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많아도 ‘그 절’ 가는 이유는 어른이 계셨기 때문”

사판은 이판 외호해야 해
부족해도 어른으로 모셨으면
어른으로 극진히 대접해야
서로가 살고 종단도 살아나

법령과 무력 아닌 감화로
스스로 따르는 길 보이신
부처님 뜻으로 돌아가야

수진스님은 부산에서 존경받는 참 수행자다. 뛰어난 강백이며 선사다. 범어사 율학승가대학원장을 역임한 율사다. 계정혜 삼학을 두루 갖춘 선지식으로 산중에만 머물지 않고 당신이 수행을 통해 체득한 지혜를 나누는데도 소홀함이 없다. 

청량스님의 ‘화엄경소초’ 한글 번역본을 최초로 완역하고 책 출간을 준비중이다. 조계종부산연합회를 만들어 부산불교 활성화에 적극 나섰다. 재가자들을 위한 재가안거를 시행하고 성도절 연합법회를 만들었다. 불교 퀴즈대회를 열어 중고등학생들의 불교 이해를 높이고 장학금을 수여하여 불교 인재로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일반대학으로는 최초이며 유일하게 불교관련 ‘칼리지’를 만들고 선원을 개설하여 직원과 시민 대상으로 참선을 지도한다. 
 

수진스님은 선교율을 겸비하고 많은 스님과 재가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선지식이다. 그래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스님을 찾아 가르침을 받는다. 스님은 부처님 법대로 수행자의 본분사를 지키는 원칙을 강조했다.
수진스님은 선교율을 겸비하고 많은 스님과 재가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선지식이다. 그래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스님을 찾아 가르침을 받는다. 스님은 부처님 법대로 수행자의 본분사를 지키는 원칙을 강조했다.

선교율 두루 갖춘 수행자 

불교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길을 몰라 방황할 때 스님을 찾아 길을 묻고 지혜를 구했다. 이번에도 부산의 많은 스님과 재가자가 수진스님을 거론했다. 더위가 절정을 치닫던 지난 7월30일 부산 해인정사에서 스님을 만났다. 

“이 곳 저 곳에서 종단 걱정이 많은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 듣고자 찾아뵈었다”하니 스님은 “과거 어른 스님들은 여의치 않을 때는 결사(結社)를 해서 현재 상황을 타개했는데 지금 우리도 가장 우리답게, 수행자답게, 불교답게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며 그 길을 부처님에게서 찾았다. 

스님은 “부처님은 왕실에서 태어나서 카필라가 작은 나라이기는 해도 왕으로서 충분히 통치할 능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버렸다. 부처님께서는 힘과 법령으로 다스리는 것이 언제까지 가능할 것인가? 생각하셨다. 그보다는 스스로 감동을 받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을 염원하셨다. 채워야 가져야 아름답고 행복하다는데 당신은 버려서도 아름답고 평화로움을 보이셨다. 상대방을 아프게 하지 않아도 평화롭고 아름다워지는 것을 드러내 보이셨다. 우리는 그 길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면 수행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수행자가 주인이 되고 사찰과 종단이 혼연일체가 돼 제대로 된 수행자를 만드는데 모든 행정과 재정을 투입하고 교육해야 한다. 그런데 주객이 전도됐다. 스님의 말씀이다.

“사찰이 수행자가 주인인 공간이 아니고 소임자를 위한 집단이 되가고 있다. 소임자는 똘똘한 수행자를 만들어내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하고 모든 행정이 수행자 한 분 한 분을 모시고 부처님 만드는데 앞장서야 하는데 행정 자체에 만족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처럼 돼버렸다. 그러더니 어느 날 모든 수행자가 그렇게 흘러갔다.”

이(理)가 중심이 아니고 사(事)가 중심에 선 우리 종단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얼마 전 중앙종회 총림실사특별위원회는 충격적인 조사결과를 내놓았다. 통도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총림이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가장 큰 문제는 방장 선출을 놓고 벌어지는 갈등이다. 많은 총림이 방장 선출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수진스님은 방장 선출 역시 이판(理判)이 제 대접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찾았다. 

“과거는 산중(山中) 어른이 어른 되기 전에도 어른이었다. 모든 사람이 존중하는 사람을 어른으로 모셨던 것이다. 그래서 퇴임을 해도 어른으로 존경받고 받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기술을 동원해서 어른이 되니 자리에서 물러나고 나면 어디로 갔는지 없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본래 우리 사문(沙門)이 출가할 때 지향하는 점이 있는데 그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절이 많지만 그 절을 가는 이유가 있었다. 어른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 게 없어졌다.” 

스님은 그나마 부산불교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부산불교’로 불리는 이유도 어른이 많이 살고 있어서라고 했다. 

어른이 많은 부산불교

본래 어른이어서 어른이 된 방장과 ‘온갖 기술을 동원’하는 방장 모시기라는 스님의 지적에 문제의 근원과 해답이 다 들어있다. 우리가 잊고 있었다. 

방장 뿐만 아니라 종단의 모든 소임자는 굳이 묻거나 의견을 구하지 않아도 누가 주인인지 알고 있었다. 산중에 없으면 다른 문중에서 모셔왔다. 자리는 단지 형식일 뿐이었다. ‘그 어른’은 감투를 씌우지 않아도 어른이었다. 우리는 왜 그토록 빠르게 그 좋은 전통을 버렸을 까? 

스님은 이(理)와 사(事)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서 빚어졌다고 했다. 

