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30> 김제 망해사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30> 김제 망해사
  • 박부영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19.08.05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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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보며 수행자 본분사 떠올린다”

기축옥사로 희생당한 지식인
임진왜란으로 도탄 빠진 백성
이들이 기댄 인물이 진묵대사
조선 인조 때 진묵대사 再創
낙서전과 팽나무 여전히 남아
바다 바라보는 천혜절경 자랑
망해사 전경, 진묵대사가 세운 낙서전과 팽나무가 바다를 보고 있다.
망해사 전경, 진묵대사가 세운 낙서전과 팽나무가 바다를 보고 있다.

‘우리 곁에 왔던 부처’

대사의 자취를 찾아 전북 김제 망해사(望海寺)를 찾았다. 망해사가 진묵과 특별한 이유는 대사가 새로 지은 절인데다 그 흔적이 남아 있어서다. 지난 7월10일 김제 평야에는 비바람이 몰아쳤다. 찾아오던 여름이 뒤로 주춤 물러난 듯 제법 한기 마저 드는 날씨였다. 끝없이 펼쳐진 논 한가운데를 비에 흠뻑 젖어 달리는 버스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사람의 아픈 손을 부여잡고 용기를 주고 힘을 불어넣듯 대사도 이 길을 한 없이 걸었을 것이다. 

‘바다를 바라보는 절’ 이름을 생각하면 산으로 향한 이정표는 처음 온 사람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하다. 김제 평야의 ‘고지대’가 기껏해야 언덕에 불과한데 비해 망해사를 가리키는 곳은 소나무가 우거진, 제대로 된 산이어서 더 당황스럽다. 혼란한 마음을 이기는 길은 한 가지. 믿음이다.

저 안내판이 나를 바른 길로 안내한다는 믿음. 믿음이 없으면 산으로 가라는 바닷가 사찰 안내판을 따라 가기 어렵다. 몇 번이나 의심하며 되돌아갈려는 마음을 누르고 산 허리를 돌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바다다. 아래로 내려가자 망해사가 나온다. 그제서야 20여년 전 그 때도 똑같이 망설였었던 기억이 떠 오른다. 

도량은 깔끔하다. 주차장도 생겼고 경내도 훨씬 넓어졌다. 바다는 물 마른 호수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얕다. 새만금 때문이다. 진묵대사가 지은 낙서전(樂西殿), 대사가 심은 팽나무가 여전히 푸르고 싱싱한 자태를 뽐낸다. 
 

청조헌 모습.
청조헌 모습.

문무왕 때 부설거사가 창건 

망해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1) 부설거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땅이 꺼져서 바다 속으로 잠겨버렸다고 한다. 바다와 접해 있을 법한 사고다. 혹은 높은 파도가 덮쳤는지 모른다. 아니면 왜구의 노략질 침입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가능성을 자연재해로 갈무리 했는지 알 수 없다. 그 뒤 1000년쯤 지나 조선 선조22년(1589) 진묵대사가 이곳으로 와서 낙서전(樂西殿)을 새로 지었다.

망해사가 자리한 곳은 만경강이 서해 바다와 접하는 진봉면 심포라는 작은 어촌이다. 해안가 산허리를 깎아 들어선 절은 터가 좁아 당우들이 한 줄로 죽 늘어섰다. 원래 절 가운데 범종각이 있고 그 양옆으로 낙서전(樂西殿), 법당, 청조헌(廳潮軒)이 늘어서 있었는데 도량을 넓히면서 범종각이 앞으로 나왔다. 망해사 낙서전 청조헌이 모두 바다를 보고 파도소리를 듣고 즐기는 곳이라는 뜻이니 바다를 면한 사찰 중에 이만한 운취와 정경을 지닌 곳도 없다. 

