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현스님
자현스님

공자가 사망한 후 제자들은 스승을 추모하며 배운 가르침을 정리한다. 이렇게 제자들이 서로 논의해서 지은 책이 바로 <논어(論語)>다. 해서 <논어>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짧은 가르침과 간략한 일화들로 점철된 길지 않은 책이 된다. 

그런데 이런 <논어>에 두 번이나 반복되는 문구가 있다. “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 즉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요구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우리의 역지사지(易地思之) 쯤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방점이 찍히는 곳이 둘 있다. 즉 ‘나(己)’와 ‘다른 사람(人)’이라는 ‘인간’에 대한 부분이다. 유교는 철저하게 인본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이는 유교의 핵심 덕목인 ‘인(仁)’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人+人)를 나타낸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때문에 유교의 고려 대상은 인간에 제한되곤 한다. 맹자는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한다(君子遠疱腐)”고 했다. 그러나 불살생을 말하거나 육식을 끊으라고는 하지 않는다. 즉 유교의 생명관에는 엄연한 차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법구경>에서 ‘모든 생명 있는 존재는 죽음과 폭력을 두려워한다’고 가르치셨다. 여기에서 방점이 찍히는 곳은 ‘인간’이 아닌 ‘모든’이다. 이 때문에 불교는 당연히 불살생과 비폭력을 강조한다. 불교의 생명관이 대승불교에 이르면, 육식 금지와 적극적 중생구제인 방생으로까지 확대된다. 불교의 생명존중은 유교를 훨씬 넘어서 있는 것이다.

현대는 인간중심의 무차별적 자연파괴와 무분별한 생명남획으로 인해, 지구 전체가 심각한 위기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오늘날 선진국을 중심으로 이 같은 문제를 시정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다양한 국제기구가 발족되는 등 재앙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또 서구를 중심으로 채식주의가 유행하고, 반려동물을 통해 동물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재고(再考)되면서 생명에 대한 가치를 새삼 돌이켜 보게 됐다. 이런 점에서 모든 생명을 보듬어 안는 불교의 생명관과 평화로운 공존은 새로운 시대의 해법과 대안이 되기에 충분하다.

고통받는 중생을 주체적으로 구원하고 살펴주는 방생은 대승불교 생명관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방생만큼 생명존중의 가치와 정신을 현실적으로 잘 구현한 종교전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나 이슬람 또는 힌두교 등이 희생제와 피의 제전을 정당화한 것과 대비한다면, 불교의 방생 정신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 명나라의 운서주굉(雲棲株宏) 등은 사찰 앞에 방생 연못(放生池)을 만들고 그 곳에 방생할 것을 권장했다. 때문에 중국 사찰에서는 입구에 방생지가 있는 곳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어떤 분들은 방생하는 대상 때문에 생태계 파괴가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사찰 방생에서 주로 사용되는 미꾸라지에게 이런 위험성은 전혀 없다.

방생을 통해서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어여삐 여기는 마음을 가진다면, 내적으로는 자비의 싹이 북돋고 외적으로는 복된 삶의 가치가 뻗어 나갈 것이다. 또 지구적으로는 환경을 보존하며, 자연에 대한 겸손함을 통해 이기심을 버리는 참된 삶의 밝은 길이 펼쳐질 것이다.

[불교신문3525호/2019년10월12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