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60주년 맞이 특별기획’
불교신문으로 보는 근현대 불교사 명장면 ② 1970년대

1970년대는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우리말불교성전 창간, 중앙불교승가학원 개원 등 종단 중흥의 기틀을 닦은 시기이자 분규로 종단이 혼란했던 시기였다.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1975년 1월19일자
1970년대는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우리말불교성전 창간, 중앙불교승가학원 개원 등 종단 중흥의 기틀을 닦은 시기이자 분규로 종단이 혼란했던 시기였다.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1975년 1월19일자

 

- 세계불교지도자대회 서울대회
1970년 10월 전 세계 불자들의 이목이 대한민국으로 집중됐다. ‘하나의 세계, 하나의 동포’를 주제로 세계불교지도자대회 10월10일부터 15일까지 서울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대회에는 중국과 일본, 인도, 캄보디아, 네팔, 티베트, 홍콩 등 동아시아 25개국에서 250여 명이 참석했다. 종단 주도로 국내에서 최초로 열린 세계불교지도자 대회는 세계 불교와 교류했던 한국불교 노력의 결실이었다.

불교신문은 대회 소식을 ‘전 세계 불자들 한자리에 하나의 세계 향한 지도자 대회 개막’ 1면 머리기사(1970년 10월11일자)와 사설, 각국 주요 참석자 명단 등 통해 소개했다. 대회의 의미는 당시 총무원장 청담스님 당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청담스님은 “이 땅에 평화와 번영을 이룩할 수 있게끔 전 불교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현하는데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라며 “이번 대회는 모든 불자들의 지혜를 한데모아 혼탁한 사회에 영원히 꺼지지않는 횃불이 될 수 있는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 달라이라마 및 티베트 지원 캠페인
본지가 최초로 티베트불교 지원에 관심을 갖자고 촉구하고 나선 것은 1970년 10월이다. 당시 본지는 ‘티베트 피난민 생계 곤란 다라이 라마 승정 지원 요청’(1970년 10월25일자) 1면 기사를 통해 티베트 난민들의 어려움을 다뤘다. 기사는 “중공의 압제에서 견디지 못하고 인도로 망명한 티베트망명국황 ‘다라이 라마’와 5만여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생계유지에 커다란 타격을 받고 있음이 뒤늦게 알려져 전세계 불자들의 협조가 요망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후 본지는 조계종 총무원과 함께 캠페인에 나섰고 1970년 11월1일자 1면에는 캠페인을 홍보하는 알림이 게재됐다. 알림에서 본지는 “불자 여러분, 인류애를 발휘, 자비에 넘치는 따뜻한 정을 나눕시다”라며 캠페인을 독려했다. 캠페인은 애초 11월1일부터 30일까지만 진행하기로 했으나 각계의 온정이 이어지며 그해 연말까지 연장됐다. 불교신문은 후원 명단과 관련 기사들을 지속적으로 소개하며 티베트 난민 지원 캠페인을 주도했다.

- 정화불사 헌신한 청담스님 열반
종단정화 불사에 평생을 매진한 청담스님이 1971년 11월15일 입적했다. 스님 입적 직후 발행된 불교신문(1971년 11월21일자)은 사실상 청담스님 추모 신문이었다. 본지는 추모 특집을 통해 종단 정화불사에 헌신하며 조계종 출범의 토대를 마련한 청담스님의 생애와 업적을 선양하는 일에 앞장섰다.

‘총무원장 이청담 큰스님 열반’을 제목으로 한 1면 머리기사를 시작으로 스님의 마지막 7일, 조시 ‘청담 노사(老師)를 보내며’, 불교논단 ‘청담 대종사와 호국사상’, 청담스님이 마지막 외부 공식행사로 참석한 원주 1군 사령부 법당 준공식 기사 등 1면부터 4면까지 다양한 기사들을 게재했다. 당시 사설 ‘불교의 거성 떨어지다’는 “70평생 중생제도를 위해 몸바쳐오신 스님을 잃은 우리로서 비통한 마음을 새삼 무엇이라고 하랴…스님이 가장크게 심려하시던 일은 교계의 정화와 중생의 제도였다”고 스님을 추모했다.

