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 백성욱연구원 주최 월례강좌
“만해와 백성욱은 사제(師弟)관계서 동지적(同志的) 관계로 발전”​​​

백성욱연구원은 지난 4월부터 매달 한차례 백성욱 박사의 삶과 철학을 대주제로 월례강좌를 열고 있다. 4번째 강연자로 나선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지난 726일 조계종 전법회관에서 백성욱과 만해 한용운, 그 인연의 역사를 주제로 강의했다. 김 교수는 “3·1운동 이전에 만해와 백성욱을 비롯한 중앙학림의 학인들은 사제(師弟)관계에서 출발해 동지적(同志的)으로 연결돼 있었다면서 추후에는 8·15 해방 이후 백성욱의 고뇌, 지성, 행적 등에 대한 폭 넓은 탐구를 비롯해 더욱 다각적인 측면에서 백성욱에 대한 연구가 나오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백성욱연구원의 월례강좌 4번째 강사로 나선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가 지난 7월26일 ‘백성욱과 만해 한용운, 그 인연의 역사’를 주제로 강의했다.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중앙학림에서의 인연

근현대 한국불교에는 불교 중흥과 발전, 불교 근대화, 독립운동, 후학 양성 등의 역사적 사명을 적극 실천하면서 수행 공동체를 이끈 선지식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일부의 고승과 선지식은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백성욱(1897~1981) 박사는 승려, 독립운동가, 정치가, 불교사상가, 교육자 등 다양한 행보를 보였지만 아직까지는 객관적인 분석 및 평가를 받지 못한 인물이다. 특히 이번 강연에서는 백성욱 박사와 만해 한용운스님과의 인연을 다루려고 한다.

서울 출신인 백성욱은 14세 때 서울 봉국사에서 출가했다. 1917년 중앙학림(동국대 전신)에 입학한 그는 그곳에서 만해를 만났을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만해는 범어사 포교당(서울 인사동 소재)에 머물다가 1918년 서울 계동에 있는 단독 주택을 얻어 혼자 머물렀다. 그 곳을 계몽 잡지인 <유심>을 펴내는 출판사로 삼았다.

1910년대 중반, 만해는 불교 대중화 활동을 하면서 범어사 포교당을 주된 거처로 삼았다. 그 무렵 만해는 중앙학림의 교수는 아니었지만 자주 왕래했다. 만해가 3·1운동으로 일제에 피체돼 취조를 받을 때, 만해는 중앙학림과 공식적인 관련이 없다고 답한다. 그런데 만해와 중앙학림과의 연고가 많은 것으로 전해졌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만해와 중앙학림에 재학중인 학인 스님간의 친밀성을 말해준다. 우선 만해의 거처인 계동과 중앙학림이 당시 있던 곳(명륜동 1)은 지근거리였다. 그래서 만해는 중앙학림에 특강을 하거나 수업식 참관을 명분으로 자주 출입했을 것이다.

요컨대 이런 배경에서 학인들과는 많은 교류가 있었다. 중앙학림 학인으로 3·1운동에 동참했다 일제에 피체된 박상전(송광사)과 오택언(통도사)의 신문 기록을 통해서도 만해와 중앙학림간의 인연을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3·1운동 이전에 만해와 중앙학림의 학인들은 사제(師弟)관계에서 출발해 동지적(同志的)으로 연결돼 있었다.

현전하는 백성욱 관련 기록에서 3·1운동 이전 만해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전하는 기록이나 증언은 없다. 그러나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백성욱은 범어사 포교당, 유심사, 중앙학림에서 인연을 맺었을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최일선에 서다

3·1운동을 비밀리에 준비하던 만해는 1919228일 밤 12시 무렵 그의 처소인 유심사에서 중앙학림 백성욱을 비롯해 학인 10여 명을 만났다. 백성욱 회고에는 그 당시 만해의 동향, 백성욱의 감동 및 활동이 잘 나와 있다. 요컨대 백성욱은 만해의 앞장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라는 당부를 받고 그 실천에 나섰던 것이다. 그때 백성욱은 만해의 당부를 들은 동지들과 함께 3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의 독립선언식,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백성욱은 김법린의 회고에 의하면 중앙에서 불교계 3·1운동을 총괄하는 조직체의 참모로 추대됐다. 그는 중앙에서 불교 3·1운동을 진두지휘하다가 한달 뒤인 19194월 초순, 중국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한 뒤 상해와 국내를 오가면서 임시정부를 배경으로 독립운동의 최일선에 서게 됐다. 다양한 독립운동을 수행하면서 임정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기자로도 활동했다.

이처럼 백성욱은 만해의 지도를 받아 3·1운동, 임시정부와 국내 불교계를 연결하는 독립운동의 최일선에서 활약했다. 상해에서는 이종욱, 신상완과 함께 의용승군 조직 및 승려 독립선언서 배포 등의 불교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서산·사명의 후예로서 독립완성에 분투하라는 만해의 메시지를 실천했던 것이다.

백성욱은 일제로부터 체포될 것을 피하고 공부도 더 하기 위해 1920115일 상해에서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독일 남부에 있는 뷔르츠부르크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192599일 귀국했다.

