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아! 모든 것이 다 바람 속 등불일세”

수덕사 조실 혜암스님.

한국불교계에 있어 최고령이자 대선지식이며 선학계(禪學界)의 독보적 거봉이신 최혜암(崔惠菴)스님. 1885년 음력 12월생이면 금년 갑자년이 100세가 되는 ‘덕숭산의 살아있는 산신령 스님’. 요즘은 수덕사가 아닌 마곡사의 새로 지은 매월당 선원에서 낙일(落日)에 적조 빛을 길들이시며 ‘날마다 좋은 날(日日好時節)’을 맞이하고 계신 스님. 큰스님의 세납이 100세인데도 음성이 카랑 카랑하며 곱게 늙으신 동안(童顔)이시다. 

에누리 없는 1세기를 엮어 오시며 기쁜 일, 가슴 저미는 슬픈 일도 몇 점 간직하고 있으시련만 검은 버섯이 군데군데 그 둘레를 넓혀가고 있는 스님의 얼굴에서는 일체를 초탈하신 해탈자로서의 넉넉함이 잔잔한 아픔으로 심방객의 가슴에 안겨온다. 

가을하늘이 저토록 푸르고 산이 쩡쩡 머루며 다래며 도토리 타작을 마무리하며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100세 되신 노스님은 매월당 선원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 흘러가게 하고 불어오는 바람 머무름 없이 보내고 계시니 기동(起動) 어려운 고충이 얼마만 하랴! 그런데도 스님께서는 앉고 누우심에 시자 스님의 도움을 받고 계시지만 여유와 넉넉함을 항시 지니고 계시니 가을 하늘이 층층이 높고 코스모스와 들국화가 피고 지는 넓은 산야를 바람 되어 구름 되어 누비고 계심이 분명하다. 큰스님의 곁에 가까이 가면 두고 온 고향집에서나 느낄 수 있는 아버지 어머니의 그 진한 감미로운 슬픔이 콧등을 찡하게 울리며 눈시울을 촉촉이 젖게 하는 포근한 신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100년의 세월을 잠재운 노안의 눈 밑 가장자리에 관세음의 미소처럼 실안개가 고여 흐르는 친할아버지 같으신 도인 스님! 해탈정신으로 내생(來生)을 살고 계신 혜암대선사! 

혜암 노스님은 근대 한국불교계의 끊긴 선맥을 중흥시킨 활안종사인 경허 대선사와 그 맥을 지계로 이어온 만공 큰스님의 법을 전수한 전통적인 선학계의 거봉이시다. 이제 큰스님께서 덕숭산 수덕사 도량에서 떠나와 잠시 마곡사 매월당에서 생명의 발자취를 남기며 머물고 계시지만 어느 날 어느 세월에 커다란 획을 긋고 한 점 바람으로 떠나실지 모를 일이다. 

큰스님이 계신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혜암 큰스님은 의자에 기대앉으신 채로 정좌하여 정진하고 계셨다. 큰스님을 모시고 있는 묘봉스님(전 동국대학 철학과 교수)이 작은 목소리로 설명하길 큰스님께서는 지금 서산에 있는 어느 비구니 절의 부처님 점안을 기동이 어려워 가시지 못하고 선방에 앉아 점두하고 계신 중이란다. 돋보기를 끼고 계신 큰스님 가까이 다가가 조금 큰 귓속말로 큰스님의 연세를 빤히 알면서 여쭤본다. 

“9×9=82야.” 9×9=81인데 9×9=82라는 대답이시다. 

- 생명의 실타래를 풀어나가시며 기쁜 인연도 슬픈 인연도 많으셨을 텐데 어떤 인연의 실오라기가 가장 무겁다고 느끼셨는지요? 

“슬플 것도 슬프지 않을 것도 없어. 일체를 여윈 자리엔 그 여윈 생각마저도 없는 법이거든.”

- 어떤 것이 조사선의 제1활구 입니까? 

“문전일로(門前一路) 투장안(透長安)이야.” 

- 어떤 것이 조사선이며 어떤 것이 여래선입니까?

“말이 없는데서 말이 없는 곳에 이르는 것이 조사선이요, 말이 있는 곳에서 말이 없는 곳에 이르는 것이 여래선일세.”

큰스님께서는 어떤 질문을 드려도 조금치의 막힘과 망설임 없이 시원시원하게 우문에도 현답으로 선구(禪句)를 일깨워 주시는 제방에 널리 소문난 선지식이다. 

- 지금 큰스님의 마음이 머물고 있는 낙처가 있다면 그 머물고 있는 마음의 실체를 저에게 보여주실 수 있으신지요?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 판치(앞 이빨)에 털이 난 말씀은 전강(田岡)스님께서 즐겨 쓰시는 문구인데 그 밖에 말씀을 들려 주십시오.

“귀신방귀에 털 난 곳이니라.” 

귀신방귀에 털 난 곳이라면 부질없는 질문에 대한 구름 잡는 답변이겠거니 생각하며(또 여쭸다)…. 

- 큰스님께서 머물고 계신 집이 매화당인데 매화는 봄에 피거니와 겨울엔 매화가 없는 곳에서 무엇을 매화삼아 지내시렵니까?

“강성오월(江城五月)에 낙매화(落梅花)니라.” 

강성 땅에는 오월에 매화가 진다는 지극히 평범한 말씀이시다. 평상심에 도가 깃들 듯 평범 가운데 비범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 큰스님께서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고된 그림자를 거두어들이시며 남기실 말씀이 있을 법 한데요. 미리 앞당겨 임종게라도 저에게 귀띔해 주시지요. 