- 10월유신과 불교신문
1972년 10월17일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10월유신’의 서막이었다. 한국적 민주주의 정착이라는 미명하에 시행된 10월유신은 독재체제를 공고히했다. 의회 권한은 축소됐고 언론탄압도 이어졌다. 불교신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상계엄령 직후 불교신문(1972년 10월22일자)는 국회해산, 정치활동 중지 등 비상계엄 내용을 보도했으며, ‘10월유신으로 내일은 밝다’(1972년 11월19일자)와 사설을 통해 유신헌법을 홍보했다.

당시 ‘10월유신과 종단자세’ 사설은 “10월유신의 필연성은 이제 모든 국민간에 충분히 납득되고 이 과업의 완수를 향하여 온국민의 분발의 물결이 크게 움직이고 있다”고 적고 있다. 또 매호 신문에 ‘한국적 민주주의 우리땅에 뿌리박자’, ‘과시하자 민족단결 완수하자 유신과업’ 등 구호가 등장했으며, 주요 사찰에서는 10월유신 지지 불교인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 우리말 불교성전 출간
통합종단 출범 이후 역경 사업은 도제양성, 포교와 더불어 종단 3대 사업으로 강조돼 왔다. 1972년 11월20일 우리말 불교성전 출간됐다. 이는 운허스님을 편찬위원장으로 경전 한글화에 매진해 온 역경 사업의 첫 결실이었다. 불교신문은 ‘우리말 불교성전 간행, 30일 회향 온 불자의 오랜 숙원 성취’(1972년 11월26일자) 1면 기사를 통해 ‘통불교적인 색채 지녀, 한국불교의 실질적토착화 이뤄’라고 평가했다.

이와 함께 법정스님의 글 ‘불교성전의 내용과 특색’을 소개했으며, 같은 호 사설에서는 “불교성전의 간행사업이 여기서 그칠것이 아니라 이번에 간행된 불교성전의 대대적인 보급운동과 함께 불교의 생활화, 대중화운동이 크게 일어야 할 것이며, 성전간행에만 그치지 말고 보다 광범위한 불서간행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상설기구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의미를 강조했다.
 

1970년대는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우리말불교성전 창간, 중앙불교승가학원 개원 등 종단 중흥의 기틀을 닦은 시기이자 분규로 종단이 혼란했던 시기였다.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1975년 1월19일자
우리말 불교성전 출간 1972년 11월26일자
1970년대는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우리말불교성전 창간, 중앙불교승가학원 개원 등 종단 중흥의 기틀을 닦은 시기이자 분규로 종단이 혼란했던 시기였다.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1975년 1월19일자
불국사 복원불사 회향 1973년 7월8일자

- 천년가람 불국사 복원불사 회향
불국사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불국사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73년 7월3일 복원불사가 마무리되면서부터다. 불국사 복원이 처음 논의된 것은 1969년 4월 총무원이 당시 불국사 주지였던 범행스님이 제시한 불국사 복원 5개년 계획을 확정하면서부터다. 정부도 의지를 갖고 불국사 복원을 추진하면서 탄력이 붙었고, 4년2개월 동안 공사 끝에 불국사가 다시금 위용을 갖추게 됐다.

당시 불교신문(1973년 7월8일자)은 복원불사 회향 현장을 생생히 보도하고 있다. ‘천년 가람 불국사 복원불사 회향’ 기사는 “신라 천년의 대가람 경주 불국사가 그 옛날의 고풍어린 모습을 되찾았다……착공 4년2개월 만에 준공을 보아 7월3일 오전10시45분 역사적 회향식을 가진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이와 함께 불국사 전경사진과 공사일지, 복원불사 회향을 다룬 불교만평 등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1975년 1월15일 오전10시 이원경 문공부장관이 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제정한다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불교계 숙원이 이뤄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불교신문 역시 ‘천만불자의 숙원 4‧8공휴일 마침내 제정’(1975년 1월19일자) 기사와 종단에서 발표한 ‘5천만 민족에게 보내는 메시지’ 전문을 소개했다. 종단은 메시지를 통해 “때 늦은 느낌이 없지않으나, 이로써 민족문화사에 새로운 계기가 이룩될 것임을 확신한다”고 평가했다.