유학 후 불교청년운동 앞장서

귀국한 백성욱은 휴식을 취한 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28년부터는 불교사 기자로 근무하면서 중앙불전의 교수로 강의를 맡았다. 그가 귀국 후에 중점을 둔 것은 불교청년운동의 재기였다. 1928317~19일 조선불교청년대회를 통해 새로운 조선불교청년회 집행부가 출범됐는데 백성욱은 서무부 전무로 추대됐다. 서무부 전무간사는 청년회를 실질적으로 이끈 핵심 인물이라는 점에서 백성욱은 불교청년회 재기의 주역이었다. 그때 만해는 불교청년운동의 노선 및 의의에 대한 소신을 <불교> 지면에 불교청년총동맹에 대하야’ ‘불교청년운동에 대하야등으로 기고했다. 백성욱의 이같은 활동이 만해와의 교감 속에 추진됐다고 보고 있다.

백성욱을 비롯한 청년 승려들은 점차 교단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찰의 대표 107명이 참가한 가운데 192913~5일 각황사에서 승려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는 한국불교 운영의 틀인 종헌이 제정되고, 종헌에 근거해 종회와 교무원이 출범했다.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인 7인의 고승을 교정(敎正)으로 추대했다. 그때 만해는 종헌체제의 의의를 비중이 있게 평가했으며 바로 그 체제 성립의 핵심 주역이 백성욱이었다. 그때 백성욱은 강대련, 도진호와 함께 일제 당국(조선총독부 학무국)에 가서 대회의 내용을 설명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백성욱과 만해의 동지적 결합을 거듭해 확인할 수 있다.

백성욱은 1930년 초 금강산으로 입산해 10년간 수행의 길을 떠났다. 이는 불교사상가, 수행가 백성욱이 된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10년간 수행 길 떠나

백성욱은 지방 여행을 통해 자신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1929년 가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100일 기도를 단행했다. 그간의 격변의 10년의 생활을 반성하고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함이었다. 백성욱이 금강산으로 입산한 직후 중앙불전에는 내분이 일어났다. 학인들이 백성욱에 이어 만해까지 교장으로 추천했지만 둘 다 성사되지는 못했다.

일제 당국은 독립운동을 했던 백성욱이 금강산에 들어오고, 많은 사람들이 백성욱의 거처로 몰려들자 긴장했다. 그래서 백성욱은 1938년 일제의 외압으로 금강산에서의 수행공동체를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8·15 해방까지 서울 돈암동에서 은둔, 칩거하면서 생활했다. 이곳에서도 소수의 인물들이 함께 수행하려고 모여들었다고 한다.

일제와 정신적인 항쟁을 하다가 1944년에 입적한 만해와 백성욱과의 일제 말기의 인연은 전하는 것이 없어 알 수 없다. 현전하는 기록에 만해가 입적한 1944629일과 그 직후의 영결식에 참석한 인물에 백성욱은 나오지 않는다. 만해를 따르던 김관호가 기억의 착오로 기록에서 누락한 것이 아닌가 한다.

만해계승사업과 백성욱

8·15해방 이후 백성욱과 만해와의 관련성은 뚜렷하게 찾아지지 않는다. 그 관련 내용은 만해 한용운 전집 발간, 비석 건립, 묘지 이전 등의 만해 계승사업을 말한다.

왜 백성욱은 만해 기념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는가? 이는 연구 촉진, 증언 유도를 위한 추측성의 설명이다. 첫째는 백성욱 자신의 문제이었다. 즉 그는 건국운동, 동국대 발전 헌신, 소사에서의 은둔 등으로 인해 만해 기념사업에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다. 둘째는 만해 사업을 추진하는 주체와의 이질성, 불편성을 거론할 수 있다. 박광, 최범술, 조지훈과의 현실관, 정치관, 불교관, 종단관이 달랐음을 추론할 수 있다.

백성욱과 유사한 행보를 간 것으로 보이는 김법린도 만해 전집 출간에 관여하지 않은 것도 고려할 측면이다. 김법린은 1930년대 초반 대처승이 됐고 해방 이후에는 국회의원, 장관, 서울신문사 사장, 동국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는 비구 승단 옹호의 입장을 표명했다. 백성욱도 장관, 광업진흥공사 사장, 동국대 동창회장, 부통령 입후보, 동국대 총장 및 이사장 등의 행적을 남겼다. 추후에 김법린과 백성욱의 비교 연구도 흥미로운 주제일 것이다.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지금껏 백성욱과 만해의 인연의 비사와 그에 담긴 의의에 대해 살펴봤다. 추후에는 8·15 해방 이후 백성욱의 고뇌, 지성, 행적 등에 대한 폭 넓은 탐구를 비롯해 더욱 다각적인 측면에서 백성욱에 대한 연구가 나오길 기대한다.
 

김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는 불자들.

김광식 교수는…
한국근현대불교사 전문가인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건국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원, 부천대 교수, 만해마을 연구실장, 대각사상연구원 연구부장, 조계종 불교사 연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동국대 특임교수로 활발한 연구 및 저술,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 근대불교사연구> <한국 현대불교사연구> <한용운 평전> <우리가 만난 한용운> <민족불교의 이상과 현실> 등 근·현대 불교 관련 저서 30여 권을 펴냈다. 불교평론 학술상과 유심작품상(학술부문), 선리연구원 학술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리=박인탁 기자 parkintak@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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