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산사 법당에 매달려
바람 속에 흔들리는 풍경소리
현대인들 고요 안식 가져다줘

젊은날 방황에 함께 했던 풍경
삶의 나침반이자 추억으로 남아

백학기

“먼 데서 바람이 불어와 풍경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대중들 사랑을 받는 정호승 시인의 ‘풍경 달다’란 시다. 이 시를 읊조리기 가장 좋은 장소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풍경이 매달린 고즈넉한 산사 절 마당 아래다. 한여름 땡볕과 무더위 속에 풍경소리를 마음에 담아 시를 떠올리면 몸과 마음이 시원해진다.

산사(山寺)의 풍경만큼 현대인들의 마음에 고요와 안식을 주는 소리가 있을까. 산사나 암자 법당 처마 아래서 듣는 풍경소리는 우리들 의식과 내면을 추억이나 영원의 한 곳으로 떠민다.

오래 전 일이다. 그해 여름 뜨거운 염천의 한낮을 걷고 또 걸어 찾아간 곳은 바다가 보이는 소나무 숲 속의 절이었다. 크고 넓은 논길과 들녘을 걸어 파도소리가 들리는 그 절에 이르렀을 때 “아 이곳에서 잠시 마음을 내려놓아야겠다”고 작정한 데에는 파도소리가 귓전으로 들려오면서 간간이 풍경소리가 마음의 정수리를 때렸기 때문이다.

한낮을 내내 방에서 책을 읽고 초저녁에는 마당으로 내려가 석탑을 바라보고, 한밤중에 또 책 읽고 새벽에 별빛을 바라보며 석계단을 내려가 갯길을 걸었다. 한밤중에 깨어나 별빛을 바라보고 아침 바다 파도소리에 뒤척이며 깨어날 때도 풍경소리가 은은히 배어났다. 

내 인생의 잊지 못할 추억의 한 페이지 속에 이처럼 풍경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한 달여 기간을 보내고 돌아올 때쯤 만행을 떠나는 스님과 만나 남녘의 길을 그림자처럼 다시 한번 떠돌았다. 그 스님은 불경(佛經)을 원어로 독해하는 큰 뜻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한자어로 번역된 불경이 아닌 자신의 의식과 언어로 불경을 번역하려는 의지와 집념을 실현하기 위해 인도로 갈 계획이었다. 스님과의 만행은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칫 기행(奇行)처럼 보였겠지만, 걷고 또 걸으면서 이 세상의 사소한 풀 한 포기와 돌멩이조차 인연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중요한 계기가 됐다. 

해질녘 걷다가 절에 들지 못하는 어두운 밤중이면 저수지 제방을 가로지른 수문 위 한 뼘 모서리에서 밤을 샌 적이 있는가 하면, 불 꺼진 시장 바닥 비릿한 냄새가 밴 평상 위에서 모로 누운 채 잠을 청하기도 했다. 이름 없는 암자에서 수도승이 내준 방에서 난 하룻밤은 큰 행운이었다.

그렇게 스님과 다닌 만행과 인연의 시간들 속에서 삶과 풍경의 자연(自然)한 이치를 깨닫기도 했다. 먼 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큰 사찰에 머물거나, 한밤 중 헤매듯 깊은 산속을 부엉이 울음 우는 암자를 찾아 헤맬 때 언제나 풍경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그 풍경소리는 삶의 나침반이고 수행도량이었으며, 인연의 큰 계곡을 건너가는 바람이었다.

이제 그 풍경소리는 마음속에 추억으로 남아 오늘도 바람결에 들려온다. 누구나 한때 헤매고, 방황하는 삶의 순간들과 갈피 속에서 운명의 순간을 체험하는 날들이 있다. 그런 운명의 날들은 때마침 처해진 삶의 물상 들 속에 순연히 만나는 풍경소리 같은 것일 게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소리가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도시의 복잡한 일상 속에서 풍경소리를 깨닫고 삶과 인연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절들이 그리워진다.

[불교신문3512호/2019년8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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