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봉사 스님들은 항일독립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사명 만해 정남용 스님 등
민족의 스승 애국지사 배출
교육통한 인재 양성도 앞장
지금도 경내 곳곳 자취 남아

신라대 천년고찰 왕실 원당
한국전쟁 때 전소되는 아픔
한반도 평화와 더불어 번영

건봉사 전경. 능파교에서 바라본 대웅전 일대 모습이다.
건봉사 전경. 능파교에서 바라본 대웅전 일대 모습이다.

민족의 영산 금강산은 불교 성지다. 금강산(金剛山)은 <화엄경> 80화엄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의 법기(法起) 보살이 금강산에 거처하며 1만2000의 권속을 거느리고 설법한다는 내용에서 나왔다. 금강산 이름과 1만2000 봉우리가 모두 화엄경에서 나온 내용이다. 

민족의 영산 금강산을 가는 길목에 동해에서 가장 크고 우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천년고찰이 있으니 바로 건봉사(乾鳳寺)다. 분단으로 인해 남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이 막힌 것처럼 건봉사도 한 때 출입이 금지된 적이 있다. 민통선 안에 있어 건봉사는 함부로 갈 수 없는 금단의 구역이었다. 그 때문에 오랫동안 6·25 때 불탄 체로 방치되다 시피한 아픈 시절이 있었다. 

전쟁의 상흔 간직한 건봉사

지난 8일 건봉사를 찾아간 날은 동해안 일대에 폭염경보가 발동됐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오듯 쏟아질 정도로 무더운 날씨인데도 건봉사를 찾는 관광객이 적지 않았다. 날은 더웠지만 계곡을 적시는 물이 열기를 식혔다. 경내 곳곳 어디를 가든 시원한 물이 쏟아졌다. 풍부한 물 덕분에 건봉사는 수천명의 승군이 주둔하고 생활하는 기지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건봉사는 항일(抗日) 본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구의 침략에 맞서 서산대사가 승병을 일으켰을 때 그 본진이 건봉사에 주둔했다. 조선이 망하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건봉사 스님들은 기꺼이 항일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으며 학교를 지어 인재를 양성하고 포교당으로 국민들의 의식을 일깨웠다. 그 자랑스러운 역사가 지금도 건봉사 곳곳에 서려 있다. 일본의 경제 침략으로 촉발된 한일 경제전쟁, 역사 바로 세우기가 한창인 요즘 건봉사는 다시 한번 보석처럼 빛나는 가람이다.

건봉사는 520년(신라 법흥왕 7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다.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7년 전이다. 이를 두고 일부 학자들은 믿을 수 없는 기록이라고 하나 이는 단견(短見)이다. 국가 차원의 공인만 늦었을 뿐 신라에는 이미 민간에까지 불교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사찰 역시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을 것이다. 

758년 발징이 중건하였고 정신 양순 스님 등과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베풀었는데 여기에 신도 1820명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 중에서 120인은 의복을, 1700인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하는 불자들을 봉양했다. 787년에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명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서 극락 왕생한데 이어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는 우리나라 만일회의 효시로 그 전통이 오늘에까지 이른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중수한 뒤 절 서쪽에 봉황처럼 생긴 돌이 있다 하여 서봉사라 하였으며, 1358년 나옹이 중건하고 건봉사(乾鳳寺)라 했다. 이로써 건봉사는 염불과 선교를 갖춘 총림의 위상을 갖게 됐다. 1464년 세조가 행차하여 원당(願堂)으로 삼은 뒤 왕실 보호를 받는 대찰이 되었다. 

세조를 이은 성종은 효령대군, 한명회, 신숙주, 조흥수 등을 파견하여 노비, 미역밭과 염전을 하사하고 사방 십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하였다. 이러한 역사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작성한 건봉사 사적비 덕분에 알려졌다.
 

사명대사가 왜구가 훔쳐간 불치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모습.
사명대사가 왜구가 훔쳐간 불치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모습.

아도화상 창건 유구한 역사

염전권과 토지를 소유하여 넉넉한 재정을 가진 대찰 건봉사는 그 이익을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데 사용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해 나라가 바람 앞에 놓인 등불 신세가 되자 사명대사는 건봉사에서 승병을 일으켰다. 서산대사의 명을 받은 사명대사가 승병 6000여명을 건봉사에 집결시켜 훈련을 시켰는데 절 앞 냇가가 쌀뜨물로 하얗게 뒤덮였다고 한다. 

그 때 6000여 명의 승병이 마셨던 물이 바로 장군수다. 장군수는 그 당시와 다름 없이 맑고 시원한 물을 넉넉하게 내리니 오늘날에는 고성 속초 등 동해안 주민들의 식수원 역할을 한다. 

건봉사는 능파교를 중심으로 대웅전 권역과 지금 불사가 한창인 극락전 권역으로 나뉜다. 극락전 권역 맨 위는 적멸보궁이다. 이 곳 역시 왜구의 만행과 이를 극복한 불교의 지혜와 용기가 스며있다. 보궁에는 부처님 치아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신라시대 자장법사가 636년(선덕왕 5년) 중국 오대산에 건너가 문수보살전에 기도 끝에 얻은 진신사리 100과 중 일부다. 널리 알려 진 것처럼 자장법사는 643년 귀국하여 이 사리들을 통도사 월정사 법흥사 정암사 봉정암에 나누어 봉안한다. 통도사에는 반야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계를 금강석처럼 굳건하게 지켜야한다는 뜻에서 금강계단을 개설하고 부처님의 가사와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통도사에 난입하여 금강계단에 모셔진 사리를 탈취했다. 사명대사가 조선을 대신해 일본으로 건너가 포로를 구해오는데 그 때 훔쳐간 통도사 사리도 되찾아온다. 사명대사는 왜적이 파괴한 통도사 금강계단을 중수하여 사리를 다시 모시면서 왜적이 다시 약탈할 경우를 우려해 12과를 나누어 맨 처음 승군을 규합했던 건봉사에 봉안했다. 