“이와 사의 관계에서 접점을 찾지 못해서 문제가 생겼다. 이는 사를, 사는 이를 서로 인정하지 않고 사의 논리에 이가 흡입한 결과가 현재의 방장 선거다. 원칙으로 하자면 선거를 통해서 방장은 안하겠다고 해야 맞다. 그리고 조금 부족해도 어른으로 모시면 어른으로 대접을 해야 한다. 그러면 모두 어른으로 모시게 된다. 아무리 훌륭한 분이라도 어른으로 대접하지 않고 무시하면 어른 대접 못받는다. 중생은 모습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좀 부족해도 사판은 이판을 잘 외호해야 한다. 우리가 외부에 보여줄 것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다. ‘아무리 봐도 수행자가 보이지 않더라, 도인 있느냐 아무리 봐도 없더라’ 말하면 밖에서는 다들 그런 줄 안다. 그래도 ‘도인 있더라’ 이렇게 해야 한다. 그러면 여론도 따라간다.”

이판은 선거 같은 세속 절차에 흔들리지 말고 수행자로서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고 사판은 옛날 도인과 비교하여 부족하더라도 어른으로 모시고 대접하면 서로가 살고 종단도 살아난다는 것이 스님의 말씀이다. 

결국 문제의 근원을 찾아가면 수행자는 누구인가 왜 출가를 했는가 라는 근본에 닿는다. 스님은 “출가 당시 그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문제는 출가자의 본분

“우리가 언제 본사주지하고 총무원장 하려고 출가했나? 영원히 사는데 매력을 느껴서 출가하지 않았나? 출가 동기는 다르다 해도 아직 산중에 남아 있는 것은 영원히 산다는 진리에 매력을 느껴서다. 완전한 자유인으로서 그 길을 완성하겠다는 의지로 남아있는 것이다. 수도자로서 세상 누가 뭐라고 해도 그렇게 살겠다, 부처가 간 길 그 길을 가겠다, 금생에 안되면 다음 생애라도 가겠다, 그 길이 좋고 그 삶이 좋으면 다음 생애도 하는 거다. 부처님도 누생(累生)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부처님 제자는 이렇게 해야한다. 수행자로서 올곧게 살면, 수도자로서 잘 살면 포교한다고 전단지 뿌리지 않아도 온다. 세상이 더 잘 알고 더 잘 보고 있더라. 우리 모습 찾아가면 된다”고 말했다. 

스님은 계속해서 “부처님 법은 수백 수천년 지나도 바뀌지 않고 바꿀 수 없다. 그렇게 살겠노라고 했으면 지켜야 한다. 다 지키지 못하고 산다해도 참회하고 나름대로 자기 방법대로 뉘우치는 것이 수행자이다. 이판이든 사판이든 틀을 벗어날 수 없다. 본래 출가정신을 좀 더 고루하게 말하면 율장정신이다. 수행자 개인이 이처럼 철저하게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고 지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스님은 수행자 개인은 철저하게 부처님 가르침 대로 잘 살고 그러한 수행자들이 모여 함께 공부하는 결사를 문제 해결 방안으로 제시했다. 스님이 서두에서 언급했듯 과거 스님들은 문제가 있다 여기면 함께 모여 수행했다. 지눌스님의 수선결사, 백련결사, 현대 봉암사 결사와 같은 역사에 기록된 굵직한 결사 외에도 이름 없는 수많은 결사체가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이러한 힘이 오늘의 한국불교를 지탱했다. 

머리 불탄 듯 화급하게 여겨야 

수진스님도 젊을 적 시작한 결사 원력을 지금껏 이어온다. 출가 10여년 차, 한창 공부에 재미가 붙고 목숨을 걸 각오가 충만할 때 마음 맞는 도반 10여명과 뜻을 함께 했다. 스님은 “백담사 유나 영진스님, 봉암사 함현스님, 현진스님, 송광사 법흥스님 제자며 율사인 지현스님, 통도사 총무 지낸 원행스님 등 10명이 모여 결사를 하자 해서 향곡, 성철스님이 공부했던 인연터를 찾아가고 보조국사가 결사를 열었던 은해사 운부암도 가고 했었다”고 말했다. 결사는 지금도 1년 두 차례 모이며 계속한다. 결사모임이 두연회(頭燃會)다. 머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화급히 공부하자는 의미다. 

결사를 결의했지만 함께 공부할 터를 찾지 못해 각자 공부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10년 동안 경을 공부하고 10년 뒤 제방 선원을 다니며 수선(修禪)했으며 그 뒤 10년 동안 해인사 강주, 범어사 율주, 사찰불사, 동명대학 시민선원 조계종 부산불교연합회 등으로 법을 펼쳤다. 

스님은 “과거는 10명이 출가하면 1~2명 가량 발심출가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출가자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발심출가라는 사실이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발심의 강도는 과거보다 희미해져 걱정이라고 한다. “뭔가 일을 해내려하면 패기 있고 겁도 없고 믿으면 그대로 맹렬하게 돌진하는게 있어야 하는데 ‘맞을까?’하고 돌이켜 보고 의심하는데 그러면 벌써 한풀 꺾이는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스님은 “모든 수행은 기본이 믿음이다. 믿고 신뢰하고 존경하는 관점에서 풀어야 한다”며 맹렬한 의지로 금생 아니면 내생에라도 이루겠다는 각오로 오직 한 길을 걸어가는 수행자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기를 거듭 염원했다. 

부산=박부영 상임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17호/2019년9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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