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화 된 조석예불…젊은 지식인들 불교 관심

아귀를 위해 몽산시식(蒙山施食)을 하는 장면. ⓒ華藏淨宗學會
아귀를 위해 몽산시식(蒙山施食)을 하는 장면. ⓒ華藏淨宗學會

선종사원의 발우공양 

절에 가면, 커다란 돌을 지고 방아를 찧는 행자와 이를 몰래 지켜보는 노승의 벽화를 간혹 보게 된다. 중국 선종의 5조 홍인(弘忍) 대사가 자신을 찾아온 나무장사 혜능(慧能)의 비범함을 단번에 알아봤으나 짐짓 무시하며 방아를 찧게 한 상황을 그린 것이다. 장작을 패고 방아를 찧으며 행자생활을 하던 그에게 여덟 달이 지난 어느 날 홍인대사가 찾아갔다. 

“쌀은 다 찧었느냐?” “쌀 찧은 지는 오래이나 아직 키질을 못했습니다.” 공부가 다됐냐는 물음에, 공부는 다됐으나 인가를 받지 못했다는 답을 후원살이에 비추어 주고받은 것이다. 

6조 혜능대사가 5조 문하에서 여덟 달 동안 방아를 찧었듯이, 노동으로 자급자족하는 중국 선종의 생활철학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밥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백장회해(百丈懷海)의 선언에 온전히 담겨 있다. 대승불교권을 관통하는 이러한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사상은 음식을 만들고 먹는 과정 모두를 수행으로 여기며 ‘발우공양’이라는 독자적인 식사법을 정립시키기에 이른다. 

오늘날 중국불교의 발우공양은 대방에서 사합발우를 펴는 한국불교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그들은 긴 책상과 의자가 놓인 재당(齋堂)에서 두 개의 주발에 밥과 반찬을 담아 먹기 때문이다. 윤창화 선생은 사합발우에서 주발로 바뀐 것은 명나라 때 재당이 생긴 뒤로 보고 있다.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 위한 식사공간을 만들면서, 그에 적합한 의식과 기물을 정비했음이 짐작된다. 아울러 음식을 준비하는 인력을 따로 두고 있으니 출가자의 공양울력은 간소한 셈이다. 

게송 또한 축소되었으나 발우공양의 핵심이 담긴 오관게(五觀偈)는 반드시 염송하고 있다. 수행자로서 음식을 먹기 전에 깊이 새겨야할 내용이기에 재당을 오관당(五觀堂)이라고도 부른다. 식사가 시작되면 맨밥을 세 번 먹는데 이는 각각 모든 악행을 끊어내고, 선행을 행하며, 남에게 이로운 존재로 살아가겠다는 원력을 상징한다. 발우공양법의 근간이 되는 <선원청규>와 양상은 달라졌지만, 음식을 앞에 두고 그 공덕을 헤아리며 정진하여 깨달음을 이루리라 다짐하는 수행자의 공양정신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윈난성 쿤밍 원통사 미륵보전 앞에서 절을 올리는 젊은 불자들. ⓒ서길수
윈난성 쿤밍 원통사 미륵보전 앞에서 절을 올리는 젊은 불자들. ⓒ서길수

행자의 다양한 소임들

규모가 큰 중국사원에서는 행자의 소임도 다양하다. 이를테면 주지실에는 방장행자, 객실에는 객두행자, 욕실에는 욕두행자 등이 있고 공양과 관련된 일에 가장 많은 행자가 배치되게 마련이다. 그 가운데 갈식행자(喝食行子)라는 독특한 소임을 두었는데, 그는 공양하러 모인 대중에게 큰소리로 오늘 반찬·탕·국의 이름과 내용을 알려주는 일을 맡았다. 지금은 사라진 소임이지만 새 반찬이 무언지 대중의 궁금증을 풀어주게 한 발상이 흥미롭다. 

그런가하면 1103년에 편찬된 <선원청규>가운데 “행자들은 저녁 때 불전에 가서 예불하라”는 내용이 있어 그들의 조석예불인 조모과송(朝暮課頌)의 전통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당시 예불을 한 대중은 소임스님과 행자들이었고 선당(禪堂)의 납자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선방에서 죽비삼배로 조석예불을 대신하는 우리나라 선원의 전통이, ‘법은 언어와 형상을 초월해 있다‘는 선불교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오늘날 중국 선종사원의 아침저녁 예불은 생전과 사후를 위한 것으로 이원화되어 있다. 아침예불이 다라니 계통의 경전을 외워 사원과 대중의 무사안녕을 기원하고 재앙을 쫓는 데 있다면, 저녁예불은 사후기도와 망자기도의 성격을 지닌다. 이에 따라 저녁에 올리는 예불은 아미타경과 참회문으로 서방정토를 향한 산 자의 바람을 담은 뒤, 망자를 위한 몽산시식(蒙山施食)으로 진행된다. 이 시식은 고려시대 선불교에 큰 영향을 준 원나라의 몽산 덕이(德異) 선사가 만든 것으로, ‘아귀’로 상징되는 사후중생에게 음식을 베푸는 의식이다. 

