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문은 붓다의 사자(使者), 현대사회 포교사”
“불교신문은 붓다의 사자(使者), 현대사회 포교사”
  • 김선두 기자
  • 승인 2019.08.27 17: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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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60주년 맞이 특별기획’
불교신문은 나의 도반 - 원로의원 암도스님


“불교신문은 스님들과 함께
부처님 대신 그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심부름꾼
곧 ‘佛法의 선구자’이니
내용은 대중적 가르침으로
근본교리에 충실해야겠지”

“10ㆍ27법난 이후 침체기에
공공기관ㆍ기업 법문 다닐 때
포교에 대한 필요성 알리며
직장불자회 창립 붐 일으키는
엄청난 역할 해내곤 했으니
불교신문은 불자들 도반이지”
전국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절 ‘마하무량사’의 암도스님이 100세 시대에도 최고로 꼽는 것은 ‘불교공부’다. 스님은 더불어 멋지게 잘 사는 법이 들어 있는 불교의 근본ㆍ기본교리를 불교신문에 계속해서 실으며 사회를 이끌어야 가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신재호 기자
전국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절 ‘마하무량사’의 암도스님이 100세 시대에도 최고로 꼽는 것은 ‘불교공부’다. 스님은 더불어 멋지게 잘 사는 법이 들어 있는 불교의 근본ㆍ기본교리를 불교신문에 계속해서 실으며 사회를 이끌어야 가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원로의원 암도스님에게 늘 따라다니는 별칭 가운데 하나가 ‘이 시대 설법제일 부루나 존자’다. 1972년 총무원 감찰국장으로 시작해 종회 사무국장, 상임포교사, 총무부장, 포교원장, 교육원장 등 중앙종무기관 소임을 포함해 반세기 가까운 세월동안 시민들과 만나며 법문을 이어오는 가운데 붙여진 별명이다.

조계사에 모인 신도들부터 기업체 임직원, 고위직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에 맞는 법문 준비를 하며 살다보니 스님의 법문은 ‘대기설법’, ‘생활법문’으로 정평이 나게 됐다. 그런 법문은 몇 가지로 주제로 정리된다. △참으로 잘 사는 법 △바르게 잘 사는 법 △복스럽게 잘 사는 법 △멋지게 잘 사는 법 △더불어 이쁘게 잘 사는 법 △잘 먹고 잘 사는 법 등이다.

그 바탕은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연기사상(緣起思想)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의 근본진리다. 스님은 최근 이 같은 내용을 모아 소책자 <참으로 잘 사는 법>을 펴냈다. 불자라면 누구나 잊지 말아야 할 불교의 정수가 담겨있다.

‘불교의 근본진리를 널리 알린다’는 역할에서 스님은 특히 불교신문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남다르다. 더구나 불교신문이 창간60주년(2020년 1월1일)을 앞두고 있다는 말에 스님은 백중기도가 한창이던 지난 7월18일 전남 담양 마하무량사에서 시간을 냈다.

스님은 ‘신문배달 소년’이었다. 1938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스님은 집안사정으로 초등학교 5학년인 13살 때부터 신문배달을 해야 했다. 그러던 중 종단에서 운영하던 정광중학교에 진학, 원효, 원광 등 고승들에 대한 책에 재미를 붙이는 한편 백양사 출신 교사들과 접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자연히 출가에 대한 생각이 깊어갔다.

17살 되던 1955년 백양사를 찾았다. 은사는 서옹스님. 하지만 ‘고등학교는 다녀야 한다’는 주변 분위기에 밀려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 <학원>지에 낸 소설이 입선하는 바람에 ‘소설가’ 별명을 달고 다녔고 기자가 되고 싶어 속기사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을 하든 가난에 대한 고뇌는 결국 한 집안의 장남을 결국 산으로 향하게 했다. “공무원시험 준비를 한다”며 부모를 속이고 재출가한 것이다. 서옹스님 이외에 은사를 두 분 더 만나는 인연이 됐다. 화순 용암사에서 천운스님을 만났지만 다시 백양사로 갈 수밖에 없었다.

