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아래 구름, 눈앞에 별 떠다니는 선방”

월정사 정념스님 원력 5년여 불사
올 하안거 수좌 스님 10명 첫 결제
해발 1300m 고지에 수량 풍부
모든 조건 갖춘 ‘최고 수행처’ 평가
수행과 건강 챙기는 요가수련
큰방 24시간 개방…개별 정진도

오대산 북대 상왕선원 큰 방에서 참선 정진 중인 수좌 스님들.
오대산 북대 상왕선원 큰 방에서 참선 정진 중인 수좌 스님들.

지난 7월22일 오대산 북대(北臺), 산중 스님들이 다 모였다. 월정사 만월선원, 상원사 청량선원, 지장암 기린선원 비구니 스님들까지 70여명의 스님들이 찾아왔다.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도 함께 했다. 

대중공양 날이었다. 오대산은 결제 동안 산중 결제 대중이 함께 한 선원을 찾아 대중공양하는 전통이 있다. 이 날은 북대 상왕선원(象王禪院)을 찾았다. 이 선원에서 정진하는 수좌 스님과 인연있는 스님 재가자들도 멀리서 찾아왔다. 신도들까지 동참해 깊은 산중이 모처럼 활기를 띠었다. 

오대산 해발 1300m에 들어선 북대는 수행처로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췄다. 날씨 환경 물이 완벽하다. 나옹화상이 선원 상두암을 열고 근현대 수많은 고승이 목숨을 걸고 정진하던 유서 깊은 수행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지대에다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많은 대중이 사는 수행처로 자리잡지 못했다. 수좌 홀로 정진하거나 최근에는 상원사 부속 선원으로 3~4명이 공부했다. 이를 안타까워한 조계종 제4교구장 정념스님이 원력을 내 불사를 했다.

정념스님은 “60여년 전 현묵스님이라는 분이 오대산에 계시면서 선원을 짓기 위해 불사에 착수했지만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며 “물 환경 산속 깊은 입지 등 북대만한 수행처소가 전국적으로 봐도 드물어 선원을 개설하여 여러 대중이 살면 좋겠다 싶어 4~5년 전에 불사를 시작해 이번에 처음 결제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대중공양은 오랜 원력이 실현되는 기쁨을 나누는 자리도 되는 셈이다. 입승 정견스님은 “오랜 시간 공들였던 상왕선원을 개원하는 기쁨을 함께 나누고 축하하는 의미에서 마련했다” 고 말했다.

준공은 내년이지만 이번 하안거 첫 결제를 시작했다. 상왕선원은 현재 10명의 수좌 스님들이 결제 중이다. 주로 30년 이상의 구참납자다. 통도사 월하스님 제자인 증도스님을 한주로 모시고, 백양사의 정견스님이 입승으로 죽비를 잡았다. 주지 덕행스님이 외호를 맡아 가행 정진한다.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은 입재부터 21일을 함께 좌복에 앉았다. 그러나 산중 전체를 돌봐야 하는 입장이어서 끝까지 함께 할 수는 없었다. 

스님들은 새벽3시에 기상해서 공양 시간을 빼면 대부분 참선한다. 참선 공양 방선을 반복하는 다른 선원과 일과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상왕선원만 갖고 있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수좌들 건강을 각별하게 챙기고 단체 생활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자율성을 부여하는 점이 남다르다. 구체적으로 새벽예불 후 1시간 요가수련과 저녁 정진이 끝난 뒤 자율 정진이 그것이다. 정견스님은 “수행과 건강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둘을 병행할 수 있는 요가를 수좌들이 함께 해서 좋은 효과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요가는 교구장 정념스님이 수좌들 건강을 위해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하루 정진 일과가 끝나면 큰방에서 자율 정진하는 것도 특별하다. 정견스님은 “각자 방을 사용하기 때문에 일과 후 큰방은 비는데 방을 닫지 않고 24시간 개방해서 원하는 스님들은 일과 후 자율적으로 앉는다”고 말했다. 10시간, 12시간 정진하는 스님도 있다. 
 

상왕선원은 한국불교 신앙과 수행 본산 오대산의 가풍을 잇는데 매진한다. 산중 스님들이 모두 모여 대중공양을 한 후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과 수좌 스님들이 함께 했다.
상왕선원은 한국불교 신앙과 수행 본산 오대산의 가풍을 잇는데 매진한다. 산중 스님들이 모두 모여 대중공양을 한 후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과 수좌 스님들이 함께 했다.

상왕선원의 남다른 점은 또 있다. 대중과 함께 중생과 함께 하는 선(禪)이다. 오대산은 북대 상왕선원 외에 월정사 만월선원, 상원사 청량선원, 기린선원에다 명상마을, 중대 등 각 처에서 기도하는 재가자, 출가학교까지 산중이 하나의 거대한 수행처다. 단지 공간만 다르고 출재가 구분만 있을 뿐 지향점은 하나다.

그래서 오대산의 선원 수좌스님들은 재가자들의 공부도 함께 책임지려는 의식이 강하다. 이는 신라시대부터 시작된 오대산중의 전통이며 한암스님 탄허스님 등 오대산 가풍을 형성한 도인스님들 뜻이다. 

