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열반 10주기 특별기획] ➄ 법정스님의 학창시절
[법정스님 열반 10주기 특별기획] ➄ 법정스님의 학창시절
  • 여태동 기자
  • 승인 2019.08.13 09: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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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철이는 춘원 책 빠짐없이 독파했다”

1947년부터 목포로 유학해
정광중 목포상업학교 다녀
2년 과정 목포초급대 거쳐
전남대학교 상과대학 입학
춘원 소월 에밀졸라 작품 탐독
방학 때면 바다와 산사 찾아
사색하며 인생에 대해 참구
법정스님이 입학했던 정광중학교가 창건한 정광정혜원.. 스님은 학창시절 이 사찰에서 머물며 소임을 맡아보기도 했다.
법정스님이 입학했던 정광중학교가 창건한 정광정혜원.. 스님은 학창시절 이 사찰에서 머물며 소임을 맡아보기도 했다.

법정스님의 학창시절은 목포로 유학해 중학교에 입학한 194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당시 스님은 불교종립학교인 정광중학교에 입학했다. 1932년생이라는 나이로 따져 보면 중학교 입학 시기는 2년 정도 늦다. 법정스님과 목포상업학교 동창인 박광순 전남대 명예교수가 2017년 발표한 자전에세이 ‘나의 태평정기’에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가 만난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목포시 용당동의 목포상업학교(2학년)에서였다. 그는 당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을 쉰 다음에 중학교에 진학하였기 때문에 나보다 한 살 위였다.”

1년을 휴학했는지 여부가 궁금해 사촌동생인 박성직 씨와 고향 후배인 임준문 씨에게 물어봐도 어린 시절의 일이라 기억하지 못했다. 동기동창 친구들은 모두가 고인이 됐다고 했다. 지근거리에서 유발상좌로 있었던 정찬주 작가도 휴학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했다. 정황상으로 보았을 때 스님은 정광중학교(현 광주광역시로 이전했기 때문)에서 목포상업학교로 전학을 하는 과정에서 1년을 쉬었을 것이고 초등학교 입학도 1년 늦었을 개연성이 있다. 임준문 씨는 “당시에는 워낙 살림이 어려웠고, 선두리에서 중학교에 입학한 사람은 재철이 형님(법정스님)이 유일했다”고 증언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1∼2년 쉬는 일은 다반사였던것 같다.

정광중학교를 다니다가 목포상업학교로 전학을 한 법정스님은 2학년 때인 1948년에 친구 박광순 교수를 만나 오랫동안 우정을 이어간다. 스님은 1950년 학제개편에 따라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분리되면서 1951년 2년 과정의 초급대학으로 진학하게 된다. 법정스님도 박광순 교수와 같이 ‘목포초급 상과대학’으로 진학한다. 이 ‘목포초급 상과대학’은 훗날 ‘전남대학교 상과대학’의 모태가 된다.

법정스님은 초급대학에 입학해 심도 깊은 학문을 접한 것으로 확인된다. 스님의 친구인 박광순 교수는 법정스님과 학창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와의 우정은 중학교 시절에 싹이 터 초급대학 시절에 꽃이 피고 대학에 올라오면서 익은 것으로 회상된다. 초급대학의 교과편성은 대학 예과의 그것과 비슷했다. 전공과목보다는 교양과목에 더 큰 비중이 주어져, 우리는 논리학, 철학개론, 윤리학 개론, 문학개론은 물론 <채근담>과 같은 고전도 배웠다. 영어, 독일어, 불어와 같은 외국어도 소홀하지 않았다. 일본어는 특별히 개설되어 있지 않았지만, 당시 대학생들은 이미 초등학교에서 기초를 익혀 온 터라서 그 후에 조금만 자득하는 일에 힘을 쏟은 학생이라면 교양서적을 읽는 데는 별로 큰 곤란을 느끼지 않았다.”

법정스님은 6.25의 전화(戰禍)가 채 가시지 않은 시절에도 학구열에 불타서 독서에 심취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모든 게 귀하고 얻기 어려운 시절이라 책도 예외가 아니었다. 박광순 교수는 이런 상황을 구체적으로 회고한다.

“고서점을 통해 어렵사리 책(대부분 일어책)을 구하게 되면 돌려가면서 읽었는데 그 책들은 아직 전재(戰災)의 후유가 채 가시지 않은 서울에 도강증(渡江證)을 소지한 서적상들이 결사적으로 들어가 길거리에서 휴지 값으로 거래되는 책들을 긁어모아 온 것들이었다. 그 덕에 시골에 사는 우리도 필요한 책들은 다소나마 구할 수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분들에게 고마운 생각이 절로 난다.”

법정스님은 학창시절 문학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이 내용 역시 박광순 교수의 회고록에서 보인다. “우리는 일어로 된 <학생총서>를 비롯한 철학, 문학, 역사, 위인전을 즐겨 읽었는데 법정은 문학서와 철학서를 탐독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법정스님의 뛰어난 문장력과 깊이 사색하는 습관은 이미 이때에 다듬어진 것이 아닐까? 전시하이지만 우리는 명색이 대학생이라고 해서 머리도 길렀고, 학교생활동도 매우 자유로왔다. 읽고 싶은 책은 마르크스의 저서들을 포함해서 무엇이든 읽을 수 있었고, 극장이나 술집의 출입에도 제약이 없었다.”

