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 대마도는 놈들의 발목인 셈이야”

417년 이른 봄, 서라벌

실성은 단정한 자세로 앉아있는 눌지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올해 스물여덟이 된 눌지는 어깨가 넓고 키가 큰 건장한 청년이었다. 실성 앞에서는 애써 감추려고 노력했으나 가만히 있어도 기품과 위엄이 우러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지켜온 ‘태자’라는 자리의 책임과 무게가 그의 성품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눌지의 아버지이자 숙부인 내물 마립간이 자신의 세 아들을 지키기 위해 그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을 때, 실성은 복수를 다짐했다. 고구려 병영에서 10년을 보내는 동안에도 복수의 마음을 잊은 적이 없었다. 신라에 돌아온 후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마립간의 자리에 오른 지, 올해로 15년이었다. 미해와 복호를 왜국과 고구려에 보내 질자로 지낸 10년 세월을 복수하고 눌지의 양팔을 잘랐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통쾌하기는커녕 찜찜하기만 했다. 

그동안 실성은 여전히 태자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조카 눌지가 성년이 되기 전에 아들을 낳고자 부단한 노력을 했다. 하지만 하늘은 그에게 자식을 주지 않았다. 실성의 유일한 핏줄은 눌지의 아내이자 태자비인 아로 뿐이었다. 게다가 실성이 아들에 집착할수록 왕비 아류 부인과의 관계는 싸늘해지기만 했다. 태어나지도 않은 친아들에게 마립간의 자리를 물려주고 싶은 실성과 달리 아류 부인은 사위 눌지가 마립간의 자리를 잇기를 바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부부가 된 지 20년이 넘은 눌지와 태자비 아로와의 사이에서도 자식이 없는 것이었다. 하늘은 공평했다. 아니, 아직 실성의 편일 수도 있었다. 내물 마립간은 늦은 나이에 젊은 보반 부인을 왕비로 맞아 연달아 아들을 셋이나 낳지 않았던가. 실성은 이제 마흔을 넘겼으니 아직 창창했다. 문제는 아류 부인이 있는 한 다른 부인을 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신국에서는 딸과 아들의 차별이 없었다. 신국이 세워진 이래 아들이 아니면 사위가 마립간의 자리를 계승해왔다. 비록 마립간이 남자일 뿐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부인의 혈통이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파사이사금은 유리이사금의 서자였다. 하지만 그는 탈해이사금의 양자 김알지의 손녀를 부인으로 맞았고, 처가 덕분에 이사금이 될 수 있었다. 

‘힘 있는 귀족 중에서 권력을 탐하지 않는 이가 없다. 이들의 여식을 부인으로 삼아 아들을 낳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마음이 불안할꼬.’ 

감추려 할수록 총명함이 드러나는 눌지의 눈빛을 떠올리며 실성은 초조하게 되뇌었다. 

‘그래,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미해는 생사조차 알 수 없고 복호는 멀리 고구려로 보냈으니 이제 눌지만 남았구나. 먼저 눌지를 제거한 후에 부인을 더 들여야겠다. 눌지가 사라지면 이 불안한 마음도 자연히 사라질 것이야.’
 

“오늘밤 
고구려 군영으로 가시게
사람들의 눈도 있고 
고구려 군사가 머무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백성들도 많다 하니 
반드시 혼자서 
은밀하게 찾아가시게 

고구려 장군에게는 
미리 말을 해 두었네 
우리 태자에게도 
좋은 가르침 달라고 말일세 
그에게 배울 것이 
정말 많을 것이야…”

 

실성의 속마음

며칠 후 실성은 눌지를 불렀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둘만의 오붓한 자리였다. 실성은 눌지의 마음을 떠보듯 슬쩍 먼저 입을 열었다.

“태자는 무슨 생각을 하길래 입을 다물고 아무 말이 없는가?”

“마립간께서 하문하시길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흐음, 태자는 혹 두 동생을 질자로 보낸 나를 원망하는가?”

“신국을 위한 큰 뜻으로 하신 일에 어찌 원망이 있겠나이까.”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대답이었다.

“지난번, 대마도를 정벌하고자 했던 것을 태자는 기억하는가?”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그때는 아직 때가 아니었고 또 서불한 미사품의 결기가 단호하여 뜻을 접었었지. 허나 저 지긋지긋한 왜적들이 다시는 신국의 영토를 함부로 넘보지 않게 하려면 언젠가는 대마도를 정벌해야 할 것이야. 그래야 그대의 동생이자 나의 사랑하는 조카 미해가 무사히 신국으로 돌아올 수 있지 않겠는가.”

