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주님의 성함이 굴마가 맞습니까?”

417년, 위나라 수도 평성

현창 화상을 찾아온 굴마는 오늘도 허탕을 쳤다. 세 시진이 넘도록 기다렸으나 화상은 끝내 얼굴은커녕 언질도 주지 않았다.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과 고도령에 대한 미련을 주렁주렁 남겨둔 채 돌아가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하아”

집으로 돌아온 굴마는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새하얀 비단 옷자락을 툭툭 치면서 주저앉았다. 눈가의 옅은 주름과 멋지게 다듬은 수염이 그간의 세월을 말해주었다. 굴마는 섬섬옥수를 뻗어 아도가 가져온 호안석 염주와 푸른 보석이 박힌 반지를 우아하게 쓰다듬었다. 그를 보며 말갛게 웃던 고도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벌써 20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굴마에게는 여전히 생생한 현재였다. 고도령을 고구려에 두고 돌아온 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달이 밝은 밤에는 달이 밝아서, 달이 없는 밤에는 달이 없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밤을 지새우다가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던 어느 날, 현창 화상을 만났다. 

현창 화상은 굴마의 번뇌와 고통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인과의 업보라고 했다.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고 베푸는 삶을 살다 보면 그를 힘들게 하는 인연과 업보를 바꿀 수 있다고 했다. 굴마는 다시 고민했다. 힘들고 괴로워도 고도령과의 인연은 그의 남은 인생을 지켜줄 유일한 기쁨이었다. 아무리 좋은 인연이 온다고 해도 그것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거사님을 위한 기도와 보시가 아닙니다. 거사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음을 다해 기도하십시오. 거사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든 일을 만났을 때 부처님의 가피를 만날 수 있게 베풀고 나누며 복을 쌓으십시오. 거사님의 간절함이 부처님께 닿는다면, 반드시 감응이 있을 것입니다.”

굴마는 현창 화상의 말에 매달려 보기로 했다.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품고 지켜온 지 12년이 흐른 어느 날, 꿈을 꾸는 것처럼 아들 아도가 눈앞에 나타났다. 

“시주님의 성함이 굴마가 맞습니까? 제 어머니의 이름은 고도령입니다. 어머니께서 당신을 만나면 이것을 보여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도가 그에게 호안석 염주와 반지를 내밀었다. 아버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굴마는 아도가 자신의 아들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보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입을 여는 순간,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두려워 그저 눈으로 보고 또 볼 뿐이었다. 유난히 높은 이마와 콧날은 자신을 닮았으나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차분하고 깊은 눈동자와 붉은빛이 도는 단정한 입술은 영락없는 고도령이었다. 

‘그대가 우리 아들을 낳았구려. 긴 세월 홀로 얼마나 힘이 드셨소?’

굴마는 아도를 품에 끌어안고 싶은 것을 참느라 힘을 다해 버텼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도의 총명한 얼굴을 쓰다듬고 싶은 것을 참느라 꽉 움켜쥔 손이 떨려왔다. 이를 알지 못하는 아도는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굴마를 향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저의 어머니를 아시는지요?”

그리움이 너무 깊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주책맞게 눈물이 고였다. 

“네, 압니다. 아주 잘 압니다.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지요.”

굴마는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제야 아도가 안심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순간 아도의 양 볼에 고도령의 쏙 빼닮은 얕은 볼우물이 패였다. 참았던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져 버렸다. 뜨거워진 눈시울을 감추려고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스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한 번만 안아보아도 되겠습니까?”

눈가가 축축해진 굴마가 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묻자 당황한 표정을 짓던 아도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의 품으로 안겨 왔다. 그 따뜻한 온기를 온몸으로 느낀 굴마는 그만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한순간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굴마는 아도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눌러왔던 그리움을 터트렸다. 감히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까지 바랄 수는 없었다. 품을 내어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부자의 해후는 짧았다. 굴마는 아도가 단 몇 달이라도 자신의 집에 머물며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으나 아도는 하루라도 빨리 좋은 스승을 만나 부처님 법을 공부하고자 했다. 하는 수 없이 굴마는 아도와 함께 현창화상을 찾아갔다. 

