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수사로 불교계 명예손상 죄송”…국무총리 공식 사과
“과잉수사로 불교계 명예손상 죄송”…국무총리 공식 사과
  • 엄태규 기자
  • 승인 2019.08.27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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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60주년 맞이 특별기획’
불교신문으로 보는 근현대 불교사 명장면 ③ 1980년대
1980년대는 신군부에 의한 10‧27법난으로 불교계가 치욕을 겪었던 시기이자 불교자주화를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기였다. 해인사 전국승려대회를 보도한 1986년 9월17일자 불교신문.
1980년대는 신군부에 의한 10‧27법난으로 불교계가 치욕을 겪었던 시기이자 불교자주화를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기였다. 해인사 전국승려대회를 보도한 1986년 9월17일자 불교신문.

 

- 불교와 5‧18 민주화운동
1980년 5월 광주에서 신군부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불교계는 광주 시민들을 돕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였다. 당시 총무원장 월주스님은 교무부장 현광스님을 단장으로 한 구호봉사단을 광주에 급파했다. 불교신문은 1면에 ‘광주사태 구호봉사단’ 파견 기사(1980년 5월25일자)를 실었다.

당시 신문은 “불자 비불자를 가릴 것 없이 전시민들을 대상으로 피해상황을 조사하여 거종단적인 지원을 할 계획”이라고 봉사단의 역할을 소개하고 있다. 이어 종단은 5월30일 광주시민돕기대책본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광주 지원에 나섰다. 본부장은 총무원장 월주스님.

스님은 “광주사태로 인하여 생긴 사상자와 그 유족을 위로하고 한사람도 빠짐없이 광주시민을 돕는데 앞장서자”고 호소문(1980년 6월8일자)을 발표했다. 이어 6월3일 직접 광주로 내려가 전남대병원과 국군 광주통합병원을 방문해 부상자들을 위로하고 전남도청에 광주시민들을 위한 성금 100만원을 전달했다(1980년 6월15일자).

- 전대미문의 국가폭력 10‧27법난
1980년은 암흑의 시대였다. 서슬 퍼런 신군부의 총칼 앞에 한국사회는 숨죽여야만 했다. 불교계 역시 시련의 시기였다. 한국불교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인 10‧27법난이 발생했다. 불교정화라는 미명 하에 자행된 전대미문의 국가폭력이었다. 조계종 스님 등 153명이 강제로 연행돼 고초를 겪었고, 전국 사찰과 암자 5731곳이 군경에 의해 유린됐다.

법난 직후 발행된 불교신문은 ‘불교계 비리 정화 착수’, ‘파벌폭력 등 12개항 근절 불교중흥을 위한 조처’(1980년 11월2일자) 등의 제목으로 법난 사실을 보도했다. 언론통제로 계엄사령부의 입장을 그대로 보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기사 역시 “계엄사령부는 지난달 27일 불교계내의 비리와 부패 법법행위, 사이비승려, 폭력배 등 46명을 수사당국에 연행, 조사하고 있다고 28일 발표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불교와 광주민주화운동, 1980년 6월15일자.
불교와 광주민주화운동, 1980년 6월15일자.
불교신문 창간호, 1980년 12월21일자.
불교신문 창간호, 1980년 12월21일자.

- 대한불교 폐간과 불교신문 창간
1980년 11월 신군부에 의해 언론기관통폐합이 자행됐다. 이어 신군부는 12월 언론기본법을 제정해 언론통제의 기초를 마련했다. 불교신문 역시 언론기관통폐합이라는 칼날을 피해가지 못했다. 문화공보부는 11월28일자로 대한불교의 정기간행물 등록을 취소했다.

사실상 강제 폐간이었다. 대한불교의 폐간은 불교신문 60년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대한불교라는 제호는 1980년 11월30일자를 끝으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폐간 직후 바로 본지는 신문 복간 작업에 착수해 불교신문 창간호를 발행했다. 대한불교 폐간 3주만의 일이었다. 창간호(1980년 12월21일자) 1면 기사에서는 “불법홍포와 사회계도를 목적으로하는 불교신문이 첫선을 보인다. 이로써 불교신문은 불교계 유일의 대변지로 소식을 국내외에 전하게됐다. 또한 불교신문을 통해 새시대 새불교가되도록 지향할 예정…불교신문은 불교계 여론을 모두 받아들여 불교계 유일의 대변지로서의 사명을 다할것”이라고 창간 의미를 밝히고 있다.

