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문으로 보는 근현대 불교사 명장면 ④ 1990년대

1990년대는 불교 자주화, 종단 민주화 등을 목표로 많은 변화를 이뤄낸 시기이자 종단 분규로 인한 혼란이 공존했던 시기였다. 분단 이후 남북 불교지도자 첫 만남 1991년 11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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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출판문화상 제정

불교출판 문화 활성화와 저변 확대를 위해 매년 올해의 불서를 선정, 시상하는 불교출판문화상. 불교출판문화상이 처음 제정된 것은 1990년으로 본지가 창간 30주년을 맞아 실시한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교계 최초로 열린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출판문화상 공모에는 총 57종의 도서가 접수되는 등 성황리에 진행됐다. 심사 결과 최우수상인 올해의 불서에는 강건기 전북대 교수의 <마음 닦는 길>이, 저작상에는 민희식 한양대 교수의 <몽테뉴와 파스칼의 서구사상>이, 꾸밈상에는 대원사의 ‘빛깔있는 책 시리즈’가 각각 선정됐다.

또 장경각의 <고경선림총서>가 기획상, 고려원의 <룸비니 불교동화>가 특별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본지는 심사 결과와 시상식 보도, 수상자 인터뷰(1990년 11월14일자)를 통해 불교출판문화상 홍보를 통해 불교도서 출판의 활성화를 이끌었다.

- 분단 이후 남북 불교지도자 첫 만남

1990년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남북 불교교류에도 훈풍이 불었다. 남북 화해 국면은 분단 이후 첫 남북 불교지도자 만남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분단 46년 만의 일이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손을 맞잡은 남북 불교지도자들은 조국통일기원 합동법회를 봉행하고 통일을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마음을 모았다.

본지 역시 미국 LA 동행 취재를 통해 역사적인 만남의 순간을 생생히 전했다. 본지는 ‘불교도가 통일 앞당기자’ 기사를 시작으로 ‘통일불교의 새지평’ 주제 사설과 남북불교대표 LA회동 의의(1991년 11월6일자) 기사를 통해 만남의 의미를 집중 조명했다. 또 ‘통일위해 상호교류 합의’ 기사와 ‘분단 허물 통일 불심 활짝’ 사진 화보(1991년 11월13일자)를 통해 남북불교 교류 여론을 주도했다.

당시 △남북불교도가 통일을 위해 공동노력 △통일문제 논의를 위해 학술교류 실시 △불교유적지의 탐사, 답사, 공동발굴 등 6개항의 합의를 이뤘지만 합의서 작성까지는 이뤄지지 못해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 종정 성철스님 입적

1993년 11월4일 종정 성철스님이 입적했다. 한국불교의 큰 어른을 잃은 불교계는 물론이고 한국사회가 성철스님 원적에 애도를 표했다. 전국 각지에서 해인사를 찾은 인파만 50만명에 달했다. 본지 역시 특집신문(1993년 11월17일자)을 발행하고 성철스님을 조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당시 원로회장 의장 서암스님은 “조각으로 기운 누더기 한 벌로 색신을 가리고 장좌불와와 묵언정진으로 뼈를 저미는 수행자의 생활로 일관했다”고 성철스님을 회고했으며, 김영삼 대통령도 “불교계의 정신적 지주이신 성철 큰스님의 입적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는 조전을 보냈다.

성철스님 상좌인 원택스님 역시 “3년 동안 스님의 방청소를 하며 꾸중듣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사실 그때는 모시기가 무척 힘들었지만 지금이라도 금방 저를 불러 꾸지람을 주실 것 같은 기분”이라고 성철스님과의 일화를 소개했다. 이와 함께 각계의 조전 내용, 성철스님이 남긴 저서, 화보와 다시듣는 사자후, 성철스님의 주요 수행처 및 열반관련 주요 언론 보도 총점검 등 다양한 특집기사를 실었다.