초급대학 생활 시절 법정스님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다양한 사상을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급대학 2학년을 마친 법정스님은 1953년에 전남대학교 상과대학에 진학했다. 목포에 위치했던 전남대학교 상과대학은 스님이 입학하기 1년 전인 1952년 목포상과대학이었는데 광주에 있는 의과대학, 농과대학, 대성대학 등과 합쳐져 종합대학인 국립전남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전남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해 2년 동안은 초급대학에서 배운 과목의 복습판이었다. 시간의 여유가 생기게 되자 법정스님은 근교의 사찰을 자주 찾았고 친구들과 멀리 흑산도와 홍도로 여행을 하기도 했다.

요즘은 쾌속선이 있어 목포에서 홍도까지는 하루에도 드나들 수 있다. 하지만 법정스님의 학창시절 당시는 쾌속선은 물론 정기여객선마저 없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홍도여행을 할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스님은 대학교 친구가 그곳에 살고 있어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박 교수의 이야기를 더 살펴보자. “1950년대 초 홍도는 참으로 아름답고 고요한 청정지역이었다. 물밑 수십 미터 아래 조약돌이 수놓은 모자이크를 보지 않고서 ‘맑다’는 낱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언어의 남용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법정이 훗날 지향한 ‘맑고 향기롭게’의 ‘맑고’는 그때 그의 머리와 가슴에 새겨진 이미지가 작용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요즘도 혼자서 해 보며 미소를 짓곤 한다.”

학창시절 목포에서 학문에 매진하며 틈만 나면 고향인 해남 우수영 선두리로 내려가 바닷소리를 자주 들었다. 전쟁의 참화가 가시기 전이라 모두가 곤궁했고 공부를 한다는 것을 사치라 여기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법정스님은 작은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기도 했고, 자신을 길어 준 할머니가 계시는 고향인 선두리를 자주 찾았다. 바닷가인 우수영 선두리는 법정스님의 감수성을 길러주는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법정스님은 학창시절 에밀졸라의 ‘해조음’을 좋아했고,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자주 외웠다고 한다.

목포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법정스님이 자주 다녔던 거리는 고서점가라 불리던 남교동시장 부근이었다. 당시 그곳은 좁은 거리였으며 서점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곳에는 유명한 ‘창경서점’이 있었는데 다양한 고서적을 구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박광순 교수는 2017년 목포에서 가진 특강에서 이 서점을 언급하며 “그 분들의 덕택으로 철학의 인식론에서 출발하여 사회정책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인격완성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꼭 읽어야 할 서적들을 편력할 수 있었다”고 했다.

법정스님은 남교동 인근 지역인 목포역 인근 서점도 찾아 소설책을 즐겨 읽었다. 박 교수는 “특히 재철이는 춘원(이광수)의 책은 빠짐없이 독파하면서 문재(文才)를 닦고 있었다. 그 책들은 주로 ‘판자집 대본점’에서 빌려 읽었다. 속칭 ‘하꼬방 대본집’은 한 평 반 정도의 좁은 공간에 헌 책(주로 소설책)을 진열해 놓고 1주야(24시간)에 얼마 하는 식으로 대본료를 받고 빌려주는 이동식 간이서점이었다.

목포에는 역전파출소 근방을 비롯해서 몇 군데 있었는데 고객은 주로 학생들이었다.”고 기억했다. 이곳에는 훗날 우리나라 대형출판사의 하나로 성장한 ‘삼성출판사’의 창업주도 있었다고 한다.

법정스님이 활동했던 지역은 목포 역 인근 지역이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정광중학교도 지금의 정광정혜원이었으니 역전에서 1Km도 떨어지지 않았다. 고서점이 즐비했던 남교동 시장도 인근이었고, 목포에 집을 사서 어머니와 생활한 대성동 역시 목포역에서 3Km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법정스님은 목포 유달산을 지척에 ‘목포의 눈물’과 ‘선창’을 들으며 바다를 벗 삼으며 철학과 문학에 조예를 키우며 학창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와중에 방학이면 산과 바다를 찾았고 사찰에서 머물며 만난 불교는 자석의 음극과 양극이 붙는 것처럼 강한 흡인력을 가졌고, 틈날 때마다 방문한 사찰에서 만난 수행자의 모습은 출가수행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을 것으로 보인다.

법정스님의 대학생 시절 모습.
법정스님의 대학생 시절 모습.
유달산에 세워져 있는 ‘목포의 눈물’ 노래비로 법정스님은 이 노래를 들으며 학창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달산에 세워져 있는 ‘목포의 눈물’ 노래비로 법정스님은 이 노래를 들으며 학창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추측된다.
법정스님이 학창시절을 보냈던 목포역 인근지역을 유달산에서 본 모습. 바로 앞에 노적봉과 삼학도가 보인다.
법정스님이 학창시절을 보냈던 목포역 인근지역을 유달산에서 본 모습. 바로 앞에 노적봉과 삼학도가 보인다.

※ 취재협조 : (사) 맑고향기롭게 

목포=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불교신문3510호/2019년8월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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