비구-대처 분규가 극심한 시기. 훗날 태고종 종회의장을 역임한 월하(月河)스님을 잠시 은사로 모시기도 했다. 스님 표현대로 “기구한 세대”다. 백양사를 종단에 등록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한때 대처승 측에서 활동한 죄로 수없이 손가락질을 받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인연 닿는 대로 종단에서 심부름을 계속해 온 것도 젊을 때 실수를 조금이라도 만회해보려는 생각이 전혀 없던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인재가 아쉬운 시절. ‘절 집에도 현대교육을 받은 스님들이 절실하니 대학에 진학하라’는 권고에 서른이 넘은 나이에 스님은 동국대에 들어가 박사학위까지 취득할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11년 전 인터뷰 때 법문 횟수가 이미 6000회는 넘었다던 스님은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은 강원도와 경기도를 오가며 법문을 이어가고 있다.

“불교신문을 처음 접한 때는 사실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아. 출가초기 어린 나이엔 살아내느라고, 그 다음엔 정화하러 다니느라 사실 불교신문을 제대로 볼 수 없었어. 종단소임 보며 불교신문을 자연스럽게 보게 된 거라. 주로 본 것이 선사들에 관한 글, 어록 같은 거였어. 한때 소설가가 되려고 문학수업을 좀 하다 보니 문학관련 글을 열심히 봤어.”

“법정스님이 편집국장할 때 글을 많이 봤지. 법정스님은 글만 잘 쓰는 게 아니라 중노릇으로도 최고지. 한때는 법정스님이 우리 종비생들을 너무 우습게 봐서 스님을 혼내주려고 봉은사에 쳐들어가기도 하고 그랬는데 나중에 보니 너무 훌륭하더라고. 법정스님은 야당시절 김대중 선생과 친했거든. 그런데 나중에 김대중 선생이 실력자가 되니 오히려 스님이 발을 딱 끊어버리데. 그렇게 하기 어렵거든. 조금이라도 아는 사이라면 막 청와대로 찾아가려 하는 게 보통사람들이잖아.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치와 종교의 유착이 심해지면 망하는 길로 접어들었잖아. 그런 점에서 보니 법정스님이 그렇게 훌륭해 보이더라고.”

스님은 당시 불교신문의 정론직필을 주도하던 법정스님과 관련된 일화들을 하나 둘 회고해 내기 시작했다. 승가 일부에서 법정스님을 싫어하는 것은 너무나 비판적 이야기를 해서 그렇지만, 대부분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실천이 뒷받침되지 않는 기복행위 등에 대한 거침없는 질타 등은 당시 법정스님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학인시절 동국대 종비생 스님은 한 때 승복 대신 일반학생들과 같은 교복을 입을 수밖에 없어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저간의 사정은 제쳐두고 법정스님은 이런 것조차 용납하지 않아 학인들과 척을 두기도 했다고 전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녔어. 빵모자까지 쓰고. 법정스님이 ‘한쪽은 교복, 한쪽은 승복 입은 학인, 반승반속의 학인들’ 사진을 신문에 냈어. 우리가 쫓아가 죽여 버린다고 했어. 그만큼 자기(법정스님)딴에는 보기 싫었던 거야. 수행자 위의가 아니라는 지적이지만 학생 스님들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입게 된 건데 법정스님이 그걸 꼬집으니 법정스님이 미워서 죽을 판이었지. 우리는 두루마기에 시커먼 물 들여서 입고 다녔는데 일반 학생들이 그걸 싫어하니까 학교 총무처에서 억지로 교복을 입게 한 거야. 우리도 존심 상하고 불편해 죽겠는데 그 사진을 보니 속이 더 상해서 법정스님이 있던 봉은사까지 쳐들어갔다니까. 종립대학인데도 학인 수가 얼마 안 되다 보니 우리가 당한 거지.”

