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남자야, 열반은 괴로움을 끊은 것이며, 열반 아닌 것은 괴로움이다. 모든 중생이 두 가지 있음을 보았으니 괴로움과 괴롭지 않음이다.

- <대반열반경> 중에서
 


귀뚜리 울자 찌르레기도 곁에서 운다. 여름과 겨울, 열두고비를 넘는 중 가을볕에 가렵고 쓰라린 피부에 간직한 담수(潭水)를 터뜨린다. 한 고비 겨우 넘으면 한숨이고 두 고비 겨우 넘기고 나면 걱정만 쌓이거늘, 귀뚜리와 찌르레기가 곁에서 곁을 지켜주며 우리의 행복이 그게 다일지라도 그저 좋다고 서로가 서로를 내 몸처럼 안고 운다.

우는 일도 한 생 가운데 찰나 같아서 지나친 계절이사 이유는 불문(不問)이다. 귀뚜리가 찌르레기가 어두컴컴한 대문 앞에서, 허물어져가는 담벼락 밑에서, 뉘가 볼 새라 풀잎아래 들어서, 손을 앙잡고 얼굴을 부비다 다시는 나누지 못할 따스한 체온인 양 달고비 별고비마다 쉼도 없이 바삐바삐 울고 또 울기 시작한다.

아니다. 아니다. 귀뚜리와 찌르레기가 곁을 지키며 웃는다. 사랑할 날은 아직 달고비 별고비처럼 많이 남았다고 웃는다. 서로가 서로의 시간을 배웅하며 체온과 체온을 부비며 웃는다. 다시 와도 좋다고, 다시 아니 와도 그저 좋다고 이울고 차는 달빛처럼 웃는다. 빗속에서도 흐르는 강물처럼 웃는다. 

[불교신문3524호/2019년10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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