집 유리창을 깨트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내 일이 아니라고 웃어넘기는 여유를 부려봤지만. 열흘도 못 넘기고 아프리카 돼지 열병이라니.

더 기막힌 건 멀쩡한 돼지들이 생매장 되는 걸 목격하게 되어 아직까지도 속이 불편하다. 어디 그 뿐인가. 외부에서 들어오는 차량들은 길목마다 방역을 하느라 줄을 세워 10분이면 들어올 수 있는 강화 입성을 두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는 교통마비현상까지. 강화는 역시 섬이었음을 실감했다. 

그래도 소슬바람에 가을을 반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싶다. 더구나 뒷담 넘어 숲에서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이 다른 날과는 다르게 들렸다. 지직배베, 즈, 스슥, 지쉬식시… 세세섹, 나도 모르게 새들을 흉내 내며 웃었다. 어쩌면 새들도 오랜만에 날개를 활짝 펼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나도 덩달아 어깨를 으쓱해 보고는 걸음을 집 밖으로 나섰지만 논두렁으로 들어서면서는 또 다시 걸음걸이가 천근만근으로 온몸이 늘어져갔다.

태풍으로 곳곳에 쓰러져 있는 벼들이 불쌍해서 한숨이 저절로 나오고, 자연 앞에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확인하면서 가슴이, 아니 마음이 자꾸만 오그라들었다. 아무래도 내 죄인 것 같아서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겸손해지겠습니다!” 그래도 지은 죄가 많다고 생각되니 고개가 발끝에서 떨어지질 않아 잠시 서 있는데, 누군가 내 앞으로 불쑥 다가온 인기척에 흠질 놀라 고개를 들었다.

중년으로 보이는 여인이 헐떡거리는 숨을 고르더니 느닷없이 오던 길을 가리켰다. 그쪽으로 가지 말라고, 고라니가 죽었다는 말만 되풀이 하다가 그대로 뺑소니치듯 달아나버렸다. 그녀의 빨갛게 상기된 얼굴은 무엇엔가 놀라서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벌써 저 만치 사라져 버린 여인의 이상한 행동에 호기심이 발동한 내 걸음은 금방 느티나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강화도에는 보호수가 많다. 그녀가 가리키는 느티나무도 317년이나 된 보호수로 그늘이 좋아서, 나 역시 가끔 쉬었다 가곤 했던 터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녀 말대로 나무 밑에 널브러져 있는 고라니의 시체는 아직 마르지 않은 핏물로 갈기갈기 찢긴 짐승의 시체에 덕지덕지 엉켜있었다. 다리와 몸통만 잘라낸 흔적으로 보아 인간의 손길이 분명했다.

고라니 고기를 먹는다는 말은 들었어도 이렇듯 잔인하게 죽어있는 짐승의 몸을 난도질해 살코기만 떼어간 그 누군가의 잔인성에 소름이 끼쳤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경건해진다는데, 아무리 짐승이지만 묻어주지는 못할망정 죽은 살을 베어다 먹겠다는 인간이 있다니, 불끈 솟구치는 분노에 몸서리를 치다가, 마침내 울렁거리던 목울대가 눈물을 토해내고 말았다.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 가슴이 진정되면서 죽음이라는 명제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결국 나도 죽는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문득 ‘마음에 걸림이 없기에 두려움도 없다’는 <반야심경>에서 본 문구가 떠오르고 ‘무가애고무유공포(無罫碍故無有恐怖)’가 겹쳐졌다. 앞으로 남은 여정에 내가 가야 할 길이 선명해지는 것 같아서 마음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불교신문3526호/2019년10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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