이러한 사실은 400여년 뒤에 밝혀진다. 1986년 6월 사리탑이 도굴되면서 알려진 것이다. 당시 건봉사는 민통선 내에 위치하여 민간인 출입이 불가했다. 이를 악용한 도굴꾼들은 모대학 건봉사 복원조사단을 사칭해 위장출입증으로 검문소를 지나 건봉사에 잠입해 2시간에 걸친 도굴 끝에 치아사리를 훔쳐갔다.

하지만 이들은 얼마 뒤 부처님이 나타나 “사리를 돌려주라”고 꾸짖는 꿈을 꾼다. 똑 같은 꿈이 계속되자 불안에 못이겨 도굴을 주도한 주범이 서울의 모 호텔에 훔친 사리 12과 가운데 8과를 맡겨놓고 달아났다. 그러나 나머지 4과는 공범 중 한 명이 가지고 달아나는 바람에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사명대사와 만해스님을 기리는 기념관.
사명대사와 만해스님을 기리는 기념관.

사명대사가 봉안한 불치사리

건봉사는 되찾은 부처님 진신사리 8과 가운데 3과는 적멸보궁 석탑에, 나머지 5과는 법당에 봉안하여 참배불자들이 친견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건봉사 진신 치사리는 사명대사가 봉안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분명해 의미가 더 크다. 특히 치아사리는 전 세계에 15과에 불과하며 그 중 12과가 건봉사에 있어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다.

건봉사가 배출한 또 한명의 민족 지도자며 구국의 의승(義僧)은 만해 한용운스님이다.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만해스님은 여섯 살 때부터 한학(漢學)을 공부하고 향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1896년 보은 속리산에서 출가했다. 월정사 강원에서 공부하고 1898년 백담사에서 사미계를 수지했다. 법명이 봉완(奉玩)이다. 그러다 1903년부터 세계 일주에 나서기도 했다. 1905년 백담사에 재 입산하여 연곡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07년 첫 안거를 건봉사에서 나면서 선(禪)을 접했다. 

스승 연곡화상이 건봉사에서 구해 가져다 준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을 읽고 근대문화에 대해 눈을 떴으니, 평생을 일관한 선사(禪師)의 풍모와 반일 민족정신, 근대개혁가로서 행보가 건봉사에서 영향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출가 사찰이며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 한 백담사와 그 본사인 건봉사는 만해를 만든 사상과 선의 토양이 아닐 수 없다. 만해는 특히 건봉사에서 만난 사명을 접하고 불교로 일본의 침략 야욕을 누르고 진정한 동아시아 평화와 공존을 꿈꿨을지 모른다. 

건봉사는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이 일어난 민족의 스승이며 지도자인 사명대사와 만해선사를 기리고 그 정신을 잇는 기념관을 만들어 교육한다. 

건봉사가 배출한 또 한 분의 독립지사가 있으니 정남용(鄭南用)스님이다. 1896년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난 정남용스님은 건봉사에서 출가했다. 이후 휘문의식과 중앙불교학당에서 공부하다 ‘조선민족의 정신통일 및 실력양성에 의한 독립 달성’을 목적으로 결성한 비밀결사체인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해 활동한다. 

3·1 운동 후 사회 각계 각충이 참여한 대동단에 정남용은 종교단 총대로 활동했다. 그는 독립을 달성한다는 뜻으로 정필성(鄭必成)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대동단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 초고를 비롯하여 각종 격문을 쓰고 인쇄하는 선전활동을 맡아 맹활약했다. 상해 망명정부에 힘을 보태고 민족주의 운동 고취를 위해 의친왕 이환의 탈출 계획을 수립하다 일경에 체포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1921년 4월18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이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가람 답게 건봉사는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재정을 바탕으로 근대교육기관을 개설해 인재를 양성하고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 구한말인 1906년 건봉사가 건립한 ‘봉림학교’는 새로운 나라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관동지방의 대표적인 교육기관 역할을 하다 일제에 폐교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강원도 3대 본산인 금강산 유점사, 오대산 월정사와 함께 근대 도심포교당의 효시격인 강릉불교포교소를 개원했다. 인천에도 포교당을 개설하여 미래 불교를 대비했다. 교육과 도심포교 역시 새롭고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길이었다. 
 

이 물 때문에 승병 6000여명이 주둔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장군샘.
이 물 때문에 승병 6000여명이 주둔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장군샘.

독립운동가 배출

건봉사 일대는 6·25때 아군의 3개 사단과 미군 10군단, 공산군 5개 사단이 16차례 공방전을 벌인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전쟁의 포화 속에 가람도 모두 불탔다. 그 속에서도 단 한 곳 일주문만은 무사했다. 

1994년부터 복원을 시작해 옛 모습을 찾아가는 중이다. 전쟁의 폐허에서 금강산을 오가는 한반도 평화의 길목이 되었다. 제국주의 유혹에 빠져 다시 침략의 본성을 드러내는 일본에 맞서는 길은 한반도 평화이니 금강산을 오가느라 분주해질 ‘건봉사’를 다시 그려본다. 
 

건봉사의 명소 장군소나무. 전쟁 와중에도 소나무는 불타지 않았다고 한다.
건봉사의 명소 장군소나무. 전쟁 와중에도 소나무는 불타지 않았다고 한다.

고성=박부영 상임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12호/2019년8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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