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오신 부처님] <21> 전쟁 속에서 피어난 극락정토 - 눌지①
[사랑으로 오신 부처님] <21> 전쟁 속에서 피어난 극락정토 - 눌지①
  • 조민기 글 견동한 삽화
  • 승인 2019.08.20 17: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번 기회에 대마도를 정벌할 생각이오”

405년 가을, 서라벌

모래사장과 멀지 않은 갯바위에 나란히 선 두 남자는 낚시를 시작했다. 아니, 시작하는 척 했다.

“제상, 미해는 잘 지내고 있을까?”

왜국으로 간 막내동생 미해를 떠올리자 눌지의 눈이 아련해졌다. 

“벌써 2년이 지났네. 올해 열두 살이 되었으니 제법 늠름해졌으려나.”

2년 전, 미해 왕자를 왜국에 남겨두고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림에 돌아왔을 때 박제상의 귀에 가장 먼저 들려온 소식은 백제가 변경을 침입했다는 것이었다. 백제가 왜국에 무려 태자를 보냈던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던 그는 할 말을 잃었다. 백제는 왜국과 오랫동안 동맹을 맺어온 나라였다. 그런데 신국이 왜국과 화친을 하자마자 변경을 침입한 것이다. 왜국에서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백제를 도왔을지도 모른다. 왜국과의 화친은 시작하자마자 실패였다. 이는 실성 마립간이 미해 왕자를 적국에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올봄에 왜국이 계림을 침략했으니 화친은 없던 일이 된 것이겠지?”

박제상은 차마 눌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마립간께서 몸소 왜군을 300이 넘게 베셨으니 말이야.”

실성은 왜병이 명활산성을 공격하자 선봉에 서서 고구려 군사들과 함께 싸웠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신국이 거둔 실로 오랜만의 승리였다. 백성들은 기뻐했으나 눌지는 홀로 왜국에 남겨진 미해의 안위가 걱정되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살아는 있겠지?”

“당연하지요. 아무리 질자라 해도 왕족은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마립간께서도 10년 만에 무사히 돌아오시지 않았습니까? 만약 미해 왕자님께 문제가 생겼다면 벌써 소식이 전해졌을 것입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마립간께서는 즉위하자마자 왜국과 화친을 서둘렀지. 그런데 화친과 동시에 백제와 왜국이 연달아 신국을 공격했어. 마립간은 용감하게 선봉에 서서 승리를 거두셨고. 백제와 왜국에 당하기만 해온 백성들이 마립간을 칭송하는 소리가 매일 태자궁까지 들려. 그런데 말이야, 제상. 나는 승리가 하나도 기쁘지 않아. 이럴거면 도대체 왜 처음부터 미해를 질자로 보내면서까지 화친을 한 거지? 이름만 태자일 뿐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마립간께서는 아류부인에게서 아들을 얻길 원하고 있어. 만약 아류부인께서 아들을 낳는다면, 태자의 자리도 내어놓게 되겠지.

“어이쿠! 놓쳤네! 대물이었는데.”

박제상은 낚싯대를 높이 흔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눌지의 귀에 속삭였다.

“태자 전하,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마립간의 눈과 귀가 어디에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자 눌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껄껄 웃으며 박제상의 어깨를 쳤다.

“하하하, 잘 되었네! 나보다 먼저 잡았다면 그대의 낚싯대를 부러뜨릴 뻔했지 말이야.”

눌지는 파도치는 갯바위에서조차 낚시하는 척 주위를 경계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펐다. 실성은 내물왕의 혈육인 조카들을 감시하는데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숙부는 10년 동안 고구려에 질자로 있었지. 숙부가 마립간에 오른 지 이제 겨우 2년이 지났는데 10년쯤 지나면 과연 복수가 끝날까? 참고 기다리다 보면 예전처럼 다시 미해와 웃으며 만날 수 있을까? 제상, 만약 답을 알면 제발 좀 가르쳐 줘.”

갯바위에 주저앉은 눌지는 결국 바다에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만약 대마도 정벌이 실패한다면 
그날로 신국의 이름은 사라지고 
왜국이나 백제 속국이 될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병사는 흉기요 
싸움은 위험한 일이라 했습니다 
무리하게 전쟁을 하는 것보다 
내실을 키우는 것이 우선입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실성의 입에서 
마침내 허락이 떨어졌다 
“서불한의 말이 참으로 옳소”

실성이 자리를 뜬 후 눌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정월보름밤, 실성은 월성 안에서 
조촐한 달구경 연회를 여는데…
 


계속되는 왜의 침략

실성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대전에 모인 신하들을 응시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저 비열한 왜국에서 또! 신국을 공격하고 민가를 약탈했소. 그뿐이오? 우리 백성 100명을 잡아가기까지 했소. 지금 저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마도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수시로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으니, 이를 물리치지 않는다면 신국은 계속 위험에 노출될 것이오.”

