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갈등 최악일 때 불교는 다리가 되었다”

총무원장 스님 국가 문제에
불교계도 적극 역할 약속해
홍파스님 단장 불교특사단
9월초 일본 불교계와 만나
임란 때 사명대사 役 기대

지난 7월 문재인 대통령 초청 청와대 오찬에서 총무원장 원행스님은 한일 양국 갈등 해소를 위해 불교계도 적극 나서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총무원장 스님의 모습. 사진=연합
지난 7월 문재인 대통령 초청 청와대 오찬에서 총무원장 원행스님은 한일 양국 갈등 해소를 위해 불교계도 적극 나서겠다고 밝혔다. 사진은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총무원장 스님의 모습. 사진=연합

지난 7월26일 총무원장 원행스님을 비롯한 조계종 스님들과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소속 각 종단 대표자들은 문재인 대통령 초대를 받아 청와대에서 오찬을 했다. 당시는 일본의 경제 보복이 막 시작되던 때였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국정 주요 현안에 대해 설명하고 국민 통합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불교계의 지지를 당부했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은 대통령의 요청에 화답하며 일본불교에 교류단을 파견하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더불어 8월1일부터 전국 1만여 사찰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한 100일 기도를 봉행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이 자리에서는 한일 불교계 특사단을 이끌 단장도 거론됐다. 총무원장 원행스님은 “홍파스님을 단장으로 일본에 대표단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일본 수출규제 관련 일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하소연

관음종 총무원장인 홍파스님은 각 종단 대표자들이 모여 한국불교 발전과 현안을 논의하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사무총장을 30여 년 지냈으며 한일불교문화교류협의회 이사장이기도 하다. 종단협 사무총장을 오랫동안 역임하여 조계종을 비롯한 한국불교 사정에 밝고 일본불교계와도 친숙하다. 이러한 점이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이 불교계 특사단장으로 홍파스님을 선임한 이유다. 

불교특사단은 조계종 사회부장, 종단협 사무총장 등 4명의 스님으로 구성할 전망이다. 오는 9월 초 일본불교를 방문할 것으로 전해졌다. 파트너 격인 일본 불교계 인사로는 일한불교문화교류협의회 회장 후지타 류죠 스님과 부회장 시바타 테츠켄 스님이 거론된다. 

불교 통해 한일문제 해결 기대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대목은 정토종과의 만남이다. 일본은 다양한 종파가 난립하지만 그 중에서도 천태종계열과 정토종 계열이 강하다. 특사단은 정토종 본종인 교토의 콘카이코묘지(金戒光明寺)를 방문할 예정이다. 이 사찰은 정토종 교조 호넨(法然)이 창건한 정토종 대본산이다. 

또 한 곳은 도쿄 시내에 있는 죠죠지(增上寺)다. 아베 신조 총리가 이 절 후원 모임 ‘정광회’ 공동대표로 알려져 있다. 이 절에는 중국 송나라 원나라 고려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다. 이를 죠죠지 중요문화재 삼대장경(三大藏經)이라고 한다. 일본의 신수대장경의 기초가 된 대장경이다. 고려 대장경은 조선 세종 당시 일본의 간곡한 청에 의해 넘겨준 판본이다. 한국과 중국 불교의 정수(精髓)가 이 사찰에 봉안된 셈이다. 

일본 정토종은 정토종 개종 850년이 되는 오는 2024년까지 죠죠지(增上寺)가 소장한 중요 문화재 삼대장경을 화상으로 디지털화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그렇게 되면 각 나라가 소장한 판본의 다른 점 틀린 부분 등이 모두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의 불교계와 학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처럼 불교는 동북아 삼국을 잇는 가장 중요한 매개다. 한국불교가 파견하는 특사단에 기대를 거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양국간 불교 역사와 문화 때문이다. 총무원장 원행스님이 홍파스님을 단장으로 불교특사단을 대통령 앞에서 거론한 것도 양국 불교가 오랫동안 교류하여 상호 신뢰가 쌓인데다 정치적 영향력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한일 양국이 가장 격렬하게 대립할 때 중재 역할을 한 오랜 경험을 갖고 있다. 그 대표적 활동이 임진 정유 재란 전쟁 후속 처리 역할을 맡은 사명대사의 강화사(講和使) 활동이다. 사명대사는 임진 정유재란 7년 전쟁 끝에 화친을 맺은 가장 뛰어난 외교가였다. 

1592년 일본의 침략으로 시작된 임진왜란과 뒤이은 정유재란은 1598년 11월26일 일본군이 전면 철수하면서 막을 내린다. 그러나 일본과 정전협정을 맺은 주체는 조선이 아니라 명(明)이었다.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 당사자가 한국이 아닌 미국이었던 것처럼 조선은 피해국이면서 뒤로 밀려나 있었다. 대일본 민심도 최악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가장 가까운 두 나라가 적대국으로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명나라는 이미 일본과 협상을 통해 포로를 돌려받고 협정을 끝낸 상태였다. 조선 역시 일본에 피해 배상을 요구하고 포로 송환을 요구하고 싶었지만 명나라의 수수방관과 국내 여론 때문에 강화(講和)는 엄두도 못 내는 상태였다. 일본도 내심 평화를 원했다. 전쟁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그의 정적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잡아 양국 국교 정상화 분위기는 충분히 무르 익었다. 