- 성철스님 제7대 종정 추대
1981년 1월10일 열린 원로회의에서 해인총림 방장 성철스님이 제7대 종정에 추대됐다. 당시 불교신문(1981년 1월18일자)은 성철스님 종정 추대에 대해 ‘역사적인 화합종단 탄생’으로 평가했다. 성철스님은 1월20일 조계사에서 봉행된 종정 추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불교신문(1981년 1월25일자)은 “해인총림이 자리한 가야산문을 한번도 떠나본일이 없다는 평소 스님의 생활신조에 따라 참석치 못했음을 사회자가 알려주자 못내 아쉬운 표정들이었다”며 추대식 분위기를 상세히 전하고 있다.

이와 함께 성철스님이 종정 취임을 수락하며 남긴 법어 ‘원각이 보조하니 적과 멸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전문을 보도했다.

- 제1회 단일계단 수계산림
1981년 2월27일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제1회 단일계단 수계산림이 봉행됐다. 종단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수계를 하는 수계산림이 제도화되면서 한국불교는 체계를 갖추고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자운스님을 수계법사로 사미 84명, 사미니 77명 등 모두 161명이 수계했다. 불교신문은 수계산림 예고와 현장 기사 등을 보도하며 수계산림이 갖는 의미를 알리는데 앞장섰다.

당시 불교신문(1981년 2월8일자) “총무원은 81년도 수계를 불보사찰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산림을 실시한다… 지금까지는 지연 또는 인연에 의하여 수시로 전계해왔으나 이로인해 승려의 자격이 실추되었다는 여론이 있어 앞으로는 승려의 기강확립과 승려교육 질서의 확립, 계율의 생활화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승려상을 보이기위해 제도화한 것”이라고 단일계단의 의미를 밝혔다.

수계산림 이후 보도한 기사(1981년 3월15일)에서도 “단일계단 수계식으로 종래 산발적인 수계형태를 지양하고 단일계단화 제도를 과감히 실행함으로써 종단 백년대계를 위한 승풍진작의 초석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 해인사 승려대회와 불교자주화
1986년 9월7일 해인총림 해인사에서 전국승려대회가 봉행됐다. 해인사에 모인 2000여 명의 스님들은 한 목소리로 △불교관계 악법 즉각 철폐할 것 △사원의 관광‧유원지화 중지할 것 △10‧27법난 책임지고 해명할 것 등 10개항을 결의했다. 해인사승려대회는 그동안 정치권에 예속됐던 불교계가 자주화를 선언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담고 있다. 또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불교 사회화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불교신문은 ‘불교관계법 개‧폐 강력주장’ 기사(1986년 9월17일자)를 통해 대회의 의미를 상세히 보도했다. 또 해설 기사를 통해 해인사승려대회가 ‘한국불교 자주성 회복의 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당시 승려대회 집행위원장 월주스님은 “단순히 불교관계법의 개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넓게는 이땅의 진정한 민주화와 민족의 정통성 회복을 위한 자리”라고 해인사 승려대회의 성격을 규정했다.

- 6월항쟁과 민중불교운동
1986년 불교 자주화를 결의했던 해인사 승려대회는 불교계 내 사회 참여 흐름을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 이듬해인 19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불교계의 민주화 운동 참여는 한층 활발해졌다. 불교의 사회 참여와 불교자주화를 내세우며 조직된 정토구현전국승가회와 출‧재가가 함께 한 민중불교운동연합 등이 이 시기를 전후해 결성돼 동국대 석림회와 중앙승가대 학생회,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대한불교청년회 등과 더불어 진보적인 불교운동의 흐름에 동참하며 불교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이 알려지자 민주화 요구는 한층 거세졌으며, 1987년 5월 재야인사와 종교인 정치인 등으로 구성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 지선스님, 진관스님 등 스님 102명과 재가불자 58명이 가입하기도 했다. 불교신문은 6회에 걸쳐 ‘민중불교란 무엇인가’ 기획을 통해 민중불교의 출현과 사회적, 불교적 배경 등을 분석하고 “민중불교는 불교역할 회복운동”(1988년 3월2일자)이었다고 평가했다.

