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문제만 생기면 늘 사찰 재정을 탓할까?

2012년 종단 쇄신방안 핵심은
스님은 수행, 재정운영 재가자
사찰 회계법 근대적 방식 개선
이전에도 사찰재정 개혁 화두
문제는 여전히 해결 안되고…

종단이 시끄러울 때마다 사찰 재정에서 문제 원인을 찾아 다양한 해결책을 내놓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사진은 2015년 승가공동체 회복을 위한 해결책을 놓고 벌어진 100인 대중공사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종단이 시끄러울 때마다 사찰 재정에서 문제 원인을 찾아 다양한 해결책을 내놓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사진은 2015년 승가공동체 회복을 위한 해결책을 놓고 벌어진 100인 대중공사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승가공동체가 빈부차이로 얼룩진 원인은 무엇인가? 사찰이 원인이라는데 아무런 이의가 없다. 사찰은 삼보정재가 모이고 나가는 저수지며 정거장이다. 노스님들은 1950~70년대 스님들이 ‘주지 맡으라 하면 불에 데인 것처럼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그 말 뒤에는 ‘요즘은 너도나도 주지 할려고 해서 큰 일’이라는 한탄이 뒤따른다. 

빈부 격차 원인 사찰

사실이다. 재화는 물론 권위 명예까지 모두 주지 스님이 갖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래서 종단개혁 혁신 이야기가 나오면 늘 사찰재정 투명화가 방안으로 거론된다. 지난 2012년 백양사에서 벌어진 승풍 실추사건으로 종단이 곤욕을 치르면서 내놓은 대책이 이를 잘 보여준다.

사건이 불거진 후 종단은 혁신위원회를 설치하고 다양한 개혁방안을 제시했는데 핵심은 사찰재정이다. 승단의 가장 큰 문제가 재정이며 재정은 사찰에서 발생한다는 문제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해 6월 당시 총무원장 자승스님은 대국민담화문에서 이렇게 문제를 진단했다. 

“이제 사찰은 한국사회의 고도성장 과정에서 그 규모도 커지고 역할도 많아졌기 때문에 관리운영 체계도 전문적이고 엄정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스님들이 사찰경제를 직접 책임지고 이끌어왔지만 수행과 관리를 병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스님들의 순수한 신심과 헌신에 기대어 소박하게 사찰을 운영하는 방식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 수십 년 간 사찰과 종단운영 과정에서 빚어진 각종 부작용과 분규, 그리고 갈등의 본질은 사찰과 종단 운영 시스템이 시대의 필요성에 부응하지 못하고 체계적이고 전문적이지 못한데서 빚어진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불거진 종단 일각의 불미스러운 일들도 이러한 전근대적인 사찰운영제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사찰과 종단운영이 체계적이고 근대적이지 못한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총무원장 스님이 지적한 것이다. 체계적이지 못한 종단운영은 사찰 회계 시스템을 말한다. 그래서 당시 종단은 사찰재정을 어떻게 투명하게 관리하는가에 맞춰 다양한 개혁안을 내놓았다.

당시 총무원장 자승스님은 담화문에서 자성과 쇄신불사 방향을 이렇게 제시했다. “첫째 출가 승려는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고, 신도는 스님들과 사찰에 대한 외호와 보살행 실천을 통한 사회봉사에 힘쓴다. 둘째 사찰은 스님들의 지도로 운영하되, 경제적 관리업무는 재가 전문종무원(淨人= 관리인)이 담당하고 스님들과 신도들로 구성된 엄정한 감독체제를 갖춘다. 

셋째 사찰의 재정관리 제도의 투명성과 합리성을 제고시키고 사찰에서 형성된 정재(淨財)는 사찰 관리운영, 포교와 사회공익사업, 승가복지사업으로 엄정하게 사용한다. 넷째 종단과 사찰을 이끌고 지도할 공직 소임자를 선출하는 제도를 불교 정신에 부합되게 정비한다. 다섯째 현대사회에서 출가승단이 준수할 청규를 별도로 제정하여 모든 스님들이 화합 속에 여법히 수행하고 포교할 수 있도록 한다.”

사찰재정 개혁이 종단개혁

이러한 개혁 방안은 부처님 당시의 승가공동체 운영 원칙과 일치한다. 출가수행자는 수행 교화에 전념하고 신도는 물질로 수행자를 공양하는 출재가 역할 구분이 부처님 당시 승가의 모습이었다. 재정만 투명하게 하거나 재가자들에게 맡기면 승가공동체도 자연스럽게 회복된다는 의미다. 이는 거꾸로 공동체의 파괴가 돈으로 인해 빚어진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러면 당시 제시한 결사는 어떻게 됐을까? 제도는 마련됐다. 사찰회계법을 제정하고 입출관계를 투명하게 전산으로 보고토록 했다. 하지만 운용은 변한 것이 없다. 종단에서 법을 만들고 전산으로 강제한다고 해서 수 십년 동안 쌓인 관습이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사찰재정이 문제의 근원이며 승가공동체 회복을 위해서는 이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는데 모두 공감한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찰이 처음부터 개혁 대상으로 몰렸던 것은 아니다. 사찰이 문제의 근원으로 등장한 시기는 사찰에 돈이 들어오면서 부터다. 사찰의 성장과정은 한국경제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 우리 사회가 산업화로 부를 축적하면서 종교계 부(富)도 늘어났다. 