문제는 조선의 분위기였다. 먼저 나서서 화해하자고 손을 내밀었다가는 조선 왕실의 안위도 보장할 수 없었다. 일본과 대화에 나선다 해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거나 패퇴한 줄 알았던 히데요시 세력이 다시 살아나면 그 또한 문제였다. 그래서 정부 차원에서 교섭을 하기 전에 일본의 정황을 파악하고 교섭 가능 여부를 파악할 분위기 조성이 필요했다.

그 적임자로 채택된 인물이 사명대사였다. 억불숭유 정책으로 수도 서울에 발도 못 딛는 천민 신세였지만 스님들은 양 전쟁 이후 승병의 공을 인정 받아 위상이 전보다 달라졌다. 특히 서산 사명 등 승병장들은 문정왕후에 의해 일시 부활한 승가고시 출신으로 유학을 겸비한 엘리트였다. 

스님을 강화사로 선임한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이 불교국가라는 점이었다. 중국에서 유래한 학문과 종교를 조선을 통해 받아들이는 일본은 조선의 선진 불교를 배우고 싶어했다. 

임진왜란 전후로 의정부 육조를 대신해 국정을 총괄했던 비변사는 사명대사를 강화사로 선출한 이유를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 일본 내 우호적 평가다. 사명당은 여러 차례 울산 왜성에 진을 치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만나 담화를 나눴는데 그 때 왜군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임해 일본인들이 사명을 매우 좋게 평하고 있었다.

잡혀갔다 돌아온 조선인들이 “왜인들이 대사의 이름을 모두 알며 칭송하였다”고 전했다. 두번째 휴정 서산대사가 유정을 추천했다. 세 번째 만약 사명당이 일본으로 가게 되면 같은 불교라서 고승으로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이처럼 불교는 양국 관계가 최악일 때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매개였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사명당을 공식 사절단으로 임명하지 않았다. 조선은 사명당 일행을 ‘국서(國書)도 소지하지 않은 일개 승려’로 칭했다. 만약 일이 틀어지면 혼자 일을 꾸미다 죽음을 당한 개인적 일로 치부하고 운이 좋아 성공을 하면 모두 조정이 협상을 잘한, ‘못되면 불교 탓 잘되면 왕실 공’으로 삼으려 했다. 그래서 이들의 공식 명칭이 탐적사(探賊使)였다. 적진을 정탐하는 임무를 띤 간첩과 같은 소임을 부여한 것이다. 당시 조선 조정은 가장 천대하던 불교를 국가적 대사를 맡기면서도 피 한방울 흘리지 않으려했음을 알 수있다. 

비겁하고 옹졸했던 조선 조정

조선 조정과 왕의 속내가 어떠하든 사명대사는 조선 포로를 구하고 양국의 우호 친선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기대를 뛰어넘는 대성공을 거두고 두 나라가 향후 300년간 평화롭게 지내게 되는 기초를 다졌다. 스승인 서산대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 오대산에서 묘향산을 가던 사명당 유정은 조정에서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발을 돌려 대마도로 향했다.

이후 일본 본토로 간 사명당은 일본 최고 지도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 막료들과 일본 고승들을 만나 포로 송환을 요구하여 이를 관철시킨다. 더불어 조선의 선진 불교를 전파하고 많은 일본승려와 지식인 관료들을 제자로 삼았다. 이를 두고 조선의 유가(儒家) 조차 “조정에 세 정승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나라의 안위는 모두 한 승려의 돌아옴에 달렸다”고 했다.<연려실기술> 

사명당은 임진왜란 후 최초로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이며 막부 최고 권력자를 직접 만난 유일한 인물이었다. 일본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사람 중 3분의1을 사명당이 데려왔으며 대사의 활약으로 조선과 일본은 향후 300여년 간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조선은 대사의 이러한 공적을 공식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한일국교 정상화에도 도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에도 불교는 일정 역할을 했다. 1965년 한일협정을 맺어 정식으로 국교교류하기 전부터 한일 불교는 교류를 이어왔다. 일본과 국교가 열리지 않았던 1952년에도 한국불교계는 일본 도쿄 본원사(本願寺)에서 열린 제2차 세계불교도대회에 참가했다. 한일국교 수립 6개월 전 숭산스님은 동국대 건물공사 중 나온 일본인 유골 4000여구를 화계사 명부전에 모셨다가 한일 국교가 정식 수립되자 이를 일본 측에 인도했다. 이 사실이 일본 요미우리 등 언론에 대서특필 되면서 양국 간 우호 증진에 크게 기여하고 한국불교에 대한 일본 내 분위기도 좋아졌다. 

일본 불교계가 일본의 만행으로 인해 희생당한 조선인 영령을 위로하는 위령재를 지내고 과거사 참회에 앞장서는 것은 모두 한국불교계와의 교류 덕분이다. 한일 불교계는 1977년 결성된 한일불교교류협의회를 통해 오랫동안 교류하며 신뢰를 형성해왔다. 

이번 총무원장 원행스님의 특사단 파견은 이러한 역사와 문화 속에서 나왔다. 그러나 사명대사와 같은 성과를 거두리라는 보장은 없다. 최고 권력자가 결심하면 이뤄지던 봉건 사회와 달리 아베가 불교신자라고 해서 독단적으로 정책을 뒤집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중일 동북아 삼국의 문화와 정서를 잇는 불교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한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홍파스님도 언론과 인터뷰에서 “다른 종교보다도 불교가 양국에 관심을 많이 갖고 교류해 왔기 때문에 일본 불교계 지도자와 서로 공감대를 갖고 대화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불교신문3513호/2019년8월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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