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空 뛰어넘은 치열한 수행·배움이 가슴뛰게 만든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보드가야의 보리수 앞에서 예경을 올리는 순례자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보드가야의 보리수 앞에서 예경을 올리는 순례자들.

진리의 불 꺼지지 않는 곳 

옅은 어둠이 깔리면서, 보드가야 곳곳에 자리한 감실 속 부처님과 선정에 든 스님들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인도가 낳은 위대한 성인이 깨달음을 이루어 불교가 시작된 곳, 경전으로만 접하던 그곳에서 끊임없이 오체투지를 하는 스님, 1인용 텐트에 불을 밝히고 밤을 새는 스님, 보리수를 향해 경을 읽거나 명상에 잠긴 스님들을 만났다. 

피부색과 가사색이 다른 여러 나라의 스님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수행하는 종교공동체의 경이로운 축제가 펼쳐지면서, 보드가야는 세계 불자들이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예경으로 한마음이 되는 불교최대의 성지임을 절감하였다. 마하보디대탑 정면 감실에 모신 작은 불상의 머리 위에는 흰 비둘기가 제 자리인 양 앉아 떠날 줄 모르고, 부처님의 나라에서 어김없이 자유로운 개들이 수행자와 뜻을 함께한다는 듯 그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다녔다. 나 또한 ‘하루만이라도 홀로 남아 이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도록 만드는 곳이었다. 

대탑 안은 금강좌에 모셔놓은 부처님을 친견하려는 이들의 구도열기가 뜨겁고, 황금색 새 가사를 입혀드리는 의식을 함께한 순례자들은 환희로운 마음으로 탑을 돌았다. 부처님이 선정에 들어 깨달음을 이룬 보리수 담벽에 머리를 대어 기도하는가하면, 작은 기둥마다 흰 천을 묶고 꽃을 걸어 저마다의 소망을 담았다. 여러 나라의 신비로운 염불소리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참선과 독경, 요잡과 오체투지 등으로 정동(靜動)이 함께하는 신행이 하루도 멈춤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정각을 이룬 부처님은 예전의 도반이었던 다섯 수행자를 만나기 위해 바라나시의 녹야원까지 240km에 달하는 거리를 열나흘 동안 걸어가 가르침을 설하기에 이른다. 그 발길이 있었기에 법륜(法輪)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가르침을 따르려는 수많은 이들이 다시 바라나시를 거쳐 보드가야로 찾아들고 있다. 위대한 선각자의 숨결을 느끼며 저마다의 가슴으로 부처님과 만나는 순례자들과 함께, 보드가야는 법륜상전(法輪常轉)의 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곳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란다대학 유적지의 승방(僧房) 구역.
나란다대학 유적지의 승방(僧房) 구역.

구법의 순례자들

“나란다 대학에는 늘 1만 명이 넘는 승려가 상주하며 대승과 소승의 논저를 공부했다. 매일 100여 곳에서 강좌가 열리고, 학승들은 촌음을 아껴 깊은 이치를 배우고 토론하는 데 온종일을 소비했다. 삼장(三藏)의 깊은 이치를 말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이를 부끄럽게 여겼고, 나란다에 유학한다는 이름만 내걸어도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7세기에 인도를 순례한 당나라 현장스님은, 인도 땅에서 대승불교를 꽃 피웠던 나란다 대학의 학풍과 위상을 <대당서역기>에 이처럼 기록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보드가야 북동쪽에 있는 나란다 대학에서 면면이 이어졌고, 이곳에서 중국ㆍ신라ㆍ티베트ㆍ몽골과 남방 여러 나라의 학승들이 구도의 삶을 불태웠다. 신라의 아리나발마(阿離那跋摩) 스님은 나란다 대학에 머물며 율장과 논장을 열람하고 이를 나뭇잎종이에 끝없이 베껴 쓰면서 귀중한 초전법륜(初傳法輪)을 고국으로 옮겨오고자 했다.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스님은 70여 세에 그곳에서 입적했으나, 혜업(惠業)ㆍ현태(玄泰)ㆍ현각(玄恪) 스님과 기록에 남지 않은 수많은 신라의 스님들이 그 뒤를 이었다. 

“천축은 하늘 끝이라 만산은 첩첩이 이어졌는데 애달픈 순례자들이여, 힘을 다해 오르고 또 오르네. 저 달은 몇 차례나 외로운 배를 떠나보냈는지 한 사람도 구름 따라 돌아오는 이 보지 못했네.” 

현장스님에 이어 인도를 순례한 의정스님의 읊조림처럼, 신라의 구법승들은 불법을 따라 인도를 찾았지만 아무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역만리 순례 길은 떠나기도 힘들지만, 타국생활에 지친 심신을 이끌고 무사히 돌아오기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바둑판처럼 정돈된 이곳 유적지를 찾아 승방(僧房) 구역에 들어서면, 가운데 공터를 중심으로 작은 승방들이 줄지어 둘러싼 초석들을 만나게 된다. 공터 가운데서 강의하는 스승과 경청하는 학인들의 진지한 모습이 그려진다. 작은 승방마다 벽돌을 쌓아 만든 침실이 있고, 그 위의 작은 감실엔 부처님을 모셨으리라. 그 옛날 ‘위로는 나는 새도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도 없는 사하(沙河)’를 지나 천축에 도달한 수행자들이 목숨 걸고 공부했던 장소에 서면, 시공을 뛰어넘은 치열한 수행과 배움이 우리에게 이어진 듯 가슴을 뛰게 만든다. 
 

부처님 열반상에 올릴 새 가사를 이운하는 모습.
부처님 열반상에 올릴 새 가사를 이운하는 모습.

