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기록 ‘잃어버린 성지’] <6> 서울 흥천사
[현장기록 ‘잃어버린 성지’] <6> 서울 흥천사
  • 박봉영 기자
  • 승인 2019.08.05 15: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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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암흑기 딛고 불자·시민의 품 돌아온 성지

조선왕조 개창과 함께 건립
승록사 선종도회소 둔 본찰
정화 당시 대처승 불법 점유
사찰역할 못해 ‘귀신 절’ 전락

2011년 환수후 대대적 정비
지역민에 열린 도량 탈바꿈
역사·종교성 회복 ‘모범사례’
서울 흥천사는 대처승측의 불법점유로 사찰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2011년 당시 총무원장특보단장 금곡스님(총무원 총무부장)이 불법점유 문제를 전격적으로 해결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비로소 불자와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 정상화 이후 8년째 도량정비 불사가 진행 중이다.
서울 흥천사는 대처승측의 불법점유로 사찰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2011년 당시 총무원장특보단장 금곡스님(총무원 총무부장)이 불법점유 문제를 전격적으로 해결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비로소 불자와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 정상화 이후 8년째 도량정비 불사가 진행 중이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 삼각산 자락에 위치한 흥천사는 수년째 정비불사가 한창이다. 쇠락했던 전각은 개보수되고 손대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됐던 경관은 말끔히 정비됐다. 최근에는 모임장소 하나 없는 옛 모습을 탈피해 보다 많은 대중이 모일 수 있는 건물불사가 진행되고 있다. 산비탈에 지하1층 지상3층 규모로 지어지는 이 건물은 지장전과 무량수전, 각종 사무공간 등이 들어가는 다목적 문화센터다. 

흥천사가 최근 진행해온 건축 불사는 각별한 의미가 담겼다. 과거로부터 전승되어온 사찰의 모습을 간직하면서도 요즘의 문화에 맞는 시설을 갖추는 불사이기 때문이다. 전각 규모가 작고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장소가 없는 한계를 벗는 과정인 셈이다. 다른 도심사찰에 비해 꽤나 늦은 흥천사의 변화는 현대 한국불교의 상처가 담겼다. 한편의 대하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흥천사에서 벌어졌다. 

흥천사는 1954년 정화가 시작된 이후 대처승의 불법 점유를 해결하지 못해 사고사찰로 남았다. 암흑기다. 이 기간 사찰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했다. 2011년 조계종 총무원이 당시 총무원장특보단장 금곡스님(총무원 총무부장)을 주지로 임명해 대처승 측과 전격적인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정화에 성공했다. 65년을 이어온 길고긴 점유가 마무리됐다. 잃어버린 성지가 역사성과 종교성을 회복하는 대전환을 맞게 됐다. 

하지만 65년의 세월은 흥천사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대처승을 비롯한 친인척들의 민가가 22채가 사찰 내에 세워졌다. 민가는 불법 양도까지 이뤄져 80세대가 흥천사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에 2007년 발생한 불법 토지매각 사건은 존폐 위기로 내몰았다. 이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이미 매각된 토지를 되찾기 위한 조계종단의 승부수가 주지 금곡스님 임명이었다. 금곡스님은 매각된 토지를 되찾겠다는 원을 세우고 종단 승인 하에 100억원 대출 카드를 꺼냈다. 흥천사에 자리잡은 80세대의 민가를 내보내기 위한 재원도 이에 포함됐다. 
 

일제강점기 흥천사 전경. 민가가 사찰과 맞닿아 있다.
일제강점기 흥천사 전경. 민가가 사찰과 맞닿아 있다.

금곡스님이 토지 문제를 해결하고 대처승들과 전격적으로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흥천사 정상화가 급물살을 탔다. 당초 이미 매각된 토지대금의 잔금으로 정상화를 꾀하던 종단의 입장에서는 최상의 방향이었다. 이로써 흥천사는 65년의 암흑기를 마치고 다시 빛을 발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

흥천사는 조선시대 불교의 흥망성쇠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조선 건국과 함께 왕릉의 제례를 관장하는 능침사찰로 창건돼 오늘에 전하는 사연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조선 건국조인 태조 이성계는 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건국 2년만에 세상을 떠나자 도성 내에 정릉(貞陵)을 조성했다. 지금 영국대사관이 있는 정동이 그 자리다. 흥천사는 정릉의 명복을 비는 원당으로 함께 건립됐다.