제자를 받는 것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현창화상은 그 자리에서 아도를 상좌로 삼았다. 그날부터 아도는 현창화상을 모시며 지냈고, 굴마는 먼발치에서조차 아도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사흘이 지나자 애가 탄 굴마가 현창화상을 만나러 갔으나 화상은 야속하게도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았다. 그 후에도 얼굴 한번 보기가 어려웠고, 만난다 해도 스쳐 지나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들의 이름조차 모르고 살았던 세월이 그토록 길었건만, 가까이 있는데 볼 수 없다는 것은 정말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아, 남의 금쪽같은 아들을 덥석 데려가서는 만나지도 못하게 하다니 화상도 정말 너무하는군. 다른 사람도 아닌 화상이 내 아들을 상좌로 삼았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말이야.”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굴마의 눈과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속옷이며 버선, 몸에 좋다는 약재와 차, 구하기 힘든 간식과 경전을 공부하고 베껴 쓸 귀한 종이까지 빠짐없이 챙기는 야무진 손끝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고도령이 아니었다면, 아도가 아니었다면, 세상에 태어나 아버지가 된 기쁨이 어찌 알았을 것이며 아들이 먹고 입고 쓸 것을 챙기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아도가 물건을 받고 좋아할 것을 상상하며 굴마는 어느새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제 어머니는 고도령입니다 
어머니께서 당신을 만나면 
보여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도가 호안석 염주와 
반지를 내밀었다

아버지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굴마는 아도가 
자신의 아들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한편, 신라 눌지와
고구려군 염 장군은…

 

417년, 서라벌 고구려 군사 병영

“오셨습니까? 태자 저하. 정말 혼자 오셨군요.”

그믐달이 뜬 밤, 눌지는 홀로 고구려 장군의 처소를 찾았다. 

“마립간께서 장군께 갈 때, 늦은 밤 혼자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유가 있으셨을 테지요.”

염 장군의 눈을 바라보는 눌지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자세는 당당했다. 

‘제법이구나.’

염 장군은 미소를 지으며 눌지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처소가 어두워서 당황하지는 않으셨나 모르겠습니다. 마립간께서 은밀하게 진행하라 명하셔서 불을 켜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밤늦게 행동하는 것을 자제하게 하지만 한 달에 두 번, 병사들이 자유롭게 외박할 수 있게 조치하고 있습니다. 객지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외로움을 달래줄 시간이 필요해서 말이죠.”

“그렇군요. 서라벌에서 가정을 꾸린 병사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어느새 신국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언젠가 고향에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아내와 자식을 함께 고구려에 가고자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서라벌에 남고자 하는 병사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방법이 고구려와 신국 모두에게 이롭고 또 병사들과 가족들에게도 좋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

염 장군은 깜짝 놀랐다. 안부를 묻듯 가볍게 말을 던졌는데, 눌지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고구려와 신국의 장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 동생도 지금쯤 고구려에서 인연을 만났으려나 궁금하군요. 영웅호걸에 익숙한 고구려 여인들이 제 동생 같은 남자를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하하하.”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재주도 보통이 아니었다. 농담인 척 고구려에 인질로 간 복호의 이야기를 툭 꺼냈다. 과연 태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글쎄요. 태자 저하도 그렇고 마립간께서도 그렇고 눈이 여간 높으신 게 아닌데, 복호 왕자님 눈에 차려면 보통 여인이어서는 안 되겠지요.”

“하하하, 글쎄요. 녀석이 워낙 숫기가 없어서. 또 모르지요. 고구려에 간 지 벌써 다섯 해가 지났으니 이제는 조금 남자다워지지 않았을까 기대해봅니다.”

영양가 없는 대화 속에서 눌지와 염 장군은 치밀하게 서로를 떠보며 계산했다. 한 시진쯤 지났을 때 염 장군은 눌지를 배웅했다.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태자 저하. 자리를 마련할 테니 꼭 와주시지요.”

“네, 염 장군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꼭 가겠습니다.”

눌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반듯하게 편 채 당당하게 돌아갔다. 눌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염 장군은 실성의 제안을 다시 고려했다. 눌지와 실성, 실성과 눌지 어느 쪽이 고구려에 더 유용한 존재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눌지를 제거하겠다는 실성의 의지는 확고했다. 다만 눌지에 대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휴우”

꼿꼿하고 여유롭게 밤길을 걷던 눌지는 월성으로 돌아오자 참았던 숨을 내쉬며 땀을 닦았다. 등이며 겨드랑이가 온통 땀에 젖어 축축했다. 염 장군은 아마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겉옷 안에 미리 얇은 옷을 몇 겹이나 입은 것이 다행이었다.

[불교신문3524호/2019년10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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