“화탕(火蕩) 노탕(爐蕩)지옥이 나의 임종게일세.”

- 안수정등(岸樹井藤)에서 헤어 나오는 법을 일깨워 주십시오. 

“입과 혀로는 꿀을 빨면서 손가락으로는 독룡(毒龍)의 아가리를 가리켜야지.”

- 다른 방법(智慧)이 있으시면 더 말씀해 주십시오.

“문자상신실명(問者喪身失命)이야.” 

질문한 자가 그 몸을 상하고 목숨마저 잃는다는 말씀이시다. 

- 큰스님은 크신 주장자를 어느 곳에 꽂고 다니시렵니까?

“어느 곳에서 그대는 주장자를 보았느냐?” 

큰스님이 도리어 묻는 말씀에 ‘큰스님의 법신 전체가 우주법계를 울리는 큰 지팡이’라고 대답하자 “악!”하며 큰소리로 할(喝) 하신다. 

100세 되신 노스님의 목소리가 어쩌면 저리도 우렁차실까? 시원하고 통쾌한 고함(高喊, 法音)에 진세에서 찌든 묵은 업장이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 큰스님께서는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20년을 더 세상을 보셨는데 무얼 더 보셨는지 넉넉한 일구(一句)로 저의 목마름을 가시게 해주십시오. 

“이 사람아! 모든 게 다 바람속의 등불일세.” 

- 아까 저희가 큰스님 계신 방으로 들어서자 큰스님께서는 좌정하시여 서산에 있는 비구니 절의 부처님 점안을 하고 계셨는데 과거, 현재, 미래불 중에 어느 부처님의 점안을 하셨는지요? 

“팔부금강 호도량….” 

심방객의 어쭙잖은 우문에 큰스님께서는 목청을 높여 염불을 금세 시작하신다. 점안식 때 하는 저 염불소리. 덩실 덩실 염불소리에 맞춰 춤이라도 추고 싶을 만큼 잔잔한 기쁨이 온 뼈마디마다 스물 스물 기어가는 환희이다. ‘큰스님은 참으로 거룩하신 부처님입니다’를 거듭 되뇌며 거듭 충전하고 싶어 다른 말씀을 여쭈어 본다. 

- 호랑나비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호랑나비가 번데기가 되어 있을 때에는 그 아름다운 색깔의 흔적마저 볼 수 없습니다. 번데기가 되어 있을 때 그 아름답던 호랑나비의 색깔은 어느 곳에 머물고 있겠습니까?

“개살구!”

돌아가신 춘성스님 같으면 아마도 ‘개OOO 새O!’하셨을 거다. ‘개살구’도 그런 뜻이리라. 

다음은 혜암 큰스님께서 들려주신 만공스님과의 선법문 이야기. 

만공스님이 하루는 법상에 올라 “나에게 큰 그물이 한 개 있는데 그 그물 안에 고기 한 마리가 걸려 있노라. 대중은 답하라. 그물에 걸린 고기를 살릴 수 있는 자는…”하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때 대중 스님 중에 한 사람이 일어나 답을 하면 답을 할 때마다 “옳지 고기 하나 또 걸려들었군!” “옳지! 또 한 마리!” 하시며 손뼉 치며 박장대소하시더란다. 하여 혜암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만공대선사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큰스님! 어서 그물에서 나오십시오” 했더란다. 이 얼마나 시원하고 통쾌하며 가슴 든든한 활구(活口)이랴! 

- 큰 사찰에는 돌아가신 스님들의 영정을 모신 영각이 있습니다. 영각에는 영정은 있으나 큰스님들의 살아 숨 쉬는 진면목은 볼 수 없습니다. 영정의 그림으로나 남아 있는 큰스님들의 참모습은 어느 곳에 머물고 있겠습니까? 

“운변탈토(雲辺脫兎) 향하지(向何知)?” 

구름 밖으로 벗어난 토끼의 향방을 알겠느냐고 물으신다. 그래서 얼른 “큰스님께서 그 도망간 토끼를 잡아 저에게 보여주십시오” 했다. 

큰스님은 역시 미소로 답해주시며 “낙일기응(落日飢鷹) 공자명(空自鳴)”하신다. 

저문 날에 주린 매는 공연히 울기만 한다니 그 뜻을 독자가 알까? 이 글을 쓰고 있는 향봉이가 알까? 알아도 30봉(棒)이요, 몰라도 그 허물이 30봉일게 분명하다. 혜암 큰스님의 건강을 빌고 또 빈다. 그 크신 법력은 누리에 가득하소서! 
 

불교신문 1984년 10월10일자 4면에 실린 ‘인간백세…수덕사 조실 혜암스님을 찾아서’ 인터뷰.
불교신문 1984년 10월10일자 4면에 실린 ‘인간백세…수덕사 조실 혜암스님을 찾아서’ 인터뷰.

 

혜암스님은…
1886년 1월5일(음력 1885년 12월21일) 황해도 백천(白川)에서 부친 최사홍(崔四弘) 선생과 모친 전주 이 씨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나 12세에 출가, 23세의 나이에 양산 통도사 내원선원에서 처음 안거를 한 이후 참선수행에 전념했다. 27세에 해담(海曇)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은 후 만공(滿空)·혜월(慧月)·용성(龍城)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공부에 몰두했다. 이후 45세 때 수덕사 조실 만공스님에게 전법을 받고 만공스님의 법맥을 이은 법제자가 되어 ‘경허·만공의 선풍’을 세상에 보였다. 스님은 1985년 5월19일(음력 3월30일) 수덕사 염화실에서  세수 101세, 법납 89세에 열반에 들었다. 

정리=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3519호/2019년9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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