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철규
조철규

삶은 산 자의 몫이다. 삶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산 자의 몫이다. 죽은 자의 뒤치다꺼리와 죽은 자에 대한 의식(意識)까지도 산자의 몫이다. 그래서 누구에겐 시원하기도 하고 누구에겐 안타까울 정도로 애틋한 감정이 솟는다.

그 죽음이 처한 상황에 대해 산자가 여러모로 생각을 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살아 있는 동안 사람답게 살다가 망설임 없이 선뜻 털고 갈 수 있을까. 이런 떠남을 한편은 선종(善終)이라 하고 한편은 입멸(入滅)이라 한다. 

누구든 지나 온 길이 있다. 그 삶에 슬픔과 기쁨이 있다. 애환이 있다. 지난 일들이 어쩌면 지난(持難)하고 지순(至順)하다. 그만큼 아쉽고 그립고 또 부질없고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까지 뒤엉켜 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고뇌하고 있는 것은 지금 살아있다는 증거다. 이 증거는 고뇌하고 또 고뇌하므로 ‘나’라는 존재는 또다른 ‘나’로 끊임없이 변모해 가고 있다. 이렇게 끊임없이 변할 수밖에 없는 나의 불완전한 존재를 두고 무엇을 ‘나’라고 하는 것일까. 이런 ‘나’를 왜 ‘나’라고 하는 것일까.

우리는 생긴 모양이나 생각이 서로 다른 개체로 나와 남을 구분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이가 듦에 따라 모양이나 생각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된 ‘나’와 변화되기 이전의 ‘나’는 분명 다른 ‘나’인데 왜 같은 하나의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나’라고 하는 의식이 끊임없이 추억되고 이어지는 느낌들, 이러한 연속성이 주는 기억이 ‘나’를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까지도 우리는 얼마간 털어내고 비워야 한다. 

나무가 무성했던 잎들을 다 털어버리고 혹독한 추위를 준비해야 하듯이 지금까지의 삶을 겸허히 비우고 내려놓아야 한다. 새봄에 다시 새움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하는 것은, 스스로 끊임없이 털어버리고 비우고 내려놓는 데 있다. 이것이 삶의 순리다. 결국 채우고 나누고 비우고 하는 고리가 삶의 순환법칙이다. 이와 같이 자기로부터 벗어나 자기를 비우고 털어내야 한다.

이것이 사람의 길이고 사람의 삶은 자연과 같다. 그러므로 자연과 더불어 우리에게 주어진 시·공간 역시 시간은 현재가 아니고 무시간적 현재이다. 공간은 내가 있는 곳이 아니고 무공간적 공간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미 우주적 삶을 살고 있다. 

 길을 가다 보면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너무 힘들고 버겁다. ‘나’를 내려놓고 가볍게 가야 한다. 가능한 버리고 비움으로써 무엇이 내게 소중한 것인지를 성찰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울 수 있다면, 좋은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건넬 수 있다면, 조금만 더 자신을 낮추고 겸허해 질 수 있다면, 조금만 더 진지해 질 수 있다면, 조금만 더 배려하고 나눌 수 있다면 좀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입추도 벌써 지났고 후덥지근한 더위도 물러갔다. 하늘은 한층 높아졌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다. 지상은 풍요롭고 하늘이 청량하다. 이처럼 나의 존재 역시 우주를 운행하고 있는 자연의 이치와 하나 다를 게 없다. 결국 사람의 존재 역시, 천체의 수많은 행성들과 같은 원소로 이루어진 별이다. 주위가 사위어진 다음, 산에 올라가 보면 하늘의 별빛만 아름다운 게 아니다. 별빛 못지않은 지상의 수많은 불빛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불교신문3522호/2019년10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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