1396년 불사가 시작돼 이듬해인 1397년 완공됐다. 불교와 스님들을 관장하는 관청 승록사를 흥천사에 두었다. <정릉원당조계종본산흥천사조성기>를 비롯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소상히 남아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인출해 흥천사 사리전에 3질을 봉안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조선 3대 임금 태종대에 정릉이 성북으로 이장될 때 흥천사도 함께 이전했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자리잡은 것은 이 때의 일이다. 이름도 신흥사로 바뀌었다.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된 세종대에는 선종도회소가 흥천사에 설치됐다. 흔히 서울 강남 봉은사를 선종수사찰로 알고 있는데, 이는 조선 중기 명종대에 바뀐 것이다. 신흥사 이전에도 불구하고 흥천사는 왕실사찰로 그대로 존재하다가 연산군대에 소실되면서 폐사됐다. 
 

65년의 불법점유 기간 동안 대처승측 22가구 80세대가 사찰 내 흉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사찰은 제기능을 하지 못했다.
65년의 불법점유 기간 동안 대처승측 22가구 80세대가 사찰 내 흉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사찰은 제기능을 하지 못했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신흥사가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 18세기 후반에 이르렀을 때다. 신덕왕후가 왕후로 복위되면서 대대적인 중수가 이뤄졌다. 전각과 불상, 불화가 새롭게 조성됐고 산내암자 적조암(지금의 적조사)이 세워졌다. 흥천사라는 이름도 다시 찾았다. 흥선대원군이 쓴 흥천사 현판이 지금도 대방에 걸려 있다.

흥천사와 조선 왕실의 인연은 근대에도 이어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이 5세 때 쓴 글씨가 흥천사에 전해진다. 영친왕을 낳은 순헌귀비 엄씨는 흥천사 극락보전과 독성각 중창 시주자로도 참여했다. 조선의 마지막 왕비 순정효황후 윤씨가 한국전쟁 때 흥천사에서 피난생활을 하기도 했다. 조선 건국과 멸망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와 함께 해 온 흥천사가 정화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양으로 남은 것은 현대불교사의 아픔이 아닐 수 없다. 

불법 점유 65년의 세월은 흥천사를 ‘귀신절’로 바꾸어 놓았다. 관리되지 않은 전각은 물론 민가가 사찰 내에 위치해 흉물처럼 자리 잡았다. 도량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폐쇄적인 공간이 돼버렸다. 그동안 주변은 아파트와 주택들이 들어서고 새로 도로가 나는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정체된 흥천사와 달라진 주변이 대조적인 상황이 됐다.

다시 사찰의 기능을 되찾은지 8년, 흥천사는 탈바꿈했다. 무엇보다 도량이 불자와 시민들 품으로 돌아왔다. 흥천사는 잃어버린 성지를 되찾은 이후 가장 먼저 삼각선원과 어린이집을 도량 내 새로 건립했다. 젊은 세대를 사찰로 불러들이는 동시에 아이들이 사찰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수행도량의 회복, 서울의 사찰, 새로운 출발의 상징성을 삼각선원과 어린이집 불사에서 읽을 수 있다. 24시간 도량을 개방해 인근 시민들의 휴식처로 거듭난 등 이후 달라진 흥천사의 변화는 되찾은 성지의 모범사례라 할만하다. 

흥천사 정상화 이후 가장 먼저 민가가 있던 자리에 어린이집이 들어섰다. 도심 속 수행도량의 회복을 알리는 상징적인 첫걸음이다.
흥천사 정상화 이후 가장 먼저 민가가 있던 자리에 어린이집이 들어섰다. 도심 속 수행도량의 회복을 알리는 상징적인 첫걸음이다.

[불교신문3507호/2019년7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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