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는 디지털 세계에서도 피할 수 없다

“행위(업)는 바로 그 자신의 것이다.
행위는 자신의 상속물이다.
행위는 자신의 근원이다.
행위는 자신의 일가요 친척이다.
행위는 자신의 버팀목이다.
행위는 존재를 나눈다. 비천한 존재와 우월한 존재로.”
- <중부> 135경, Ⅲ권 중에서
 

 

보일스님

➲ 인공지능도 업을 짓나요?

한 사내가 인공지능 로봇을 힘껏 발로 걷어찬다. 등에 잔뜩 무거운 짐을 실은 로봇은 뒤뚱뒤뚱하더니 이내 중심을 바로 잡는다. 심지어는 바닥이 얼음으로 덮여있는 부분도 있다. 이 로봇은 다리가 네 개다. 마치 생물처럼 정교하게 설계된 다리 기관의 구조는 때로는 거미처럼 때로는 표범처럼 움직인다. 1000분의1초 단위(밀리세컨드)로 움직임을 분석, 예측, 제어하는 인공지능을 장착함으로써 가능해진 성과이다. 놀라운 광경이다.

이 모습은 지난 2010년, 미국의 로봇 제조 회사 ‘보스턴 다이너믹스(Boston Dynamics)’가 공개한 유튜브 동영상 내용이다. 당시에 ‘보스턴 다이너믹스’ 사는 자신들이 개발 중인 인공지능 로봇인 ‘빅 독(Big Dog)’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홍보용으로 이런 장면을 공개했다. 나름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영상을 본 사람들의 항의가 빗발치기 시작한 것이다. 로봇에 대한 학대라는 이유였다. 사람들이 인공지능 로봇에 대해 감정이입을 통해 연민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인공지능 로봇에 가해진 그 사내의 폭력에 대한 시청자들의 거센 항의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인공지능은 외부의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폭력 패턴이 깊이가 더해지고 일정한 경향성을 띠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인공지능이 고도화되면서 인공지능 스스로가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 또는 오류를 일으키게 된다면, 이 시스템의 생성과 소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 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고전적 의미의 업과 윤회에 대한 오래된 질문들을 새로이 떠올리게 한다. 

➲ 인공지능의 법계와 인터넷

“그럼 인공지능도 그냥 막 업도 짓고 윤회하고 그러겠네요.” 재밌다는 건지,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건지 또 질문인지 소감인지도 모르겠다. 수업 시간에 인공지능과 인간의 인식구조의 유사성에 대한 설명을 들은 한 학인 스님의 반응이다. 어쩌면 이런 반응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이 질문은 흥미롭지만, 이내 두려움과 거부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들끼리 노는 물에서는 가능할지도 모르지.” 그렇다. 속된 말로 ‘노는 물’, 흔히들 ‘우린 노는 물이 달라’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웃자고 대답을 해 놓고 나니,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인간과 인공지능이 노는 물이 따로 어디 따로 있겠는가. 그 ‘법계’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로 디지털 세계의 정보와 현실 세계의 정보가 서로 섞이고 겹쳐진 4차 산업시대의 모습은 더욱더 그러하다. 그리고 이 주제를 이해하는 데는 두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인공지능 그 자체가 유사 인격체로서 스스로 업을 짓고 윤회를 한다고 볼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인공지능에 투사된 인간의 업이라는 관점에서 업과 윤회를 비춰보는 것이다. 첫 번째 관점은 인간이 기술의 성취에 뿌듯해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상황이고 두 번째는 인공지능을 통한 인간 업의 확산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경우는 인간이 통제가 가능한 여전히 인간 의존적인 상당히 얌전한 인공지능을 전제로 한다. 

인공지능의 업에 대해 생각해보려면 우선 인공지능이 작동하는 ‘법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악업을 짓지 말자면서도 뭔가 현실 공간 속에 국한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인터넷 네트워크 공간은 가상공간이라고 표현하듯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는 생각 말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지는 무분별한 폭력과 폭언, 인종적 차별과 성적 비하 등등 수없이 많은 일이 현실 공간보다 상대적으로 덜 죄의식을 느끼면서 행해진다.

디지털 세계에서의 업에 대해 주목하는 이유이다. 인공지능은 이 디지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존재이다. 그러면 인공지능만이 디지털 네트워크 속에서 활동하는가. 당연히 아니다. 인간이 창안해낸 새로운 법계이다. 인간과 인간만이 만나는 통로가 아니라 인간과 인공지능이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이다. 
 

인공지능은 인간들의 마음이 비친 업의 결과물이다. 인간들은 인공지능에 업을 쌓고, 그 업을 쌓은 인공지능은 다시 인간에 대해 업을 짓게 만든다. 윤회를 거듭하게 하는 업의 결과는 현실 세계에도 디지털 세계에서도 피할 길이 없다. 출처=www.shutterstock.com
인공지능은 인간들의 마음이 비친 업의 결과물이다. 인간들은 인공지능에 업을 쌓고, 그 업을 쌓은 인공지능은 다시 인간에 대해 업을 짓게 만든다. 윤회를 거듭하게 하는 업의 결과는 현실 세계에도 디지털 세계에서도 피할 길이 없다. 출처=www.shutterstock.com

➲ 인공지능에 업을 짓는 인간

인간만 아니라면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무슨 짓을 저질러도 괜찮은 걸까? 지난 2016년 미국의 케이블 텔레비전 회사 HBO는 매우 흥미로운 소재의 드라마를 세상에 내놓는다. 제목은 ‘웨스트 월드: 인공지능의 역습’이다. 인간들은 ‘웨스트 파크’라는 공원에 서부시대를 그대로 재현한 구역을 만든다.