낙서전은 바다 쪽으로 한 쪽이 튀어나온 ㄱ자건물인데 건물 한켠에 마루를 놓고 종을 걸었다. 다른 켠에는 방과 부엌을 두었으니 낙서전은 법당겸 요사채인 셈이다. 1933년, 1977년 고쳤고 1986년 해체 복원했다. 대웅전은 일제 강점기에 고쳐 지은 자그마한 법당이었다가 1991년 중건했다. 

부처님의 화신으로 지금도 이 지역에서 추앙받는 고승 진묵대사는 임재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살았던 선승이다. 진묵대사의 이름은 일옥(一玉)이며 진묵은 그의 호이다. 망해사 인근 만경이 진묵대사가 태어난 고향이다. 그래서 이곳을 불거촌(佛居村)이라 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일곱 살 때 완주 서방산 봉서사에서 출가했다. 신비스러운 기행과 이적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불경 뿐만 아니라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출가해서 내전을 읽었는데 조금도 막힘없이 줄줄 해석하였으며 한번 눈에 스치면 외우곤 하여 아무도 스승이 되어 가르칠 수 없었다. 언젠가 주지스님이 진묵스님에게 신장단의 신중들에게 향을 사르는 소임을 맡겼는데 주지스님이 “우리는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장인데 도리어 부처로 하여금 우리에게 예경하고 봉향하게 하니 불안하기 이를데 없다. 그분으로 하여금 다시는 향을 사루게 하지 말아 우리를 아침 저녁으로 편히 지낼 수 있게 하라”는 꿈을 꾸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은 “부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진묵대사의 화신불 설을 뒷받침하는 일화는 많다. 그 중 하나가 사냥꾼들의 이야기다. 진묵대사가 사냥꾼들이 소금이 없어서 노루고기 육회(肉膾)를 먹지 못하는 것을 알고 시자에게 소금을 보냈는데, 이 일에 감동한 사냥꾼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진묵노장이 우리의 배고픔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부처가 계곡마다 있다고 하는데, 바로 이 분을 말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사람을 살리는 부처(活人之佛)이라고 찬탄한 것이다. 
 

낙서전 모습.
낙서전 모습.

진묵대사가 다시 일으켜

진묵스님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일출암(전주시 우아동)에 살 때 어머니를 인근의 왜막촌에 모셨는데 모기 때문에 고통을 겪자 산령에게 부탁해 모기를 쫓아버리게 했다. 스님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만경 북쪽 조앙산에 길지를 가려 장사지냈다. 그런데 그 묘역의 풀을 깎고 술과 음식을 차려 제사 지내면 그 사람의 그 해 농사가 풍년이 드는 까닭에 먼 고을 사람들까지 앞을 다투어 묘소를 돌보았다 한다. 군산에서 올 때 망해사 못 미쳐 만나는 성모암(聖母庵)이 진묵대사 어머니를 모신 암자다.

임진왜란을 맞아 직접 승병을 이끌고 전쟁에 뛰어든 서산 사명대사와는 달리 그는 깊은 산에 우거하며 고고한 한 마리의 학처럼 살다가 입적했다. 수많은 스님들이 목탁 대신 칼을 들고 직접 전쟁에 뛰어들어 싸웠는데 절에서 참선하고 경전 읽으며 기도하던 진묵대사를 부처님 급으로 떠받드는 이유는 무엇일 까? 

우선 당시 이 지역 유학자들이 정변(政變)에 휘말려 거의 전멸하다시피 몰락한 국내 정치적 이유에서 찾을 수 있다. 전쟁이 일어나기 4년 전 조선 정국을 뒤흔드는 일대 정변이 일어나니 바로 기축옥사다. 1589(선조 22년) 10월2일 정여립이 모반했다는 황해도 관찰사 한준의 고변을 시작된 피비린내 나는 사건에 연루돼 희생된 인원만 1천여 명에 달했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이 정여립을 비롯해 전북 지역 인재들이었다. 정여립은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화담학파로 붕당으로 치면 동인(東人)에 속했다. 화담학파는 불교 등 다른 종교와 학문에도 열린 자세를 갖고 받아들였다. 정여립을 선조에 천거하기도 했던 이이는 한 때 승려였으며 허균은 경전을 읽는 불자였다. 정여립도 사명대사와 친분이 두터울 정도로 불교에 우호적이었다. 