종정 성철스님 입적 1993년 11월17일자
1994년 종단개혁 1994년 4월27일자

- 1994년 종단개혁

1994년은 종단 역사에서 특별한 해였다. 불교 자주화, 종단 민주화 등을 내걸고 종단 개혁에 나서 많은 변화를 일궈낸 해였다. 서의현 총무원장의 3선 저지를 위해 원로 스님부터 학인 스님에 이르기까지 전 종도들이 나섰다. 독단적인 종단운영과 3선을 부정하며 개혁을 요구했고 그 결과 서의현 총무원장은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994년 종단개혁은 불교신문 역사에서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당시 불교신문(1994년 4월6일자)은 개혁을 요구하는 스님들의 총무원 점거를 ‘폭력난입’으로 규정하며 기존 종권을 옹호하는 기조를 유지했다. 하지만 4‧10 승려대회와 개혁회의 출범 이후 발행된 신문(1994년 4월27일자)에서 개혁의 의미를 보도하며 종단 안정화를 선도하며 개혁에 동참했다.

또 “언론본연의 사명을 망각한 채 편파보도로 일관함으로써 불자여러분의 지탄을 받아왔던 점 뼈아픈 마음을 참회드립니다…”라는 사과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

1994년 11월21일 제28대 총무원장에 월주스님이 선출됐다. 종단개혁 바람과 문민정부 출범이라는 불교계 안팎의 흐름 속에서 제28대 집행부는 불교의 현대화와 사회화를 추진한다.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의 출발이었다. 종단 분규로 인한 불교의 대사회적 이미지를 개선하고 국민들로부터 존경받고 불교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총무원장 월주스님 1995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을 △제도개혁의 정착과 보완 △수도‧교육‧포교‧역경 사업의 적극적 추진 △재정의 합리적 관리와 운용 등과 함께 종단 운영 4대 목표로 제시했다.

또 1995년 1월8일 성도절을 맞아 조계사에서 ‘나와 이웃 그리고 자연은 하나’를 주제로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 전개를 공식 선언했다. 불교가 환경, 통일, 노동, 인권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하고 복지사업에 앞장선 것도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의 결실이었다. 당시 불교신문(1995년 1월13일자)은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으로 새불교를 열자”고 강조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지면에 반영했다.

- 중앙승가대 정규대학으로 승격

한국불교 인재 양성의 산실인 중앙승가대학교가 정규대학으로 승격됐다. 1996년 12월11일 교육부는 중앙승가대학교에 2개 학과 불교학과 60명, 사회복지학과 60명 등 입학정원 120명, 총 학생 정원480명으로 하는 4년제 정규대 승격을 인가했다. 이로써 학교 공식 명칭도 ‘중앙승가학교’에서 ‘중앙승가대학교’로 바뀌었으며, 그동안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학력만 인정받은데 이어 문학사 학위도 받을 수 있게 됐다.

중앙승가대 정규대학 승격은 종단과 동문 스님들, 불자들이 한마음으로 노력해 온 결과였다. 이에 대해 당시 총무원장 월주스님은 “전불교도의 바람이 18년만에 이루어져 기쁘기 한량없다. 앞으로 전통승가교육의 틀안에서 사회가 필요한 성직자로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불교신문(1996년 12월17일자)도 기사와 사설을 통해 ‘종단 교육불사 새 전기’로 평가했다.

- 전법의 해 선포

종단은 1997년 ‘전법의 해’로 선포했다(1997년 1월14일자). 종단 3대 사업의 하나인 포교의 획기적 발전을 모색하기 위한 취지에서였다. 전법을 통해 현대사회 문제와 사회갈등을 부처님 가르침을 해소하자는 뜻도 담겨 있었다. 전법의 해는 신년기자회견을 통해 처음 언급됐고, 이어 1997년 2월24일 조계사에서 전법의 해 선포식을 봉행하면서 본격화됐다.

전법도량 지정, 불교대학 건립 추진, 문화재사찰 포교, 5개년 계획 수립, 입문교육 의무화, 인사고과 반영, 지도자대회 개최, 포교대상 확대, 재적사찰갖기 추진, 컴퓨터 포교 강화 등 10대 사업으로 추진됐다.

