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열반 10주기 특별기획] ⑥ ‘청년 박재철’ 출가를 꿈꾸다
[법정스님 열반 10주기 특별기획] ⑥ ‘청년 박재철’ 출가를 꿈꾸다
  • 여태동 기자
  • 승인 2019.10.02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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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암자 스님 염불소리에 감화한 청년 박재철

학창시절 명산대찰 즐겨 찾아
해남 대흥사서 수행하며 감화
전남대 상대 3년 휴학 후
정광정혜원서 불교에 심취
여러 스님들과 인연 맺으며
출가수행자의 삶 동경하다
법정스님은 정광정혜원에서의 생활이 출가를 꿈꾸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정광정혜원에 세워져 있는 법정스님 관련 동상.
법정스님은 정광정혜원에서의 생활이 출가를 꿈꾸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정광정혜원에 세워져 있는 법정스님 관련 동상.

법정스님은 언제 불교를 접하고 불교에 심취하고 출가를 결심했을까? 우선 불교를 접한 시기는 불교 종립학교인 정광중학교로 추측된다. 일부 소설에서는 유년시절에 할머니 손을 잡고 혹은 아버지를 따라 사찰을 다닌 이야기가 나오지만 실제는 좀 다른 듯하다. 법정스님의 사촌동생 박성직 거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스님이 살았던 선두리 마을에는 사찰이 없었고 인근에도 사찰이 존재하지 않았다. 

“특별히 사찰에는 다니지 않았어요. 그저 할머니가 장독대나 부엌에서 정안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수준의 정성을 드리는 정도였어요.”

유년시절 불교를 접하지 않고 여느 농어촌에서 신앙하던 토속신인 조왕신 정도를 눈으로 보고 자란 정도였을 것이라는 게 박성직 거사의 생각이다. 실제 찾아가본 해남 선두리 마을에는 현재도 가까운 곳에 사찰은 눈에 띄지 않았다. 

법정스님이 목포로 유학해 정광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불교를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광중학교가 불교종립학교였다. 1947년 학교설립 주소도 목포역 인근인 ‘목포시 무안동 3번지 정광사’였다고 정광학원 연혁에 기록돼 있다. 설립당시 정광중학교 주소와 현재 ‘정광정혜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거리가 1Km정도도 안된다.

법정스님의 친구인 박광순 교수는 자신의 회고글에서 “만암스님은 1947년 동본원사 목포분원인 자리에 정광중학교를 세워 육성사업을 했고 동시에 지척거리에 있는 정혜원(정광정혜원)을 정광중학교의 법인사무소로 삼게 되었고, 그 연고로 귀속재산 문제가 법적으로 처리 될 무렵 ’백양사 목포포교원‘으로 삼게 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고 추측했다. 결국 ’정광사‘와 ’동본원사 목포분원’은 동일한 지역으로 보아도 무방해 보인다. 이듬해 정광중학교 광주로 이전하며 스님은 목포상업학교(현 목상고등학교)로 전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목포상업학교 시절 스님은 주말이나 방학이면 많은 사찰을 찾았다. 주로 동기들과 주변사찰 축성암을 비롯해 진도 쌍계사, 월출산 도갑사, 두륜산 대흥사 등 명산대찰을 주유했다. 스님이 출가 후에도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여러 곳을 만행한 행적도 학창시절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박광순 교수도 자신이 회고한 글에서 “법정은 바다보다 산, 그리고 산사를 특히 좋아하였는데, 그런 인연이 마침내는 출가로 이어지게 된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고 적고 있다. 

법정스님은 박광순 교수와 1953년 7월 하순 해남 대흥사로 만행을 떠난다. 당시의 교통상황은 매우 열악해 목포에서 해남까지는 배를 타야 했다. 목포부두에서 해남 상공리행 객선(동력선, 약 20톤)을 탄다. 거기에서 해남읍까지는 운이 좋으면 트럭을 얻어 탈 수 있고 그렇지 못할 때는 걸어가야 한다. 해남읍에서 대흥사까지는 걸어가야 한다. 
 

법정스님이 친구인 박광순 교수와 함께 학창시절 방문했던 해남 대흥사 부도밭.
법정스님이 친구인 박광순 교수와 함께 학창시절 방문했던 해남 대흥사 부도밭.

법정스님과 박광순 교수는 대흥사 경내로 들어가는 큰 계곡에 이르러서는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전신에 흐르던 땀을 식히기도 했다.