한국종교계가 부를 축적하는 과정이 모두 같지는 않다. 교회가 산업화, 도시화 길을 걸은 한국사회 발전과 궤를 같이한 반면 사찰은 산중사찰과 도심포교당, 도시 근교 전통사찰 등 처한 위치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성장했다. 한국사회가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했듯 교회 역시 부동산 성장에 몸을 맡기며 성장한 반면 불교는 오히려 그 과정에서 엄청난 면적의 부동산을 빼앗긴 점은 결정적인 차이다.

산중 전통사찰은 산업화로 중산층 반열에 들어선 도시인들의 여가증진과 함께 관람료 수입이 증대하면서 부가 늘어났다. 이 때문에 조용하던 산사가 오염됐다. ‘정화’라는 이름으로 사찰을 뺏고 빼앗는 폭력이 1990년대 초반까지 일반 언론 사회면을 장식했다. 관람료가 사찰 수입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도심사찰도 급속히 성장했다. 특히 서울 부산 등 대도시의 성장이 가팔랐다. 한국사회 전체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한다. 도심 사찰은 교회의 성장과 유사한 패턴을 밟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사찰은 중산층과 함께 성장했다는 점이다. 예전에 논밭이었던 벌판에 터를 잡고 그들과 기도하면서 함께 성장했다. 도심 포교당 뿐만 아니라 도시 주변 전통사찰도 도시 확장과 교통의 발달 덕분에 신도와 관광객이 밀려들면서 급성장했다. 

사찰에 돈이 몰리면서 문제 시작 

한국사회 성장과 더불어 교회나 사찰이 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문제는 왜 성장의 과실이 특정 몇몇에게 국한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승가공동체 운영 원칙에 따르면 재화가 들어오는대로 공평하게 분배하면 소외나 빈부 격차와 같은 비판이 나올 리 없다.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불평등이 일어나는 과정을 이렇게 말했다. “어떤 한 사람이 능력이나 덕망 재산이나 개인적인 영향력에서 남보다 뛰어났다면, 그 사람만이 행정관으로 선출되고 이로써 국가는 군주제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만일 우열을 가리기 힘든 사람들이 몇명 있다면 그들은 함께 선출되어 귀족제를 형성했다. 재산이나 재능이 그다지 불균형하지 않고 자연 상태에서 그리 멀리 이탈하지 않은 사람들은 최고의 행정권을 보유하는 민주제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루소는 원래 평등했던 인간이 소유가 발생하면서 불평등이 일어나고 정부와 국가가 그 대리인을 맡으면서 불평등이 가속화됐다고 말한다. 이를 승가공동체에 대입시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루소의 말대로 소유가 발생하면서 이를 대중으로부터 위임받아 지배하는 ‘행정관’이 주인으로 행세하고 권리를 위임한 대중은 빈자로 전락하는 불평등이 발생하는 양식은 닮았다. 루소가 말하는 행정관은 정치지도자로 종단으로 치면 주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국민들의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인인 정치가처럼 주지 역시 대중을 대표해서 사찰을 외호하고 대중을 모시는 대리인이다. 

대중의 ‘행정관’ 주지는 처음에는 누구도 맡기 싫어하는 기피 소임이었다. 주지 맡으라 하면 놀라 도망갔다는 노스님들의 회고담이 그 시절을 말해준다. 가난했던 그 시절의 사찰은 오직 공부하는 도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부처님 당시부터 사찰은 출가수행자들이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는 공간적 기능이 전부였다. 

우리 종단이 출범한 정화 역시 마음 놓고 참선수행할 수 있는 사찰의 필요성 때문에 시작했다. 부처님 당시처럼 독신수행승 전통을 이어오던 한국불교는 일제가 대처승을 도입하면서 왜곡됐다. 대처승들은 승가공동체를 유지하는데 사용해야할 토지 등 사찰 재산을 주지와 그 권속 가족의 생계와 출세 수단으로 변질시켰다. 수행 공부하는 승가공동체가 이 때 처음 무너졌다.

토지를 기반으로 정계 학계 등에 진출하여 사회 지도자로 성장한 대처승과 그 가족과 달리 독신 수행승들은 양식조차 구할 길 없어 토굴을 전전해야 했다. 이러한 비참한 처지는 해방이 된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해방 후 토지를 갖추고 접근하기 용이한 18개 사찰 할당을 요구했다가 해당 사찰의 주지가 거부하자 전면적 정화로 이어졌다. 

주지직 원래는 기피 자리

사찰의 쓰임새는 이처럼 스님들 수행 뒷바라지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그 역을 떠맡은 주지 스님은 가장 극한 일에 내몰릴 수 밖에 없었다. 원철스님(불교사회연구소장)은 불교신문에 연재한 ‘주지론’에서 주지직이 얼마나 힘든 소임인지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모 원로스님이 성철스님 모시고 총림의 주지를 할 때 일이다. 대중들이 하도 소임자들에게 어긋장을 놓는지라 도저히 속이 시끄러워 살 수가 없었다. 수좌답게 걸망을 싸버릴까 어쩔까 하다가 그래도 형식은 갖추어야 하겠기에 백련암으로 올라갔다. 사표장을 호주머니에 넣고서. 저간의 사정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성철스님께서 한마디 하였다. ‘그래도 그런 대중이라도 있으니 니하고 내하고 다 어른노릇하고 사는거 아이가.’ 그만 말문이 딱 막혀 버렸다. 호주머니 속 사표는 꺼내보지도 못한 채 큰절로 내려와야만 했다.” 

이처럼 극한 직업 주지, 서로 맡기 싫어 사표장을 품에 안고 다니던 주지직이 어떻게 해서 서로 가고 싶은 선망의 자리로 바뀐 것일까? 

[불교신문3505호/2019년7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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