최초의 공양, 최상의 공양

수자타의 우유죽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받은 마지막 공양이었다. 6년 고행으로 쓰러진 싯다르타가 한 그릇의 죽을 정각 성취의 기력으로 삼았으니 그 공덕은 헤아릴 길이 없다. 이에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수자타 마을은 소중한 성지가 되었고, 그녀가 부처님께 공양 올린 곳을 기념하고자 세운 탑은 발굴되지 않은 채 유적으로 남아있다. 근처에 있는 ‘수자타 템플’은 힌두교도들이 야외에 수자타가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조각상을 조성해 놓은 곳이지만, 순례자들을 상관하지 않고 그 앞에서 지극한 기도를 올릴 따름이다. 

꿀에 갠 미숫가루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뒤에 받은 첫 공양이었다. 보리수 아래서 정각을 성취한 부처님은 7일마다 자리를 옮기며 법의 즐거움을 누렸고, 마지막 7주에 라자야따나 나무 아래로 자리를 옮겼을 때 지나가던 상인형제가 올린 공양물이다. 부처님은 이를 받을 그릇이 없어 사양하자, 좌우에서 옹호하던 사천왕이 사방으로 흩어져 돌발우를 하나씩 가져와 바쳤다. 부처님은 4개의 발우에 손을 얹어 하나로 합친 뒤 공양을 받으니, 이는 불교사에 처음 등장하는 발우공양이자 최초의 탁발을 상징한다. 

정각을 이루기 전후의 고귀한 공양을 떠올리면서, 한편으로 ‘최상의 공양이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새겨본다. <금강경>에도 재보시보다 법보시의 수승함을 강조했듯 진정한 공양은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하여 고(苦)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인도에 가면 누구나 거리에서 파는 국민차 ‘짜이’를 마신다. 홍차에 우유와 당을 넣고 끓여 달달한 맛이 나는 차이다. 해인사 지족암의 일타스님은 ‘붓다와 뭇다’ 이야기를 짜이에 견주어 들려주곤 하였다. 인도사람들이 전통방식으로 짜이를 만들 때면 양손에 잔을 들고 뜨거운 물을 이쪽저쪽으로 폭포처럼 쏟아지도록 서너 번 부어서 원당의 덩어리를 녹이게 된다. 그렇게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멋진 차를 만들어내면 그들은 ‘붓다 헤이!’라며 엄지를 치켜 올리고, 어쩌다 손에 뜨거운 물이 튀어 컵을 깨뜨리면 ‘뭇다 헤~’라 하며 놀린다는 것이다. 

붓다와 뭇다는 이처럼 인도사람들이 일상에서 즐겨 쓰는 말이다. ‘뭇다’는 꿈에서 떨 깬 바보를 뜻하고, ‘붓다’는 꿈에서 깨어나 온전히 자유로운 도인을 뜻한다. 부처님의 말씀처럼, 스스로 닦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재보시로 공덕만 얻으려는 ‘뭇다’가 되어선 아니 되지 않겠는가. 
 

쉬라바스티 사위성에서 만난 동자승. 그림=구미래
쉬라바스티 사위성에서 만난 동자승. 그림=구미래

열반의 가르침 

쿠시나가라의 열반당에서 한 손으로 얼굴을 살짝 받친 채 오른쪽으로 누워있는 열반상을 친견했다. 평안하고 성스러운 얼굴과 두 발만 내놓고 황금빛 가사로 몸을 덮어둔 모습이었다. 각국에서 모여든 불자들은 열반상을 둘러싸고 하염없이 절과 기도를 올렸고, 멀리서부터 수십 명의 스님과 불자들이 부처님의 새 가사를 이운해오는 의식이 이어졌다. 

부처님은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면서, 왕사성의 영취산을 떠나 고향을 향한 열반의 길에 올랐다. 쿠시나가라에 도착한 뒤 사라쌍수(沙羅雙樹) 아래 침상을 펴고 머리를 북쪽으로 향한 채 오른쪽 옆구리를 바닥에 대고 누워, 주의 깊고 평온한 가운데 삶의 마지막을 정리했다. 슬픔에 싸인 아난을 위로하고 비구들에게 마지막 설법을 한 다음, 세 밤 동안 모든 명상단계를 순역으로 되짚어본 뒤 ‘기름이 다한 불이 꺼지듯’ 열반에 들었다. 

당시 부처님이 머리를 북쪽으로 둔 데 대해 여러 설이 전한다. 이 가운데 중생의 허망한 믿음을 부수기 위함이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쿠시나가라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머리를 북쪽으로 두어야 길상하다고 믿었는데, 살아있는 상태에서 북향함으로써 민간의 속신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이는 입멸장소와 방위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난다. 전통적으로 힌두교도들은 집에서 숨을 거두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기며 임종이 가까우면 집 입구나 거처하던 방에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도록 눕혔고, 사후에는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숲을 택하고 머리를 북쪽으로 둠으로써 이와 반대되는 것을 취하였다.

관습에 얽매여 있는 이들에게 펼친 무언의 가르침이다. 이는 후대에 불교적 임종의 바람직한 지표가 되기에 이른다. 부처님의 열반방향은 기존의 관습과 속신에 묶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뜻하지만, 대승불교와 함께 발달한 정토사상에 따라 서방극락을 향하는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안락하고 편안한 침실을 마다하고 숲속 나무 아래 누워 생을 마감한 것은 길 위에서 가르침을 펼쳤던 부처님의 일생을 상징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찰하며 궁극의 열반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불교신문3512호/2019년8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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