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연구는 문화운동이며 독립투쟁”

요즘 우리말과 글의 혼란이 정도 이상이다. “우리말이 바로 서야 우리 심성이 곧고 바르게 선다”는 것은 일제 치하에서 옥고를 치르며 우리말을 갈고 닦아온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 선생의 말이다. 평생을 우리말 연구와 교육에 바쳐온 학자이자 수필을 통해 선비의 지조 높은 향기를 일깨워 온 일석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살피기 위해 지성의 광장 집필팀은 선생의 뜻을 계승하여 국어 연구에 매진해온 전광현 교수를 지난 4일 만나 얘기를 들었다. 우리가 우리말을 제대로 쓰기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무엇보다도 우리말을 제대로 갈고 닦는 일이 급선무였다. 93년간의 긴 일생을 살아오면서 한시도 쉬지 않고 국어학 연구와 교육에 힘쓴 일석 이희승 선생은 그런 길을 걸었던 사람이다.

“일석 선생이 국어에 뜻을 둔 것은 당대의 시대적 환경과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고 선생의 제자 전광현 교수는 말문을 열었다. “일석 선생이 평생 마음에 새긴 것이 민족과 국가와 통일인데 그 매개체가 국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후년에 이를수록 강화되었다고 한다.

그런 평생의 과제는 그러나 우연찮은 계기로 시작되었다. 자신이 술회한 책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에서 이때를 회고한 대목은 이렇다. “한성외국어학교에 다니다 경술국치를 만나 학교가 폐교되어 조기졸업하였다. 혼란기의 제도 변화 속에서 경성고보와 양정을 조금씩 다니다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있던 18세 때의 어느날 친척으로부터 주시경의 〈국어문법〉을 빌려보게 되었다. ‘이런 학문도 있었구나’하는 경이(驚異)를 맛보고 재독, 삼독을 하고 5~6회를 거듭 읽는 동안, ‘나도 국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공부도 하고 직장도 다니다가 경성제대가 생긴 것을 보고 조선어학과에 들어가 본격적인 공부를 하게 된다. 여기를 졸업하던 1930년부터 조선어학회에 가입하여 활발한 활동을 했다.

일석 선생은 “한말의 국어연구는 민족 고유의 어문을 정리하고 통일하며 보급하려는 문화운동인 동시에 민족운동이었다”고 회고한다. 국어운동을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생각하고 국어연구를 해 오던 주시경 선생이 요절하고 일제의 무단통치로 침체에 빠졌던 국어연구가 1931년 조선어학회가 창립되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일석의 실천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국어관은 조선어학회의 활동과 관련이 깊다. 조선어학회는 순수한 학문보다 국어 강습에 주력하고 맞춤법통일안과 표준어 및 외래어 표기법 등을 연구 검토하여 사전 편찬에 주력했다. 바로 그 사전 편찬 과정에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나 사전 편찬의 주역이었던 일석은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된다.

사진설명: 1959년 7월 19일 한글학회 회원들과 새절을 찾았다. 새절은 지금의 신촌 봉원사이며, 두번째 줄 가운데가 이희승 선생이다.
일석 선생에게서 조선의 선비정신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일석이 본 선비정신은 철저성과 민족과 검약 등이었다고 전광현교수(전 단국대 국문과)는 회고한다. 지조란 이념을 바탕으로 입지를 세워 실천해야만 의미를 갖게 된다. 일석을 가까이서 보아 왔던 전교수가 느낀 일석 선생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실천하지 않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공과 사를 분명히 하고 부정불의와 명리에 탐착하는 것을 싫어했다. 선생 스스로 이런 정신을 그대로 실천하였다고 한다. “제자로서 스승을 모시고 편안함을 기대했다가 깨달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라는 전교수의 얘기다. 이런 지조가 조선어학회 사건이나 교수선언 시국선언 등에서 꼿꼿한 처신을 일관되게 드러내도록 하였다.

딸각발이나 남산골 샌님에서 일석 선생을 기억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역시 선생의 본면목은 국어 연구와 국어교육에 있다. 선생이 시집과 수필집을 여러권 발간할 만큼 문학에도 재능을 드러냈지만 이는 국어교육과 문학의 접목 내지는 실천이라고 보는 편이 낫다. 모진 시련도 겪으며 일석 선생이 이루어낸 성과를 전교수는 맞춤법강의와 〈국어학개설〉 그리고 〈국어대사전〉 편찬을 꼽았다.