- 88서울올림픽과 불교
지구촌 축제 88서울올림픽을 맞아 불교신문은 올림픽 관련 기사들을 보도하며 포교와 불교문화 홍보 기회로 삼았다. 종단에서는 1988년 8월8일 올림픽 불교문화행사 추진본부를 구성하고 특별미술전, 영산재, 연등제, 종교관 운영 등 다양한 사업들을 추진해 나갔다. 이와 함께 남북통일과 올림픽성공개최를 기원하면 전국 불자들도 마음을 모았다.

불교신문도 올림픽 기간을 전후해서 30여 건에 달하는 다양한 기사들을 보도했다. 불교계의 올림픽 준비 기획 기사 ‘한국은 불교의 나라, 세계의 알린다’(1988년 8월31일자)를 통해 불교문화 행사들을 점검했으며, 올림픽 기간 동안 불자선수들의 안식처 역할을 할 불교관 개관(1988년 9월14일자) 소식을 발 빠르게 소개했다.

또 올림픽 출전 불자선수 명단(1988년 9월21일자)을 게재하며 불자선수들의 활약상을 소개했다. 올림픽 이후 ‘조국에 영광을…장하다 불자선수’ 불자선수 환영법회 기사(1988년 10월12일자)를 통해 불자들의 자긍심을 고취시켰다.
 

강영훈 국무총리 10‧27법난 공식 사과, 1989년 1월18일자.
강영훈 국무총리 10‧27법난 공식 사과, 1989년 1월18일자.

- 강영훈 총리 10‧27법난 공식 사과
1980년 10‧27법난 발생 이후 불교계는 줄기차게 법난 진상규명과 공식사과를 요구해왔다. 해인사 승려대회와 이후 한국사회 민주화 운동의 흐름 속에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불교계의 외침은 더욱 거세졌다. 종단에서는 1988년 11월 10‧27법난 진상규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불교계 명예회복에 나서기 시작했다. 10‧27법난으로 피해를 입었던 혜성스님과 월주스님이 위원회를 이끌었다. 불교신문 역시 불교계 여론을 주도하며 정부를 압박했다.

이에 정부는 1998년 12월30일 국민과 불교계를 상대로 공개사과문을 발표했다. 법난 발생 8년 만에 정부 차원의 첫 공식사과였다. 당시 불교신문(1989년 1월18일자)은 “과잉수사로 인해 귀중한 개인의 인권과 신성한 교권이 침해되고 불교계의 명예와 권익에 손상을 입힌데 대해 죄송하다”는 정부 공식사과를 신속히 보도했다. 이와 함께 법난 사과 입장을 담은 국무총리 담화문 전문을 게재하고 정부사과의 의미와 법난 주요 일지 등을 보도하며 불교계 명예회복에 앞장섰다.

- BBS불교방송 개국
1990년 5월1일 불교계 각 종단과 단체, 불교인들의 후원으로 BBS불교방송이 개국했다. 1987년 종단 차원에서 불교방송 설립을 추진한지 3년여만의 성과였다. 불교신문은 설립 추진 과정부터 불교방송 설립모금본부 설치, 시험방송, 개국 등 전 과정을 상세히 소개했다. 특히 ‘불교방송국 이렇게 설립하자…각계 인사들 의견’(1987년 11월18일자)를 비롯해 성금 창구 안내를 1면 상단에 박스기사로 소개하며 불자들의 동참을 독려해왔다.

또 불교방송 개국 현장 기사(1990년 5월9일자)를 통해 “지난 3월부터 시험방송을 해오던 세계최초의 불교방송이 지난1일 오전10시 역사적인 개국식을 갖고 정규방송에 들어갔다… 이날 종정 성철스님을 이례적으로 녹음테잎에 육성법어를 담아 불교방송 개국을 축하했다”고 보도하는 등 불자들의 염원을 담은 불교방송 개국의 생생한 분위기를 독자들에게 전했다.

[불교신문3515호/2019년8월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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