선포식에서 총무원장 월주스님은 “포교는 교단을 유지시키는 근본이다. 전법의 해 선포식을 계기로 부처님의 전법행을 오늘에 되살리는 대원력에 동참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1996년 3월4일자) 본지 역시 전법의 해를 맞아 전법을 화두로 다양한 기사들을 보도했다. 

불교신문 한글제호와 가로쓰기 단행 1998년 1월1일자

- 불교신문 한글제호와 가로쓰기 단행

세로쓰기를 고수해 오던 신문들이 점차 가로쓰기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중앙일간지 ‘한계레신문’이 1988년 창간 때부터 가로쓰기를 도입한 것으로 시작으로 1990년대 들어 ‘중앙일보’를 필두로 다른 중앙일간지들 역시 가로쓰기를 도입했다. 불교신문도 1998년 1월1일자 신년호를 시작으로 전면 가로쓰기 편집을 도입했다. 가로쓰기 편집에 맞춰 불교신문 제호 역시 한자에서 한글로 새롭게 제작해 사용했다.

가로쓰기 편집과 더불어 한 주에 있었던 사건이나 행사를 한 컷의 만화로 담은 ‘만평’과 옛 고승들의 수준높은 법거량을 소개하는 ‘할’, 한국의 미가 오롯이 담겨 있는 전통사찰의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사찰의 美 한국의 美’, 고승들의 부도비를 찾아 부도와 아름다움을 조명하는 ‘부도이야기’, 산사의 하루일과와 사찰 문화를 조명하는 ‘사진으로 보는 산사 365일’ 등 새로운 기획과 연재물을 대폭 보강했다.

- 1998년 종단 분규

종단개혁 이후 안정화에 접어들었던 종단은 1998년 11월 제29대 총무원장 선거를 맞아 다시금 혼란에 휩싸였다. 제28대 총무원장 월주스님이 출마하면서 3선 논쟁이 점화됐다. 당시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총무원장의 3선 부당, 종헌종법 개정, 제2의 정화불사’라는 종정교시를 봉행하기 위해 정화개혁회의가 출범했다. 정화개혁회의가 총무원 청사를 기습 점거하며 종헌종법 수호를 내건 총무원과 충돌하며 종단은 혼돈에 빠졌다.

혼란 속에서 불교신문 역시 총무원 측과 정화개혁회의 측으로 양분되고 말았다. “종단사태로 인하여 신문제작에 차질을 빚게 돼 독자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라는 사과문을 게재(1998년 12월15일자)할 정도로 신문 발행도 차질을 빚었다. 결국 총무원이 ‘정화개혁회의 퇴거단행 가처분소송’에서 승소하면서 정부는 경찰력을 투입했고 정화개혁회의가 총무원 청사에서 퇴각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하지만 불교계는 분규로 인해 사회적 비난과 불신에 직면하게 됐다.

- 총무원장 부존재 판결서 종단 패소

1998년 종단 분규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고 제29대 총무원장에 고산스님이 당선됐다. 하지만 사법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종단은 다시금 혼란에 빠지게 됐다. 1999년 10월1일 서울지방법원은 정화개혁회의측이 제기한 총무원장 부존재 확인 청구소송에서 “총무원장이 없음을 확인한다”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에 “일심동체로 법통 수호하라”는 종정교시를 비롯해 ‘불교법난’, ‘오판’ 등 불교계의 거센 항의가 이어졌다. 사법부 오판을 규탄하는 1999년 10월12일 조계사 궐기대회에는 1만6000여 명이 운집했다. 하지만 총무원은 종단 안정을 위해 항소를 포기하고 총무부장 직무대행 체제에서 선거를 다시 치르기로 결정했다.

고산스님은 기자회견을 열고 사법부의 판단을 “종단의 혼란을 야기하고 조계종단의 자주권과 법통을 짓밟는 처사”라고 규정하며 “재판부의 판결을 도저히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예상되는 혼란과 분규를 최소화하려는 취지에서 항소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1999년 10월7일자)”고 밝혔다.

[불교신문3523호/2019년10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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