그래서 상왕선원도 오대산의 수행 가풍을 잇는데 정성을 기울인다. 정견스님은 “오대산중은 한암 큰스님께서 개산해서 선원을 운영하신 그 근본 가풍을 계승하고 회주 현해스님, 교구장 스님의 뜻을 받들면서 명상이라는 시대 트랜드에 맞춰서 결제 때는 각자 정진하고 산철에는 명상마을 등에서 재가자 참선 명상을 지원하는 등 대승선의 정신을 실천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정념스님도 “스님들 수행과 출가학교 명상마을 문화타운 성보박물관 실록박물관 한강 체험지 등 그 어떤 것도 다 수용하고 체험하며 신행과 수행이 이뤄지는 산중수행공동체를 갖춰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상왕선원은 대중과 함께 정진하고 함께 나누면서 사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대승선의 확립에 신경을 쓰면서도 생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불교 근본 문제를 늘 중심에 둔다.

정견스님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정각을 이루지 않았으면 불교는 없다. 부처님께서 가장 중요시 한 것은 생사문제였다. 빈부나 사회적 차별 등 온갖 사회적 고(苦)도, 생사관점에서 보셨다. 그 속에서 나의 고통을 해결하면 세계 인류 고통도 해결이 된다는 것을 직시하셨다. 대승을 지향하기 때문에 작은 일에도 손을 내밀지만 어디까지나 중심과제는 생사해탈이다. 나의 문제가 중생의 문제며 중생의 모든 문제가 나의 문제라는 근본사상을 갖고 항상 정진 몰입한다”고 말했다. 

정견스님은 끝으로 상왕선원이 성지순례처로서 최상이라며 전국 각지 불자들의 방문을 환영한다고 덧붙였다. 스님은 “선원 고도가 1300m에 달해 별이 눈 높이에 떠 있다. 사람 사는 모습 자체가 전혀 안 보이는 탈속 선경(仙境)이다. 이 좋은 곳을 우리 스님들만 독점하지 않으니 불자들께서도 성지순례를 겸해서 오셔서 하늘과 구름과 벗하는 정진 자리를 함께 나누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선원에서 바라본 오대산. 구름이 발아래 놓였다.
선원에서 바라본 오대산. 구름이 발아래 놓였다.

■ 오대산과 상왕선원

북대 상왕선원 개원은 선원 한 곳 늘어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오대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행 신앙 결사(結社) 성지다. 신라 보천태자와 효명태자는 오대산 각 대(臺)마다 방(房)과 당(堂)을 설치하고 불보살을 봉안했다.

신행결사를 조직하여 낮에는 불경을 독송하고 밤에는 예참(禮懺)을 행하였다. 그 중에서 북대 나한당에는 석가모니불을 주존불로 봉안하고 낮에는 ‘불보은경’과 ‘열반경’을 외웠으며, 밤에는 열반예참(涅槃禮懺)을 행하였다. 북대의 결사 이름은 백련사(白蓮社)라고 했다. 

오대결사 정신이 신라를 이어 고려 조선과 근 현대까지 이어졌으니 오대산은 한국불교 신앙과 수행의 중심지다. 그 전통은 지금도 잇고 있다. 오대산에는 월정사 상원사 등 5곳의 선원에서 70여명의 수좌 스님들이 정진한다. 

재가신도들도 오대산 각처에서 철야기도 정진한다. 여기에다 명상과 선을 결합한 명상학교가 성황리에 운영중이다. 

정념스님은 “상원사 500여명, 월정사와 중대 각 100여명 등이 모여 우리 산중 전통인 철야기도정진을 쉼없이 진행한다. 신도들은 신심을 증장하고 산중은 신앙성을 강화하는 오대산의 결사 정신이 지금도 살아있다”고 말했다. 

북대는 백련결사처에서 고려 나옹선사에 의해 선수행처로 변모한다. 본래 마음을 찾아 성불에 이르는 목표는 같지만 그 길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리했다. 북대 역시 당시 상황과 요구에 따라 모습을 바꾸었다. 1360년 중국에서 돌아온 나옹선사는 오대산 북대에 상두암(象頭庵)을 열고 선을 지도했다. 당시의 이야기가 북대에 전해온다. 북대의 16나한상을 상원사로 옮기기로 하고 나옹스님이 혼자 하겠다고 나섰다. 스님은 나한전으로 들어가 “이 화상이 업어서 옮겨 주기를 기다리는가” 했더니 나한상들이 스스로 일어나 차례로 상원사로 날아갔다. 

그런데 나한상 한 기가 칡넝쿨에 걸려 가지 못해 스님들이 들고 옮겼다. 이에 나옹스님이 오대산 산신을 불러 이운불사(移運佛事)를 방해한 칡넝쿨을 오대산에서 몰아낼 것을 명하니 이때부터 오대산에는 칡넝쿨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북대가 염불신행 도량에서 선수행처로 바뀌었음을 말한다. 그로부터 북대는 선원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수많은 스님들이 이 곳에서 목숨을 걸고 정진했다. 현대 한국불교에 무문관을 처음 개설한 제선스님이 1960년대 초 북대에서 장작을 쌓고 자화장(自火葬)을 한 사실은 전설처럼 남아있다. 

월정사=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09호/2019년8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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