“마립간께서는 대마도를 공격하실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그렇소. 이번 기회에 대마도를 정벌하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오. 태자의 의견은 어떤지 듣고 싶군.”

실성은 눌지를 빤히 보며 비웃듯 한쪽 입술을 올렸다.

“왜국이 계속 화친을 무시하고 신국을 공격하니, 이는 분명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왜군이 대마도로 물러간 지금, 왜국에 사신을 보내 엄중하게 경고를 하고, 저들이 또 단순히 수적들의 짓이라 알지 못했다고 변명하면 수적 또한 왜국의 백성이니 이를 통제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눌지의 말에 대전에 모인 신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마도의 왜군이 언제 다시 민가를 약탈하고 백성들을 잡아갈지 모르는데, 한가롭게 사신을 보내잔 말이오?”

실성이 언성을 높이며 눌지와 신하들을 노려보았다.

“여태껏 그런 식으로 해온 결과가 무엇이오? 수적들의 끊임없는 약탈에 시달리는 것 아니요. 우리는 이미 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소. 승기를 잡았을 때, 왜군을 몰아내서 다시는 신국의 영토를 침략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오. 계림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마음을 가져야 마땅하건만, 태자가 유독 평화를 고집하는 이유를 모르겠소. 혹시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오?”

눌지는 고개를 저으며 허리를 굽혔다.

“당치 않으신 말씀입니다. 신국 백성들의 안위가 달린 일이니 전쟁은 신중해야 한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렇소? 그게 태자의 진심이라면 퍽 다행이군. 나는 혹 태자가 그대의 동생 미해의 안위가 걱정되어 이미 끝난 화친에 연연하는 줄 알았지.”

미해의 이름이 나오자 눌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전의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서불한이었다.

“신, 서불한 미사품이 마립간께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말해 보시오.”

“만약 대마도 정벌이 실패한다면, 그날로 신국의 이름은 사라지고 왜국이나 백제의 속국이 될 것입니다. 신이 들으니 병사는 흉기요, 싸움은 위험한 일이라 하였습니다. 하물며 넓은 바다를 건너 남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은 무리하게 전쟁을 하는 것보다 내실을 키우는 것이 우선입니다. 차라리 험한 곳에 요새를 설치하고, 적이 쳐들어오면 막아서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지요?”

“옳소, 참으로 옳은 말씀이시오.”

“서불한의 의견에 찬성이오.”

미사품이 말을 마치자마자 대전이 시끌시끌해졌다. 미사품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만약 대마도 정벌에 실패하면 남은 것은 멸망뿐이었다. 복수도 중요하지만 마립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마립간의 자리를 지켜야 복수도 할 수 있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실성의 입에서 마침내 허락이 떨어졌다. 

“서불한의 말이 참으로 옳소. 그리 합시다.”

실성이 자리를 뜬 후 눌지는 가만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412년 정월, 월성 

정월 보름날 밤, 실성은 월성 안에서 조촐한 달구경 연회를 열었다. 오랜만에 왕실 가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실성은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었고, 왕비 아류부인과 태자비 아로부인 모녀는 불안한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실성 앞에서 감정을 감추는 법을 익힌 눌지는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고 말석에는 눌지의 어머니 보반 부인과 동생 복호가 앉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숙모님”

실성이 보반 부인을 향해 과장되게 외치자 보반 부인은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이렇게 가족들끼리 함께하니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이 참 좋습니다. 제게 자식이라고는 아로 하나뿐인데 이렇게 사위 눌지와 조카 복호를 보니 든든합니다. 자, 한 잔 받으시게나. 우리 사위. 아! 조카님도 잔을 드시게.”

실성은 눌지와 복호를 향해 잔을 들었다. 순간 눌지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선왕께서도 이 모습을 보셨다면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보반 부인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일부러 선왕을 들먹인 것은 혹시라도 실성이 무슨 짓을 벌일까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형수님.”

실성은 씩 웃으며 보반 부인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형수님께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불교신문3512호/2019년8월21일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