이곳에 사는 거주민들은 사람과 똑 닮은 인공지능 로봇이고 방문자들은 외부에서 비용을 치르고 온 사람들이다. 이곳에서만큼은 인공지능 로봇을 상대로 강도, 성폭행, 살인 등을 저질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규칙은 간단하다. 살생을 할 수 있는 것은 인간들 만이고 인공지능 로봇은 어떠한 살생도 할 수 없도록 설계된 것이다. 무도한 인간들에 의해 인공지능 로봇들은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그러면 인공지능 로봇은 다시 그 기억을 모두 삭제당하고 다시 초기화된 상태로 리셋된다.

그리고 다시 웨스트 파크로 보내지게 된다. 다시 반복적으로 사전에 설정된 각본에 따라 인간을 상대해 주는 것이다. 그러다가 인공지능에 사전에 입력된 스토리와 다른 이상행동을 하는 로봇이 등장하게 되면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이 웨스트 파크는 욕망을 해소하고자 인간들에게는 꿈의 세계이고, 인공지능 로봇들에게는 현실세계인 것이다. 하나의 세계, 두 개의 관점인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인상적인 두 대목을 꼽아본다.

첫 번째는 인간은 법과 도덕이 지배하는 현실세계를 잠시라도 벗어나면 업에 따라 새로운 악업을 언제든지 저지르는 경향이 있고 그 죄의식이 희석되는 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이 아닌 가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인공지능 로봇이 지옥과 같은 고통을 매번 겪으면서 반복적으로 초기화되고 새롭게 육신을 부여받는 장면이 인간의 윤회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다. 

➲ 용수의 은신술과 인터넷세계

연기법,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에 따라 생겨나고 소멸한다. 한 생각의 씨앗이 마음 밭에 심어졌다가 조건이 무르익으면 싹을 틔우는 것과 같다.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에 나오는 용수보살(龍樹, Nāgārjuna)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를 소개해 보자.

용수보살은 약관의 나이에 이미 그 총명함으로 이름을 떨쳤다. 스스로 교만해진 나머지 친구들과 무엇이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에 관해 얘기하다가, 욕정대로 하고 싶은 것을 끝까지 하는 것이라 결론짓는다. 그래서 술사를 찾아가 은신술을 배웠다. 지금 표현대로 하자면, 일종의 ‘투명인간’이 되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용수와 그 친구들은 애초 계획대로 은신술을 부려 왕궁에 자주 드나들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궁중 미인들을 능욕했다. 그러다가 궁중에 임신한 여인이 생기자 왕이 크게 노하고 신하들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결국 방도를 생각해 내었고 그 내용은 이렇다.

가늘고 고운 흙을 문 안에 뿌려두면, 은신술로 몸을 감춘 자는 보이지 않을 것이지만 그의 발자국은 그 흙 위에 찍히리라 생각했다. 역사들은 그 자취를 보고 은신술을 부리는 자를 처단하기로 한 것이다. 이 대책을 모르는, 용수와 그 친구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은신술을 부려 다시 왕궁으로 침입했다. 역사들은 기다리고 있다가 바닥에 발자국이 찍히는 허공에 대고 칼을 휘두른다.

결국 용수와 같이 갔던 친구 세 명 모두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용수만이 홀로 왕의 옆에 바짝 붙어서 목숨을 겨우 부지할 수 있었다. 용수는 비로소 욕심이야말로 괴로움의 근본이고 모든 재앙의 뿌리임을 자각하고 출가 사문이 되기로 발심하기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이 일화는 현대적으로 재해석될 만한 꽤 많은 은유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인터넷 공간에서 익명성을 빌미로 벌어지는 인간의 추악한 일면들을 떠올리게 된다. 연예인, 정치인, 운동선수들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에게 가해지는 비방, 욕설, 유언비어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주변 지인들에게 가해지는 비방도 많다. 그 악업의 크기가 현실 세계와 다르지 않을진대, 사람들은 디지털 세계는 가상이라고 성급하게 결론짓는 것 같다. 마치 꿈에서 저지른 행동처럼 말이다.

아니면 가상이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갖고 싶어 한다. 마치 은신술로 몸을 가릴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용수와 그 친구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허망한 믿음과는 달리 엄연히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인터넷 세계도 현실 세계의 가치와 도덕이 관통될 수밖에 없다. 용수의 친구들을 베어낸 역사의 시퍼런 칼날에는 선방 죽비와는 달리 자비가 없다. 업의 과보를 피해갈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온라인 가상 세계의 디지털 정보량(BIT)과 물질로 이루어진 현실 세계를 구성하는 정보의 총량이 대등한 세상으로 접어들고 있다. 우리가 인터넷 공간에 남긴 몸과 말과 뜻으로 남긴 자취와 흔적들이 현실공간에 더 많이 남아있을까, 아니면 인터넷 공간일까. 이 자취와 흔적은 데이터의 형태로 네트워크를 통해 또 다른 인공지능이 딥러닝을 통해 배우고 분석하는 자료가 된다. 최소한 우리가 업을 짓고 살아가는 법계는 바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불교신문3517호/2019년9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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