“신발을 챙겨 신고 절을 향해 발길을 옮기니 싱싱한 수목들이 하늘을 덮고 있어, 우리는 문자 그대로 수해(樹海)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만큼 감동과 산사에의 호기심은 커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나무 뿐이랴? 매미들의 심포니는 문자 그대로 교향곡처럼 다양한 울음소리가 조화를 이루어 우리의 즐거움과 호기심을 부채질해 주었다. ‘아! 잘왔다’는 게 우리의 마지막 말. 그로부터는 입을 다물고 그저 걷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 말기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보고 느낀 산은 발가벗은, 문자 그대로 민둥산뿐이었으니, 울창한 나무바다에 들어선 우리의 감동과 희열이 큰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박광순 교수 회고)

대흥사 암자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수행하던 법정스님은 비구니 스님의 “월광보살! 월광보살!”하는 염불소리에 큰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스님은 출가 후에도 이때의 감회를 언급했다고 한다. 

정광정혜원은 법정스님이 불교와 인연을 맺은 중요한 사찰이다. 기록으로 볼 때 정광중학교 입학당시에 이미 스님은 정광정혜원의 존재는 알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곳에 드나들 정도로 인연이 있지는 않았을 듯하다. 그곳을 오갔던 만암스님을 친견할 수는 더욱 없었을 것이다. 그저 다니는 학교에 사찰이 있는 정도로 추측된다. 

정광정혜원은 1917년 일본인 도현스님이 흥선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광복 후 만암스님이 사찰명을 정광 정혜원으로 바꾸어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백양사에 등록되어 있다. 만암스님과 서옹스님이 주석했던 사찰로 지붕의 기와와 일부 창호만 새로 교체했을 뿐 전반적으로 건립당시 모습(일본식 목조사찰)을 유지하고 있다. 경내에는 조선후기 경주불석으로 조성한 관음보살좌상이 있고 1931년 조성된 보현보살상과 석탑이 남아 있다. 

이러한 정광정혜원은 법정스님이 대성동에 집을 마련해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자주 스쳐 지났던 곳이기도 하다. 목포상업학교가 6·25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자 교사를 대성동의 ‘구니다께농장(國武農場)’ 사무실(목조 2층집)으로 이전했고, 1952년에는 교사를 유달동의 일본 신사 자리에 목조건물을 지어 옮기자 스님은 대성동 - 양동 - 남교동 서점거리 - 측후동 언덕길(우측에 정광정혜원이 자리함) - 유달산 입구 - 서남쪽 시장관사 근방에 위치한 초급대학을 다녔다. 그해 스님은 심한 폐렴을 앓기도 했는데 아침 저녁으로 정광정혜원을 지나치며 그저 주인 잃은 일본식 사찰이 있는 것으로 여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법정스님이 다녔던 목포상업학교.
법정스님이 다녔던 목포상업학교.

정광정혜원과 깊은 인연을 맺은 시기는 스님이 대학교 3학년 휴학 중이던 시기(1955년)다. 당시 불교계는 대대적인 불교정화 운동이 전국을 강타하던 시기였다. 1954년 5월21일, 이승만 대통령이 ‘왜색승 추방을 요지로 하는 불교정화에 관한 담화문’을 발표한다. 이듬해인 1955년 8월에 ‘전국승려대회’가 개최되었고 불교정화의 바람은 목포에도 들이닥쳤다. 그 본거지가 측후동에 위치한 정광정혜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님은 우연한 기회에 정광정혜원에 기거하는 인연을 맺는다. 정찬주 작가는 정광정혜원 불교학생회 총무를 맡아 보았다고 하고 친구인 박광순 교수는 “목포지역 신도회 회장이 친구의 이모였는데 그 분의 권유로 법정은 정혜원으로 가서 잡무를 맡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전쟁이후 어렵던 시절에 학업에 매진했던 법정스님의 생활은 곤궁하기 그지없었다. 작은 아버지가 학비를 지원해 준다고 해도 넉넉할 수 없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어 쓰기도 했다. 스님이 유발제자인 정찬주 작가에게 들려준 바에 따르면 인쇄소에서 일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스님은 “내가 그런 인연이 이어져 책을 출판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법정스님은 정광정혜원에서의 생활이 출가를 꿈꾸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문학에 심취해 젊은시절을 보내던 ‘청년 박재철’은 정광정혜원에서 불교의 진정한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 결정적인 사건 중의 하나가 고은 시인과의 만남이다. 당시 고은 시인은 ‘일초스님’이라는 출가사문이었으며 정광정혜원에서 법문을 하게 되었다. 일초스님은 ‘실존주의와 불교’라는 주제로 법문을 했고, 불교에 심취했던 ‘청년 박재철’은 그곳에서 개별면담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곤궁한 삶 속에서도 불교가 전해주는 심오한 진리의 가르침이 ‘대자유인의 삶’으로 안내했을 것으로 본다.

목포·해남=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불교신문3522호/2019년10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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