실성의 입에서 미해의 이름이 나오자 눌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예리한 눈으로 눌지를 주시하던 실성이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눌지를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마립간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눌지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흐음”

실성은 짐짓 실망한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고구려에 질자로 있을 때, 대왕께서는 나를 병영에 머물게 하셨지. 처음에는 우리 신국이 약소국이라 나를 무시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일국의 왕족인 나를 그렇게 험한 곳으로 보냈으니까. 고구려는 신국과 달리 겨울이 혹독하게 추웠지. 단풍이 드는가 싶으면 어느새 서리가 내리고 사방에 눈과 얼음으로 뒤덮였어. 소변을 보면 그 자리에서 얼어붙을 정도였다네.”

평소와 달리 과거를 회상하는 실성의 얼굴과 목소리는 차분하고 진지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시간이 흘러 흘러 고구려의 봄, 여름, 가을, 겨울에 익숙해졌을 때 추위에 약해빠지고 활을 쏘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나약한 나의 몸이 어느새 강건해졌음을 느꼈지. 신국의 원군으로 내려온 고구려 대군이 왜군과 백제군, 가야군을 박살낸 후 고구려 장군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네. 우리 신국은 늘 왜국과 백제, 가야 사이에서 시달려왔으나 이토록 커다란 승리를 거두어 본 적이 없다고. 저들은 늘 화친과 동맹을 말하면서도 신국을 공격하고 신국의 백성을 약탈하는데 어찌해야 이길 수 있느냐고 말이야.” 

속내를 터놓는 실성의 낯선 모습에 눌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장군이 말하더군. 동맹은 국력이 비슷한 나라에서 하는 것이고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나라가 힘 있는 나라와 화친을 맺는다는 것은 맘껏 약탈당하겠다는 말과 같다고. 고구려에 있을 때는 왜 저토록 군사훈련을 하고 또 할까, 저 많은 군대를 유지하려면 백성들이 얼마나 힘들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 전쟁이 일어나면 알아서 준비와 대비를 척척 하는 고구려의 백성들을 보면서 저들은 하도 싸워대니까 전쟁에 이골이 났다고만 여겼어. 신국으로 돌아와서, 마립간의 자리에 앉아서, 왜군와 직접 싸우고 나서야 알았어. 모든 귀족과 백성이 마음을 모아야만 나라가 지켜지는 것이지, 전쟁은 왕 혼자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야.”

실성은 눌지를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대마도를 정벌하려 한 것은 신국을 지키기 위해서였어. 저들에게 대마도는 신국을 공략하기 위한 기지니까. 대마도에서는 쌀 한 톨 나지 않아. 고기를 잡아서 살아가는 몇몇 백성이 있을 뿐이지. 저들은 대마도에서 전열을 정비한 후, 신국을 약탈하러 와서는 우리 백성들을 잡아가고 우리 백성들이 키우고 거둔 쌀과 보리와 수수를 모두 가져가지. 왜군과 몇 차례 전쟁하면서 지금 당장 저 저열한 놈들의 머리를 자르지 못한다면 발목이라도 끊어놓아야겠다고 생각했지. 대마도는 놈들의 발목인 셈이야.”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어디까지가 가식인 걸까. 다시는 실성에게 속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오늘 이런 모습을 보니 눌지는 혼란스러웠고 마음에는 물결이 일어났다. 그런 눌지를 보며 실성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런, 놀랐는가. 사실 전부터 태자와 함께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네. 그대가 날 믿지 않는 것 같아 기다렸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에게 전쟁에 대한 시야를 넓혀주고 동맹국에 대한 생각을 바꿔준 이가 누구인지 아는가? 바로 지금 서라벌에서 머무는 고구려군의 장군이라네. 상황도 그렇고 신분도 신분인지라 그와 진심을 주고받기까지는 한참이 걸렸지. 지금도 나에 대한 경계를 놓지 않는 그대처럼 말이야.”

“당치 않는 말씀이십니다.”

“하하하, 농일세.”

실성은 황급히 고개를 젓는 눌지를 보며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태자는 장차 나의 뒤를 이어 마립간의 자리에 오를 사람이 아닌가. 나의 조카이자 사위이니 나의 아들이나 다름없지.”

실성은 입술 끝을 둥글게 말아 올리며 눌지에게 속삭였다.

“오늘 밤 고구려 군영으로 가시게나. 사람들의 눈도 있고, 고구려 군사가 머무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백성들도 많다 하니 반드시 혼자서, 은밀하게 찾아가시게. 고구려 장군에게는 미리 말을 해 두었네. 우리 태자에게도 좋은 가르침을 달라고 말일세. 그에게 배울 것이 정말 많을 것이야. 내 말 알겠는가?”

부드러운 표정과 달리 실성의 목소리는 엄격했고 눈빛은 매서웠다.

“그리 하겠습니다.”

눌지의 대답을 들은 실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불교신문3522호/2019년10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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