원래 사시공양 때 밥알을 남겨 저녁에 아귀에게 주었으나 현재는 쌀 일곱 톨을 양식으로 쓰며, 아침예불에 다라니로 가지(加持)한 차를 병에 부어두었다가 감로수로 쓴다. 이때 ‘다라니를 외우며 수인(手印)을 맺고 불보살을 관하는’ 삼밀가지로써 사후 육도중생이 먹을 수 있는 풍부한 음식과 감로수로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 그들의 해탈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불교로 눈을 돌려보면, 엄격한 수행가풍을 지닌 석남사 스님들은 “사시공양 때 밥알을 조금씩 떼어 아귀에게 베푸는 생반(生飯)을 법공양의 전통으로 삼아왔다”고 한다. 발우공양에서 생반에 이르기까지, 중국불교에서는 변화를 거듭한 의식이 한국사찰의 일상 속에 여법하게 이어지고 있음이 주목된다. 
 

소림사 법당 앞의 향로에서 피어난 자욱한 향의 연기.
소림사 법당 앞의 향로에서 피어난 자욱한 향의 연기.

향 피워 기도하는 불자들

달마대사를 모셔놓은 출입금지의 소림사 서방성인전(西方聖人殿)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만났다. 법당 내부를 들여다보니 무술도량으로 쓰던 곳이라 부서지고 낡은 벽돌바닥에 높은 천장이 황량하기만 그곳에서, 사색에 잠긴 스님이 법당을 끊임없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스님의 당연한 모습에 감동을 받은 것은, 중국불교에 대해 ‘내실은 없고 상업화·관료화된 불교’라는 잘못된 선입견을 지닌 탓이었다. 

중국불교는 공산화와 함께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받았다가 새롭게 깨어나는 중이었고, 실제 현장에서 만난 모습은 하나의 잣대로 설명할 수 없이 다양하였다. 현대문물에 열려있으면서도 계율과 신행을 중시하는 스님들이 많고, 출가자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도 높은 편이다. 스님들이 비행기를 타면 미리 청하지 않더라도 별도의 채식 기내식사가 제공되는가하면, 식당에서 스님의 식사는 따로 준비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사원을 찾은 이들도 관광에 머물지 않고 대부분 예불을 올리는 걸 보면, 불자들의 비중이 높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젊은이들이 많은 것도 중국불교의 한 특성이다. 자연스럽게 향을 피우고 부처님께 절을 올리는 이십대의 모습에서 ‘젊은 불교’의 부러운 앞날을 내다보게 된다. 중국불자들이 방석에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리는 식으로 절하는 것은 근래에 생겨난 풍습이 아니라 오랜 전통을 지녔다. 추운 북방지역이라 아파트든 법당이든 실내에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문화이기에 엎드려 절하는 것이 형편상 불편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의 향공양은 놀라울 정도이다. 향을 이마 위까지 올린 채 경건하게 기도하는 불자들의 모습은 어느 사원에서나 만나는 일상적인 풍경이다. 법당 앞에는 어김없이 커다란 청동향로가 자리하고, 향로의 크기에 부응하듯 그들은 팔뚝길이 만한 향을 한줌씩 잡아 불을 붙인다. 향의 가격도 만만치 않으나 개의치 않는 불자들로 인해 경내는 늘 향과 연기로 자욱하다. 마치 길고 두툼한 향이 오래도록 타들어가서, 그들의 기도가 짙은 연기와 향으로 부처님께 강렬하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듯하다. 
 

허난성 뤄양 용문석굴. 그림=장명희
허난성 뤄양 용문석굴. 그림=장명희

재가불자들이 피우는 꽃

몇 년 전 중국의 <환구시보>에 ‘세속에서 좌절을 겪는 한족청년들이 전통불교를 찾는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젊은 지식인들이 불교에 큰 관심을 가지면서 불교를 배우고 그 가르침에 따르는 것을 ‘멋지다’고 여기는 흐름을 소개한 내용이다. 금전만능주의에 회의를 느끼고 내면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 그들이, 마음을 닦고 삶을 성찰하는 불교에 깊이 공감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풍조는, 불교사원뿐만 아니라 도교사원과 유교사당에 가서도 똑같이 향을 올리고 절하는 기복신앙과 결을 달리한다. 중국인들의 탄력적인 신앙을 일컬어 “시험을 앞둔 이들에겐 유교의 공자가 필요하고, 마음이 어지러우면 불교의 석가모니가 필요하며, 건강이 나쁘거나 장사를 시작할 때는 도교의 노자나 재물신 관우가 필요하다”는 말이 전한다. 이처럼 타력에 기대어 원을 비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마음을 닦는 자력의 종교로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중국불교 거사림(居士林)의 활동은 놀랄 정도여서, 오늘날 중국불교의 꽃은 재가불자들에 의해 피어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청말민국초(淸末民國初)에 일어난 거사불교운동에서 시작된 것이었는데, 전영숙 선생은 이에 대해 재가자와 출가자 상호간의 도전과 응전 속에서 각성되고 단련된 것이라 보았다. 

당시 양문회(楊文會)·구양점(歐陽漸) 등 재가선각자들은 풍전등화의 나라 앞에서 “백만이나 되는 승려 가운데 비구라 칭해도 부끄럽지 않을 이는 새벽별만큼이나 드물다.”며 출가자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고, “거사가 출가자를 대신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선언과 함께 불교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이는 출가자들에게 커다란 위기의식으로 작용해, 개혁의지를 가진 스님들을 중심으로 승려교육에 목숨을 걸며 불교의 역량을 끌어올렸던 것이다. 

개혁개방이 되면서 그간 폐쇄되었던 전국의 거사림이 우후죽순처럼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도심 직장의 엘리트와 전문가들이 불교모임을 결성해 참선과 경전공부에 몰두하고, 부유층과 젊은이들이 물질보다 마음의 풍요로움에 이끌리면서, 중국불교는 또 한 차례 엄청난 역량을 결집하는 중이다. 

[불교신문3526호/2019년10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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