이어 불교신문은 계속해서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의 의미를 담은 보도에 앞장섰다. 1975년 1월26일자에는 ‘각계에 들어본 부처님오신날 공휴제정 소감’이 실렸고, ‘부처님오신날 공휴제정 숙원의 성취전말’을 주제로 1975년 2월부터 5월까지 12회에 걸쳐 연재를 게재했다. 당시 공휴일 제정에 앞장섰던 용태영 변호사는 “이나라의 주인된 종교의 지위를 다시 찾은 역사적 조치”라고 평가했다.

- 종무행정 종정 중심체제 확립
1975년 12월1일부터 4일까지 열린 제42회 정기 중앙종회에서 종정 예하 중심으로 종단 운영을 골자로 한 종헌 개정이 이뤄지면서 종무행정 종정 중심 체제가 확립됐다. 당시 종헌 개정으로 총무원장은 종정의 지명으로 종회에서 동의를 얻도록 했으며, 각 부장은 총무원장의 제청으로 종정이 임명토록 했다. 종정에게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종헌 개정이 이뤄졌다.

당시 불교신문(1975년 12월7일자)은 ‘제42회 중앙종회 종무행정 종정 중심 체제로 종헌 개정’ 기사를 통해 종헌 개정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며 이를 ‘한국불교사에 새 장 마련’으로 평가했다. 또 “미비된 점이 많은 현행 종헌을 개정하여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종단 중흥을 도모하고자 한다”는 종정 서옹스님의 종회 교시 전문을 게재했으며, 사설에서도 “우리종단이 종정중심체제를 완비하였다고 보겠다”고 종헌개정의 의미를 평가했다.

- 조계사‧개운사 분규
종무행정이 종정 중심체제로 개편되고 중앙집권체제가 공고해졌지만 종정 측과 중앙종회 측의 갈등이 서서히 심화되기 시작했다. 양측의 대립 끝에 종정 서옹스님은 종령 37호를 발표해 종회를 해산했다. 당시 불교신문(1977년 11월20일자)은 ‘중앙종회 해산조치의 배경’ 해설기사를 통해 종회가 ‘화합파괴…종단위신 실추’시켜 ‘부득이한 조치’였다고 평가했다.

이후 종회는 1978년 3월 개운사에 총무원 간판을 내걸었고, 종정 측은 같은 해 4월 총무원장 서리에 혜정스님을 임명하며 조계사와 개운사에 각각 총무원이 들어 선 이른바 ‘조계사-개운사 분규’가 본격화됐다. 이후 수습을 위해 나선 원로 스님들이 권한을 위임받아 중앙종회를 구성하고 종정에 고암스님, 총무원장에 월하스님 등을 선출했다. 하지만 갈등 봉합은 쉽지 않았고, 결국 1980년 3월30일 서울 적조사에서 양측이 만나 극적으로 합의할 때까지 2년7개월간 이어졌다.

- 중앙불교승가학원 개원
전통과 현대가 조화된 승가교육의 장인 중앙불교승가학원(중앙승가대 전신)이 1979년 4월14일 서울 돈암동 보현사에 문을 열었다. 종단 출범 이후 3대 주요 사업의 하나로 강조해 온 도제양성의 결실이었다. 불교신문 역시 중앙불교승가학원 개원에 큰 기대감을 나타냈다.

당시 보도된 ‘도제 양성에 새바람’ 기사(1979년 4월1일자)는 “중앙불교승가학원 개원 소식이 알려지자 벌써부터 많은 지원자가 나타나 교계의 고무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중앙불교승가학원 개원은 도제양성사업이 부진한 불교계에서는 모처럼의 쾌사로 풀이되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 개원식 기사(1979년 4월22일자)를 통해 연수부 42명, 교양부 18명, 청강생 등 60여 명이 입학했음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초대원장 성우스님은 “교육사업의 시급함을 절감 오늘 승가학원을 개원케 됐다”며 학인들의 정진을 당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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