선생의 순수 국어학 논문은 그리 많지 않다. 선생은 연구 경향은 실증적 연구를 강조한 것이다. 선생은 외국 이론의 수용에 긍정적이었다. 물론 이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는데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선생의 목표는 국어의 과학화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연구는 현실적인 면에 중점을 두어 논문 중에도 많은 구체적인 실례를 드는 것이 특징이다. 자연히 문장은 건조체이고 실증성과 논리성을 생명으로 한다. 선생이 보인 엄정한 학문의 자세는 후학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다.

선생이 국어교육에 보다 열중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선생은 “국어교육이 피교육자의 생활능력을 배양해주고 민족정신과 인격을 함양해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국어교육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오늘날 우리의 최대 과제인 통일도 남북이 같은 말을 쓰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경우보다도 통일에 대한 희망이 크다”는 것이 선생의 생각이었다.

사진설명: 정병삼 교수(왼쪽)와 전광현 교수가 가산불교문화연구원 마당에서 이희승 선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큰 문제 중의 하나가 언어가 바로 서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일석 선생의 가르침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선생은 언어를 단순한 의미 전달의 수단 이상의 것으로 보았다. 사고를 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석은 맞춤법보다 중요한 것이 표준어임을 강조하였다. “표준어를 사용하는 국민이 되어야 심성이 곧고 순수해 진다”는 것이다. 일석은 이런 견지에서 표준어가 흐려지는 사태를 염려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막대한 전파력을 가진 매스컴이 그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서는 학교교육에서 말과 표기 특히 작문교육을 바르게 실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의 지속적 추진을 위해서는 정책적으로 국어연구원을 설립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그래야 현대 국어의 바른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일석 선생의 바람대로 국어연구원은 현재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다.

일석 선생은 돌아가면서 몇 가지 유언을 남겼다. 번거롭게 사회장 같은것을 한다고 하지 말 것, 국립묘지에 안장한다고 법석대지 말 것, 부의를 일체 받지 말 것 등이었다. 유언은 그대로 지켜져 간소한 장례를 마치고 선산에 편안하게 모셔졌다. 역시 선생의 뜻을 받들어 일석학술재단을 설립한 유족과 제자들은 후배들의 연구를 돕는 일로 선생의 유지를 계승하고 있다. 오척 단신의 꼿꼿한 선비 일석 선생은 이 세상에 한없이 큰 자취를 남기고 갔다.

* 이희승 선생과 한자혼용

이희승(李熙昇 1896~1989)선생은 1930년 경성대 조선어문학과 졸업하고 1940년 일본 동경대 언어학대학원 수료했다. 일석은 1932년 이화여전 교수와 조선어학회 간사를 지내며 국어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고난도 많았다. 1942년부터 45년까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루었다. 해방후 서울대 교수와 1949~59년 한글학회 감사를 지냈다. 동아일보 사장과 대구대 대학원장, 성균관대 대학원장,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조선문학연구초〉 〈한글맞춤법통일안강의〉 〈한글맞춤법 강의〉 〈국어학개설〉 〈중등문법〉 〈고등문법〉 〈중학작문 1·2·3〉 등이 있다. 시집으로 〈박꽃〉 〈심장의 파편〉을 냈고, 〈벙어리냉가슴〉 〈소경의 잠꼬대〉라는 수필집도 선보였다. 자서전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와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도 선생의 생애를 자세히 들여다볼수 있는 저서이다.

일석 선생은 한글전용 문제와 관련하여 한자혼용을 주장했다. “한글이냐 한자냐 보다는 어느 편이 의미 전달에 효과적이냐 하는 것”이 일석의 생각이었다. 한글 어휘가 동음이의어가 많아 의미가 중첩되고 모호성이 문제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한자문화권에서 우리 문화를 가꾸어왔고 그래서 우리 어휘의 3분의 2가 한자어인 점을 고려했다. 한문을 배우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초등학교에서 800자 정도의 제한된 한자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글로 써서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시대가 오면 좋겠다”는 것이 일석의 참 뜻이었다.



정 병 삼 / 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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