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이이, 이안눌, 김정희 등
조선조 유생들이 바라본 ‘스님들’
이종찬 동국대 명예교수 번역해

동국대 사범대 앞에 있는 ‘동악선생시단’ 비. 조선시대 동악 이안눌의 생가가 동국대 안에 있었다.
동국대 사범대 앞에 있는 ‘동악선생시단’ 비. 조선시대 동악 이안눌의 생가가 동국대 안에 있었다.

“선의 마음은 솔(松) 밖의 달이고, 단정히 앉은 부처 앞의 등불, 응당 유가(儒家) 의관 잘못됨 웃겠지, 가려해도 괴로이 할 수가 없네.” 정도전(鄭道傳)이 지은 ‘기단속문장로(寄斷俗文長老)’라는 시의 일부이다. 단속사 문 장로(큰스님)에게 보낸 이 글에서 정도전은 ‘참선하는 마음이 곧 소나무 밖의 달과 같다’고 노래했다.

이밖에도 정도전은 와운(臥雲), 목암(牧菴), 서봉(瑞峯), 운공(雲公) 스님 등 여럿에게 보낸 작품이 다수 있다. 장로(長老), 상인(上人), 화상(和尙) 등으로 스님을 표현했다. 조선이 척불숭유(斥佛崇儒)의 기치를 내거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이 정도전이라는 점에서 스님들과의 잦은 교류 흔적이 이채롭다.

이같은 사실을 강조한 이종찬 동국대 명예교수는 <삼봉집(三峰集)>외에도 <양촌집(陽村集)> <보한재집(保閑齋集)> <사가시집(四佳詩集)> <동악집(東岳集)> 등 조선 유가들의 문집에 실린 불교 관련 작품을 모아 우리말로 옮겨 <조선조 유가가 승려에게 준 시>를 펴냈다. 사대부들이 공식적으로는 불교를 천시하고 억압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스님들을 자주 만나 교분을 쌓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종찬 교수는 “조선조 사회가 유교를 국시(國是)로 하다보니, 자연 불교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었음은 당연하다”면서 “그러나 불교는 생활 이념인 사회윤리라기보다 인간의 정신적 수행이기에 어느 시대에도 신봉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분석했다. <조선조 유가가 승려에게 준 시>에는 권근(權近), 변계량(卞季良), 서거정(徐居正), 주세붕(周世鵬), 이이(李珥), 이안눌(李安訥), 김정희(金正喜) 등이 스님들에게 보낸 시를 만날 수 있다.
 

정도전의 '삼봉집' 표지.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정도전의 '삼봉집' 표지.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이종찬 교수는 “조선 건국 초기부터 승려들의 도움으로 국가 안정을 구하려 했던 국왕들은 그들을 국사로 대접한 경우도 있었다”면서 “간경도감(刊經都監)을 두어 경전을 번역하는 과정에도 승려의 힘을 빌렸다”고 강조했다. 억불의 시대이지만 스님들의 역할이 나름대로 존재했던 것이다.

조선 유가 가운데 이종찬 교수가 특히 주목한 인물은 동악 이안눌(1571~1637)과 추사 김정희(1786~1856)이다. 이들은 유불(儒佛)의 구별을 의식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작품을 선보였는데, 이를 통해 문풍(文風)을 진작한 조선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이안눌의 <동악집(東岳集)>에 등장하는 스님만 해도 100명에 이르고, 작품도 수백편을 헤아린다. 이안눌은 선조 32년(1599) 문과에 합격해 예조판서, 공청도관찰사(公淸道觀察使), 함경도관찰사, 동래부사, 예문관제학 등을 지낸 대표적인 유가이다. 병조호란 때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할 때 호종(扈從)했다. 어느 해 추석 편운(片雲)스님에게 보낸 시에서 이안눌은 우국충정(憂國衷情)과 더불어 무상을 노래하고 있다.

‘한가위 달밤에 편운상인에게’라는 시의 일부이다. “차지우중추(此地又中秋) 연주고신루(戀主孤臣淚) 사향로리수(思鄕老吏愁) 백두유이재(白頭唯爾在) 수처작청모(隨處作靑眸)” “이 땅에서 또 추석 한가위, 임금 그리는 외로운 신하의 눈물, 고향 생각하는 늙은 관리의 시름, 흰 머리는 오직 너에게 있지만, 가는 곳마다 파란 눈동자이네.”

이 시가 실린 <동악집>은 이안눌이 세상을 떠난 후 후손들이 편찬한 것이다. 동국대 서울캠퍼스에 그의 집이 있었으며 권필(權韠), 윤근수(尹根壽), 이호민(李好閔) 등과 동악시단(東岳詩壇)을 만들어 창작 활동을 했다. 평생 4379수(首)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시를 지었다. 동국대 사범대 앞에 ‘동악선생시단’ 비가 세워져 있다. 이종찬 교수는 “인물이나 교리를 떠나, 시는 시로서 만족한 작자, 즉 이안눌의 문학관이었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이종찬 동국대 명예교수가 펴낸 ‘조선조 유가가 승려에게 준 시’ 표지
이종찬 동국대 명예교수가 펴낸 ‘조선조 유가가 승려에게 준 시’ 표지

추사(秋史) 김정희도 불교와 인연이 깊은 대표적인 유가이다, 충청도 암행어사와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헌종 6년(1840) 옥사(獄事)에 연루돼 제주도에 유배됐다. 가까운 사이인 초의(草衣)스님 외에도 운구(雲句), 해붕(海鵬), 혼허(混虛), 금계(金溪), 풍납(豊衲) 스님 등 많은 출가자와 교유(交遊)했다.

초의스님이 쓴 불국사(佛國寺) 시에 이어 쓴 추사 작품은 다음과 같다. “연지보탑법흥년(蓮地寶塔法興年) 선탑화풍일망연(禪榻花風一惘然) 가시령양괘각처(可是羚羊掛角處) 수장괴석주청천(誰將怪石注淸泉)” ”연지의 못 다보탑이 불법을 일으키는 해였으나, 선탑 책상의 꽃 바람이 한 번 망연 아득하네, 이것이 바로 양이 뿔을 걸 초탈한 곳이니, 누가 괴상한 돌을 가져다 맑은 샘에 이을까.”

이종찬 교수는 “추사는 순수한 시의 수창 보다는 학문적 교리 담론 같아 순수한 시의 문예미에는 다소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서 “조선 후기 학풍이 실학이라는 고증적 교리에 치중되는 경향인 듯 하다”고 밝혔다.

조선시대 유가들이 스님들에게 전한 시를 모아 펴낸 이종찬 교수는 “유생들이 승려에게 선물한 시를 중심으로 번역한 것은 조선시대의 표면적인 배불과 관계없이 교유했던 지식인의 이면을 살펴보자는 의도”라면서 “조선조의 시문학사를 조명할 수 있겠다는 작은 소망을 갖게 됐다”고 집필 배경을 설명했다. 이번에 모두 담지 못한 조선 후기 작가들의 작품을 다음 기회에 모아 펴낼 계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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