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태자 전하께서 신국의 주인입니다”

417년 5월, 양산

눌지는 소수의 호위만 데리고 양산으로 향했다. 실성의 명이었다. 

“왜군의 기승이 날로 더해가고 있다. 신국의 병력이 강성하면 바랄 것이 없겠으나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여 백성의 안위를 보전하기 어려운 형국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내물 마립간 때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실성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나오자 눌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다행히 고구려의 군사들이 서라벌을 지켜주고 있으나 왜군으로부터 계림을 지키기에는 부족하다. 하여, 내가 고구려의 대왕께 군사를 더 보내 달라 청하였더니 허락하셨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구려 군사들이 더 온다는 말에 신하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눌지는 신하들의 반응을 차분히 살펴보았다.

‘모르고 있던 이들도 많았구나. 죄다 실성의 편은 아니었어.’

“태자는 양산으로 나가 고구려 군사를 직접 맞이하여 성의를 보여라.”

“그리하겠습니다.”

눌지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실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죽을 자리로 가는 줄도 모르고 대답 한 번 시원하게 하는구나.’

실성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눌지는 만족스럽게 미소 짓는 실성과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신하들을 뒤로한 채 실성의 ‘눈과 귀’ 역할을 해줄 호위 두엇만 데리고 양산으로 가는 중이었다. 서라벌을 벗어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저기 보이는구나.”

눌지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 고구려 군사가 질서정연한 대오를 갖추고 있었다.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고구려 군사들의 모습은 허둥지둥 죽기 살기로 싸우는 신라 병사의 모습과 사뭇 달랐다. 눌지는 그 차이가 무엇인지 알아가는 중이었다. 눌지를 알아본 고구려 장군이 말을 탄 채 앞으로 달려왔다.

“태자 전하 오셨습니까.”

눌지의 뒤를 지키던 호위병들이 고구려 장수들과 눈을 맞췄다. 눌지는 미동 없이 말 위에 앉아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무기를 휘두르는 소리가 귓가를 스치듯 들렸다. 마치 바람 소리 같았다. 정확하게 급소를 공격당한 호위병 둘이 순식간에 말에서 떨어졌다. 목에서 뜨거운 피가 솟았다. 눌지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듯 눈이 커졌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이내 호흡이 약해지더니 숨을 거뒀다. 심장을 찔린 한 명은 눈 돌릴 틈도 없이 숨이 끊어졌다.

“제가 해도 되는데, 어찌 장군께서 직접 하셨습니까?”

고구려 장군은 씩 웃더니 눌지를 보며 말했다.

“작은 일이라고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신국의 주인이 바뀌는 날인데 태자 전하께서 피를 묻히게 할 순 없지요.”

“고맙네. 가세!”

눌지의 대답은 짧았다. 

‘염장군의 말씀대로 보통이 아니구나.’

고맙다는 말을 한 것도 놀라웠지만, 정중하게 하대를 하는 모습은 도무지 속국의 힘없는 태자로 보이지 않았다. 

“네! 가자!”

고구려 군사들은 눌지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장군은 눌지와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말했다.

“염장군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신국의 왕이 태자 전하를 죽이라고 하였으나 차마 죽일 수 없다고. 실성 마립간은 고구려에 질자로 계실 때부터 염장군과 친분이 깊으셨는데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했습니다.”

“답을 찾았는가?”

“오늘 태자 전하를 직접 뵈니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런가.”

눌지는 두려움과 흥분 속에서 서라벌로 돌아왔다. 염장군의 군사와 합류한 고구려 군대는 거침없이 금성으로 들어갔다. 반가운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실성이 벌떡 일어나 그들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가 만난 것은 눌지의 시신이 아니라 서늘한 칼날이었다.

“어찌하여 그대가 나를…”

실성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오늘부터 태자 전하께서 신국의 새로운 주인입니다.” 

“말도 안 돼.” 

“따르십시오. 대왕의 뜻입니다.”

“안 돼! 절대 안 돼!”

실성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실성의 비명은 금성의 담벼락을 넘지 못했다. 눌지는 실성의 피 붙은 왕좌 위에 앉았다.

“좋습니다. 경하 드리옵니다.”

염장군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정작 신국의 백성들은 마립간이 바뀐 것도 알지 못했고, 궁안의 궁녀들은 두려움에 경하 드린다는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417년 5월, 고구려는 실성을 제거하고 태자 눌지를 새로운 마립간으로 즉위시켰다. 
 

실성이 죽고 신국의 왕이 
바뀌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전해졌다 

고구려 수도 국내성에 
머물고 있던 복호는 착잡했다 
눌지가 마립간에 오른 건 기뻤다 

하지만 고구려 군사들이 
실성을 죽이고 눌지를 마립간에
세웠다는 것이 씁쓸했다

‘신국은 정말 힘이 없구나 
마립간을 폐하고 세우는 일조차 
고구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417년 6월, 국내성

실성이 죽고 신국의 왕이 바뀌었다는 소식은 빠르게 전해졌다.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에 머물고 있던 복호는 착잡했다. 형 눌지가 마립간에 오른 것은 정말 기뻤다. 하지만 고구려 군사들이 실성을 죽이고 눌지를 마립간으로 세웠다는 것이 씁쓸했다.

‘신국은 정말 힘이 없는 나라로구나. 마립간을 폐하고 죽이고 세우는 일조차 고구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소식이 전해지고 며칠 동안 복호는 사람들에게서 축하한다는 말을 계속 들었다. 그때마다 복호는 겉으로는 웃었으나 속으로는 한숨을 쉬었다. 실성이 마립간이 되고 미해와 자신을 각각 왜국과 고구려에 보낼 때는 복수인가 싶어 불안하긴 해도 씁쓸하거나 착잡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작 눌지가 마립간이 되었다는데 속 편하게 축하한다는 말과 환한 미소가 나오질 않았다.

“하아”

답답한 마음에 바람이라도 쐴 겸 습관처럼 이불란사로 간 복호는 불탑을 보면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땅이 꺼지겠습니다. 중생이 무슨 고민이 그리 많아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십니까?”

갑자기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에 복호의 몸이 굳었다.

“3년밖에 안 지난 것 같은데 벌써 제 목소리도 잊으셨나 봅니다.”

장난기가 담긴 익숙한 말투에 웃음과 함께 눈물이 고였다. 

“아도스님”

복호가 몸을 돌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시주님”

아도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한 뼘쯤 더 자란 키는 복호와 비슷해져 있었다. 

“돌아오신 겁니까? 아주 돌아오신 겁니까? 잠시 다녀가시려는 겁니까? 아버지는 만나셨습니까?”

정신없이 질문을 쏟아내는 복호를 보며 아도스님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네, 완전히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도 만났습니다.”

“잘 되었습니다. 정말 잘 되었습니다. 참으로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고민이 많아 홀로 한숨을 쉬고 계셨습니까?”

아도스님의 맑은 눈이 복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것이, 실은…”

투명한 눈빛에 홀린 듯 눌지가 마립간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고백하려던 복호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왜요? 진짜 무슨 일이 있었나요?”

“대왕의 명으로 고구려의 군사가 신국의 왕을 살해했습니다.”

“네?”

아도스님의 눈이 커졌다.

“덕분에 형님께서 왕위에 무사히 오르셨습니다.”

복호는 마치 자신이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눈물을 흘렸다. 

“저는 슬퍼해야 할지, 분노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불교신문3526호/2019년10월16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