법정스님의 이같은 성품과 글이 화제가 되면서 사회에서 내로라하는 필자들이 불교신문 필자로 동참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게 암도스님의 생각이다. 또 하나 스님이 잊을 수 없는 것은 10ㆍ27법난 이후 불교가 제 역할을 하기 어려울 시절 불교신문의 역할이다.

“10ㆍ27법난으로 인해 한번 혼쭐나다 보니 불교계가 각성이 시작된 거야. ‘아, 포교 해야겠다’ 그런 기운으로 각 절마다 교양대학(지금의 신도기본교육기관)이 생기기 시작한 거야. 내가 포교원장 시절이야. 난 한편으로 경찰대학(당시 부평 경찰종합학교)을 비롯해 내무부, 법무부, 중앙공무원교육원, 국방대학원, 각 기업체 임원연수 때마다 법문하러 엄청나게 다녔어. 그 때까지만 해도 한 5000번은 뛰었지. 하루 네 번씩 가는 날도 많았어. 그러면서 공무원불자회도 만들어지고 한국은행 제일은행 등 직장불자회도 만들어지기 시작했어. 우리 사회에 ‘불교 붐’을 일으키는 과정에 바로 불교신문이 있었잖아. 10ㆍ27법난이후 포교에 대한 현실적 필요성, 그런 침체기에 발로 뛰는 스님들의 포교활동, 그런 상황을 딛고 일어서려는 불자들 모습을 불교신문이 앞장서서 전해줬잖아. ‘한 장의 불교신문 한 사람의 포교사’라는 슬로건도 그 때 나왔지 아마! 그 정도로 불교신문이 잘 해준 거라. 아무도 모르는 것을 그렇게 이끌고 뒷받침 해주니 불교신문이 엄청난 역할을 한 거야.”

늘 챙겨 읽지는 못하지만 스님은 불교신문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불교신문이 선(禪) 일변도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 사실 불교신문은 제대로 된 근본교리를 반복해서라도 계속 게재해야 돼. 세대가 바뀌고, 신규 독자가 일정하게 들어오니까 그 분들이 기초를 공부할 수 있게 핵심교리를 계속해서 실어야 한단 말이지. 핵심을 빼버리면 어떻게 불교신문이라고 할 수 있겠어?”

가볍게 차담이나 하며 옛 기억을 되새겨 보자던 스님 찻상에는 정성들여 써놓은 메모가 있었다. 창간60주년을 맞이한 불교신문에 대해 스님이 내린 정의다.

“불교신문을 뭐라 해야 할까? 첫째가 현대포교사다. 내용으로는 ‘불자들의 도반’이다, 나의 도반이기도 하고. 그 다음에 불법(佛法)을 가르치는 ‘불법의 선구자’다. 그 다음에는 ‘붓다의 사자(使者), 부처님의 심부름꾼’이다. 그리고 불교신문은 ‘대중적 가르침’이다. 불교신문 자체가 교육이 되니 대중적 가르침이란 말이지.” 현대사회를 이끌어가는 포교사로서 불교신문과 스님의 역할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서 스님은 찻잔을 들었다.

“난 인성교육원을 하려고 해. 수십 년 포교를 해보니 결국 불성(佛性)이 인성(人性)이야. 여기(마하무량사)에 한글로 ‘인성교육원 불성광명당’ 주련을 걸려고 그래. 내가 바라는 것은 <반야심경>이나 <법구경> <숫타니파타> <사십이장경>을 중심으로 꾸준히 연재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야. 이게 핵심이더라고. 선(禪)도 해야 하지만, 계정혜 삼학, 기본을 놓치면 안 돼. 고마워.”

담양=김선두 기자 sdkim25@ibulgyo.com

[불교신문3515호/2019년8월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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