그는 이이의 십만양병설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으로 내려와 대동계를 조직해 무예를 가르치고 왜적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형식에 매이지 않고 폭넓은 학식과 진취적 사상을 지닌 그의 사상이 성리학으로 조선을 통일하려는 반대 세력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호남 우도 지식인이 거의 전멸한 것이 정여립 모반사건의 실체인 것이다. 

이후 전라도는 반역향이라는 오명을 쓰고 철저하게 관직이 막혔다. 그 여파는 오늘날에 까지 이른다. 이러한 지역 분위기를 잘 아는 진묵대사가 조선 왕실을 위한 전쟁에 합류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는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보듬는 역할이다. 사명대사가 정부 사절단으로 일본과 담판을 벌여 끌려간 조선인을 송환받은데 반해 진묵대사는 전쟁으로 터전을 잃고 굶주리는 백성들 곁으로 갔다. 김제의 비옥한 토지는 기축옥사 이후 정권을 잡은 기호지방 사림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 여파는 소작농과 소농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유학을 공부하여 관직으로 진출하는 길도 막히고, 경제기반 마저 외부에 빼앗긴 이들을 불교가 어루만졌다고 하면 과장일까? 

출가 수행자이지만 진묵은 사람을 살리는데 우선했다. 살생을 꾸짖는 대신 사냥꾼에게 고기 먹을 소금을 주고, 소년들이 끓여주는 물고기를 먹지만 배설하여 다시 방생하는 신이를 보이는 모습은 수행자의 위의를 잃지 않으면서도 중생의 입장에서 함께 살아가는 보살의 삶이다. 

수많은 무애행과 이적을 보이지만 대사는 밥 먹는 것도 잊고 손가락이 문짝에 찧어 피가 나는 것도 모르고 능엄삼매에 빠지는 선사였다. 평생 선을 참구하고 경전을 연마한 수행자였던 것이다. 진묵대사의 이러한 모습은 사명대사의 그것과 정확하게 닮았다. 그런 점에서 당대 민중들은 자신들을 현실 지옥에서 구할 영웅을 도력 높은 고승을 통해 찾으려 했는지 모른다. 
 

바다를 바라보는 범종.
바다를 바라보는 범종.

중생 생명 가장 우선시 

진묵대사는 병자호란 발발 2년 전 입적했다. 대사가 어느 날 목욕하고 머리를 깎고(淨髮), 옷을 갈아입고 주장자를 끌며 문을 나섰다. 계곡을 따라 가다가 주장자를 세우고 물을 마주보면서 서서 손으로 물속의 자기 그림자를 가리키며 시자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의 그림자이다”고 하니, 시자는 “이것은 화상의 그림자입니다”고 하였고, 진묵은 “너는 다만 나의 거짓된 몸(假)을 알 뿐이고 석가모니의 진신(眞)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는 마침내 주장자를 메고 방에 들어가서 다리를 포개서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제자를 불러 놓고 말했다. 

“나는 입적하고자 한다. 너희들이 묻고 싶은 대로 물어라”고 하니, 제자는 “화상이 입적한 지 백 년 뒤에는 종승(宗乘)은 누구를 계승한다고 하겠습니까?”고 물었고, 진묵은 말없이 침묵하였다가 “어떤 종승(宗乘)이 있단 말인가?”라고 말하였다. 제자가 다시 가르침을 달라고 청을 하니, 진묵은 마지 못해서 말하기를 “명리를 추구하는 승려(名利僧)이긴 하지만 청허휴정(淸虛休靜)의 계보에 속한다”고 하였다. 마침내 편안하게 입적하니 세속 나이 72세, 법랍은 52세다. 계유년(1632) 10월28일이다. 
 

망해사 앞 바다.
망해사 앞 바다.

김제=박부영 상임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08호/2019년7월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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