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기록 ‘잃어버린성지’] <7> 서울 백련사
[현장기록 ‘잃어버린성지’] <7> 서울 백련사
  • 박봉영 기자
  • 승인 2019.08.28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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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년째 ‘미입주’ ‘분규’ 꼬리표 못뗀 ‘西’ 비보사찰

진표율사 창건 1300년 역사
의숙옹주 재궁 둔 왕실 원찰
통합종단 등록한 조계종사찰
대처승 점유해 태고종 등록
해결 못한채 57년 ‘진행 중’
​​​​​​​이 시대 불교에 남겨진 과제
한양을 수호하는 4대 비보사찰 가운데 서쪽을 상징하는 백련사는 통합종단 출범 이후 57년째 미입주 분규사찰로 남아있다. 창건 이래 1300년간 이어져온 백련사가 ‘미입주’, ‘분규’ 꼬리표를 떼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한양을 수호하는 4대 비보사찰 가운데 서쪽을 상징하는 백련사는 통합종단 출범 이후 57년째 미입주 분규사찰로 남아있다. 창건 이래 1300년간 이어져온 백련사가 ‘미입주’, ‘분규’ 꼬리표를 떼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조선의 도읍지 한양은 일종의 계획도시에 해당한다. 왕궁을 중심으로 내성을 쌓고 외성을 두어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통하는 대문과 대로를 만들고 소문과 소로를 두어 도읍지다운 면모를 갖췄다. 고려 도읍지 개성이 기운을 다했다는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을 도읍지로 정했다는게 정설처럼 여겨진다.

계획도시 한양에서 주목해야할 한 가지가 있다. 4대 비보사찰(裨補寺刹)이다. 숭유억불의 국가였음에도 풍수지리에 기반을 둔 비보사찰을 두었다는 것은 당시 불교가 조선에 미친 영향을 적잖게 보여주는 한 대목이다. 최근 한글 창제설과 관련해 불교가 관여한 여러 정황들을 영화화한 나랏말싸미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풍수지리에 근거를 둔 비보사찰은 청정한 기운을 돋게 하거나 삿된 기운을 눌러 사람들을 보호하는 장치다. 한양의 동서남북 4방에 비보사찰을 둠으로써 조선과 한양의 안녕을 기원하는 염원이 담겼다고 할 수 있다.

1927년 작성된 <봉은사본말사지>에는 무학대사(1327~1405)가 동쪽의 청련사(청연사), 서쪽의 백련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를 비보사찰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다. 비보사찰을 통해 우주의 기운을 청정하게 에워싸는 만다라의 의미를 한양에 담았다고 한다.
 

19세기 제작된 경조오부도에 옛 명칭 정토사로 표기돼 있다. 백련은 서방정토의 상징이어서 같은 의미다.
19세기 제작된 경조오부도에 옛 명칭 정토사로 표기돼 있다. 백련은 서방정토의 상징이어서 같은 의미다.

서방의 비보사찰 백련사는 현재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백련산에 자리잡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1909년 쓰인 <백련사사적기>는 신라 경덕왕 5년 정해년 진표율사를 국사로 받들고 절을 지어 정토사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재위년도와 간지가 오류가 있다. 경덕왕 5년은 병술년이고 정해년(747)은 이듬해다.

백련사의 중창은 무학대사의 제자인 함허 득통선사(1376~1433)가 정종 원년인 1399년 사찰의 면모를 일신했다. 백련사로 개칭한 것은 세조 때의 일이다. 세조는 딸 의숙옹주가 죽자 백련산에 묘를 쓰고 백련사를 원찰로 삼았다. 이 때 정토사에서 백련사로 이름을 바꿨다.

서방정토의 상징이 백련이기 때문에 정토와 백련은 같은 의미다. 19세기 제작된 대동여지도와 경조오부도에는 정토사로 기록돼 있어 백련사로 이름을 바꾼 후에도 정토사라는 이름이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사찰이 유생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던 조선시대에도 백련사는 이를 엄격히 금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의숙옹주의 재궁이 있는 원찰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백련사는 모두 소실됐으나 곧바로 중건했다. 이후 수차례 중건을 거친 것이 <중수백련사기>, <무량수전상량록>, <약사불인연기>와 공덕비 등을 통해 확인된다.

백련사는 비보사찰이자 왕실의 보호를 받은 사찰로 조선시대를 풍미했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불교정화를 맞으며 질곡의 현대불교사 한가운데 놓였다. 한양의 4대 비보사찰도 명운이 바뀌었다.

불교정화운동은 일제 잔재 청산의 한 과정이다. 승려가 결혼을 하도록 한 일제의 잔재를 없애고 한국 고유의 불교로 되돌아가고자 한 것이 불교정화운동이다. 이미 일제강점기 동안 대처승이 기득권층으로 자리 잡은데다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극적 합의에 따라 이뤄진 1962년 통합종단 출범은 비구 대처간 갈등에 있어 일대 전기가 됐다.
 

백련사 입구에 있는 부도와 공덕비. 이 곳에 서린 1300년 역사의 숨결을 기억해야 한다.
백련사 입구에 있는 부도와 공덕비. 이 곳에 서린 1300년 역사의 숨결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통합종단 출범에 반대하는 대처승은 반발을 멈추지 않았다. 통합종단에 등록했으나 인계를 거부한 12개 사찰을 비롯해 아예 등록을 거부한 65개 사찰이 미입주 사찰로 남았다. 서울 봉원사와 백련사, 청련사 등은 등록은 했으나 인계를 거부해 통합종단 조계종이 입주하지 못한 경우다. 한양 비보사찰 4곳 중 백련사와 청련사 2곳이 이에 포함됐다. 이 문제는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왕십리동에 위치한 청련사는 2009년 아파트 개발과 함께 제자리를 잃었다. 조계종은 서초구 서초동에 대토를 했으나 지금까지 부지로 남아있다. 사찰로 다시 문을 열 수 있을지 미지수다. 이와 달리 태고종은 양주 장흥면으로 이전했고, 청련사에 있던 성보도 모두 양주 청련사로 이관된 상태다.

백련사는 또다른 유형의 미입주사찰이다. 대처승 점유상태에서 1970년 태고종으로 등록했다. 조계종 백련사와 태고종 백련사가 하나의 사찰에 동시에 존재하는 형태가 됐다. 이마저 조계종은 지금까지 입주하지 못한채 57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랜 기간 미입주사찰로 남으면서 백련사는 사찰 경내지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민가가 인접해 있다. 대처승 대중이 많은 태고종 사찰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다. 미입주사찰에 대한 해결방안이 뚜렷이 없는 현 상황에 비추어보면 백련사는 사고사찰로 굳어지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조계종과 태고종간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한 사례로 남은 서울 봉원사처럼 백련사도 문제 해결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절실하다.

백련사 입구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산기슭엔 부도와 공덕비가 한데 모여있다. 다른 자리에 있던 것을 이곳에 봉안하거나 세운 것이다. 1300년 역사의 숨결이 이곳에 녹아있다. 백련사가 분규사찰의 꼬리표를 떼어내고 한국불교의 역사를 면면히 계승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오늘의 불교에 남겨진 과제다.
 

사찰 경내지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민가가 인접해 있다. 대처승 대중이 많은 태고종 사찰의 특징이다.
사찰 경내지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민가가 인접해 있다. 대처승 대중이 많은 태고종 사찰의 특징이다.

[불교신문3515호/2019년8월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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