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불매 반일 국면 속 항일사찰순례길 살펴보니

교과서에선 볼 수 없던 스님들
나라 독립 위해 누구보다 헌신
3.1운동 항일 의병활동에 나서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지원도

일본 불매운동이 한창인 요즘 일본여행 대신 항일사찰 순례를 기획해보면 어떨까. 일제강점기 스님들은 항일운동에도 앞장섰다. 광복 74주년을 맞아 3.1운동과 의병활동을 해온 주요 사찰들을 순례하면서 호국불교와 대승불교를 실천해온 스님들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이자 광복 74주년이 되는 올해 국민들 사이에는 경제독립운동을 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우리나라 강제징용 판결에 대해 경제보복에 나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에 가지 않고, 일본 제품을 사지 않는 운동에 국민 60%이상이 참여하고 있다.

반일을 넘어 극일(克日)로 나가야 한다는 국민들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헌신했던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비록 세간에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지만, 불자들만이라도 스님들의 희생을 떠올리며 항일사찰순례를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1919년 3월1일, 독립의 염원을 담아 시작된 만세시위는 전국에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3월부터 4월 초순까지 이어진 만세시위는 학생은 물론, 노동자, 농민, 여성 등 모두가 참여하는 비폭력 평화시위였다. 불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족대표 33인에 용성스님, 만해스님이 포함된 것 외에도 전국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이 독립을 위해 떨쳐 일어났다.

스님들은 지역의 만세운동을 조직하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을 벌여나갔다. 2017년 6월말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독립유공자 가운데 스님으로 스님이나 불자로 확인된 인물만 100여 명에 달한다.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논문 ‘3. 1운동의 불교적 전개와 성과’에서 “불교 3.1운동의 전개에는 호국불교, 대승불교, 민족불교의 이념이 바탕이 되어 있었다”며 “중앙학림(동국대 전신) 및 각처 사찰 지방 학림의 스님들이 3. 1운동의 전국적인 파급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학림은 스님들 교육기관으로, 당시 중앙학림은 불교계 최고의 학교였다. 본사를 대표하는 스님들이 중앙학림에서 수학했고, 만해스님은 그곳에서 학인 스님들을 지도했다. 만해스님과 인연으로 3.1운동에 참여했던 스님들이 자신의 본사로 내려가 지방 사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임시정부나 만주독립군으로까지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문교부 장관을 지낸 김법린(1899-1964) 전 동국대 총장은 범어사에서 출가해 3.1운동 당시 중앙학림 학인이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만해스님의 지도를 받던 유심회라는 학생회에는 신상완, 백성욱, 김법린, 김상헌, 김대용, 정병헌 등이 활동했는데, 3.1운동 전날 만해스님의 부름을 받고 계동에 있는 스님 사택인 유심사로 모였다고 한다.

만해스님은 학인 스님들에게 1만 장의 독립선언서를 전하며, 경성과 지방에 배포하라고 당부했다. 이후 학인 스님들은 선언서 3000매를 서울 시내에 뿌린 뒤 야간열차를 타고 사찰로 내려가 만세시위를 주도했다고 한다.

양산 통도사는 김상문, 오택언 스님을 주도로 3월13일 통도사 앞 신평마을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했다. 특히 통도사 주지 구하스님은 1919년 한 해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 1만3000원을 보내기도 했다. 용성스님이 주석했던 합천 해인사에서는 3월31일 홍하문(紅霞門) 만세시위가 열렸다. 최범술 스님을 비롯해 해인사 학림과 보통학교에서 공부하던 200여명 스님과 주민 200여명이 동참했다.

이에 앞서 부산 범어사에서는 중앙학림에서 내려온 김법린, 김상헌 스님이 내려와 주도했고 오성월 스님이 지원했다. 스님들은 동래읍 장날인 3월19일 만세운동을 벌였다. 범어사 지방학림과 명정학교 스님들이 주축이었는데, 스님들은 시위로 재판까지 받았다. 현재 범어사성보박물관은 호국불교를 실천한 스님들의 항일정신을 조명하는 특별전 ‘불법으로 국가를 수호하다-선승에서 승군으로’를 진행 중이다.

‘범어사 3·1운동과 명정학교’에 만해스님이 용성스님 입적 후 직접 쓴 탑비문과 범어사 만세운동을 주도한 17명의 이름이 새겨진 ‘범어사 석가여래사리탑비’가 대표적이다. 또 1919년 3월에 제작한 ‘안적사 지장시왕도’(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9호)와 경허스님이 범어사 선원 개설 당시 직접 쓴 ‘경허스님 시판’도 전시돼 있다.

남양주 봉선사는 3월29일 김성숙 스님 등 여러 스님 주도로 주민 600여 명이 참가해 광릉천 시위를 벌였는데, 조선독립 임시사무소 명의 격문을 배포했다. 여주 신륵사 주지 영봉스님과 면장 등 주도하에 신륵사 인근 백사장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대구 동화사 지방학림 스님들과 동화사 포교당 보현사 스님들은 3월30일 대구 남문시장(현 염매시장)서 주민 3000명이 참가한 시위를 벌였다. 당시 스님들은 대형 종이 태극기를 준비, 학인 스님 10명이 실형을 받았다. 문경 김룡사에서도 학인 스님들이 태극기와 선언서, 격문을 준비해 장터로 출발했으나 일본경찰에 학인 스님 27명이 체포됐다고 한다.

하동 쌍계사 스님들과 쌍계사가 운영하는 보명학교 학생과 청년들은 4월6일 화개장터에서 시위를 했고, 화엄사도 구례장날에 맞춰 만세운동을 추동했다. 대흥사 학인 스님들도 해남 장날에 만세운동을 추동했다. 고성 옥천사는 지역 애국지사들에게 산문을 열어 만세운동을 논의하는 장소였고, 신화수 한봉진 스님들은 항일운동에 직접 나섰다.

3.1운동에 앞서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던 곳도 있다. 양평 용문산 용문사와 상원사, 사나사는 1907년 정미의병의 근거지였고, 일본군에 의해 소각되는 비운을 겪은 사찰이기도 하다. 제주 한라산 법정사 김연일 스님 등과 주민들은 3.1운동 5개월이나 앞선 1918년 10월 일제에 항거하는 무장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밖에도 사형을 선고받고 인천형무소를 탈옥했던 독립운동가 김구의 은신출가를 도왔던 공주 마곡사, 백초월 스님이 독립운동 당시 사용한 태극기와 1919년 6월6일부터 12월25일까지 제작된 신대한신문 3점, 독립신문 4점, 조선독립신문 5점 등이 발견된 서울 진관사도 있다.

만해스님과 최범술, 이용조, 조학유, 김상호, 김법린 등이 참여한 불교계 항일단체인 만당(卍黨)의 근거지 사천 다솔사, 봉명학교를 설립해 교육에도 나섰던 고성 건봉사는 만해스님과 금암스님의 사상적 모태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불교계 항일운동은 최근에야 연구가 이뤄지고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못하다. 교과서에는 볼 수 없었던 많은 스님들의 독립과 항일운동의 발자취를 더듬다 보면, 상을 내지 않았던 스님들의 희생과 헌신이 떠올라 절로 숙연해진다.

[불교신문 3512호/2019년8월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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