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여년간 시대의 한가운데 섰던 동해 명찰

고려 신라 백제 땅 접경
백두대간 길목 동해안에
삼국 화합 국태민안 발원
근대화와 승가교육 위해
본래 있던 자리마저 내줘

적광전 앞에서 바라본 삼화사 전경. 1300여년 간 늘 우리 역사의 한복판에서 중요한 순간을 함께한 가람이다.
적광전 앞에서 바라본 삼화사 전경. 1300여년 간 늘 우리 역사의 한복판에서 중요한 순간을 함께한 가람이다.

강원도 동해(東海)는 신생 도시다. 1980년 당시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을 통합해 만들었다. 11세기 초까지는 삼척 소속이었다. 삼척은 진한을 거쳐 신라에 복속됐다. 1980년 동해시로 승격한 것은 산업화 때문이었다. 2000년 금강산 가는 뱃길이 열리면서 동해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동해에서 출항한 배가 북의 장전항으로 들어가 금강산 관광을 열었다. 신도시 동해시(東海)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은 삼화사(三和寺)다. 동해시 두타산 무릉계곡에 자리한 1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이다. 

신생도시 동해의 천년고찰

두타(頭陀)는 스님들의 고행 정진을 뜻하는 불교용어다. 산스크리트어 ‘dhuta’를 소리나는 대로 음역한 두타(頭陀)는 부처님 당시부터 스님들의 수행생활을 뜻한다. 두타 12행이라 해서 의식주에 관한 12가지 생활규범이다. 인가에서 떨어진 조용한 곳에 머물며 걸식을 하고 하루 한 끼 먹으며, 남이 버린 낡은 옷을 입고 눕지 않고 늘 앉아 조용히 무상관을 닦을 것 등이다. 산 이름이 수행자를 일컫는 용어가 붙었으니 불연(佛緣)이 예사롭지 않다.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군 하장면과 미로면 사이에 있는 두타산 높이는 1350m이다. 태백산맥 동단부에 위치한 두타산은 동서간 분수령을 이루면서 동쪽으로 동해를 굽어보는 명산이요 지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산 정상 쪽은 성을 세워 외적 방어에 적합하고 동해 쪽으로는 계곡이 길게 드리워져 무릉도원을 연상케 할 정도로 절경이다. 삼화사는 계곡 가운데 자리했다. 원래는 계곡이 끝나고 바다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했지만 산업화로 인해 그 자리를 내어주고 산 속 깊이 들어왔다.

지난 3일 찾아간 삼화사는 아름다웠다. 무릉계곡에는 여느 때처럼 맑고 시원한 물이 넘쳐흘렀다. 7월이 막 시작된 동해의 하늘은 뜨거운 태양빛이 작열했다. 잠시도 햇볕 아래 서있기 힘들 정도로 햇볕은 뜨겁게 내리 쬐었다. 그 빛을 두타산의 숲이 온몸으로 막아 그늘을 드리웠다. 삼화사 계곡을 따라 두타산으로 많은 사람이 올라가고 내려왔다.
 

적광전 안의 철불.
적광전 안의 철불.

스님들 수행 일컫는 두타산 

험준한 태백산맥을 넘나드는 길목에 자리한 탓에 삼화사 일원은 고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하게 싸우던 국경이었다. 지리적 위치 때문에 삼화사는 창건 후 천년을 넘는 세월을 역사의 한 가운데 섰다. 천년고찰은 많지만 줄곧 한 시대를 대표하는 역사의 가운데 서있던 사찰은 거의 없다. 대부분 한 때 주인공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삼화사는 창건부터 지금까지 늘 시대의 한 가운데를 지켰다.

많은 천년고찰이 그러하듯 삼화사도 역사의 흐름에 따라 부침을 거듭했다. 창건은 자장율사에 닿는다. 신라시대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삼화사를 창건했다. 전설이 전해온다. 신라 서라벌의 귀족 청년 김재량을 연모했던 세 처녀의 이야기다. 진골 출신의 나림, 혈례, 골화 세 여인이 함께 사랑했던 청년 김재량은 전쟁에서 돌아오던 중 목숨을 잃는다. 기다리던 세 처녀는 두타산으로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가 자장율사를 도와 사찰을 세웠다고 한다. 

적광전 안의 보물 제1292호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도 선덕여왕 당시 창건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삼화사고금사적>에 따르면 삼척의 한 포구에 서역에서 온 세 명의 청년이 내렸는데 얼굴은 모두 금빛으로 빛나고 몸에는 가사를 걸치고 손에는 연꽃을 들었다. 

검은 연꽃을 든 장자가 두타산 삼화촌에 머물렀고 둘째는 야트막한 구렁이 있는 지상촌에, 셋째는 궁방촌에 머물렀다. 인품이 훌륭한 이들 삼형제를 찾아 수많은 사람이 불교에 귀의했으며 큰형은 흑련대, 둘째는 청련대, 셋째는 금련대라는 사찰을 창건했으니 바로 삼화사 지상사 영은사다. 약사삼형제는 철불로 등신을 남기고 두타산을 떠났다. 

영험있는 철불이라 많은 화제를 낳았다.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타 중대사로 옮겼는데 장마가 들어 중대사도 무너지고 철불이 땅에 묻혔다. 밭을 갈던 농부가 발견해 삼화사로 옮겼다가 골동품상이 밀반출해서 묵호로 가져갔다. 묵호에 주재하던 기자의 꿈에 철불이 나타나 현장을 가니 꿈에서 본대로 철불이 숨겨져 있었다. 경찰이 골동품상을 체포하고 철불은 다시 삼화사로 돌아왔다.
 

신라 창건설을 뒷받침하는 석탑.
신라 창건설을 뒷받침하는 석탑.

영험 많은 철불 전설

이 이야기는 두타산이 세 나라의 각축장이었고 삼화사가 삼국전쟁에서 승리한 신라 주도로 창건했음을 보여준다. 동해시는 기원전 1천여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당시 유물이 나왔다. 2세기 초 ‘실질국(悉直國)’이라는 이름의 부족국가로 있다가 신라에 복속된다. 그러나 북쪽의 고구려와 동해로 진출하려는 백제도 이 곳을 탐내 두타산 일원은 삼국의 각축장이 된다.

그래서 선덕여왕 8년 (639) 진주도독부(眞珠都督府)로 승격시키고 방비를 강화하는데 삼화사가 최초로 개창된 것도 이보다 20~30년 뒤로 추정한다. 삼화사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이처럼 삼국의 쟁패를 놓고 다투던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동해 일대는 신라가 통일 한 뒤 정치적 군사적 위상이 더 올라간다. 동해안변을 따라 북쪽에서 밀고 오면 곧바로 신라의 수도 경주에 닿는 만큼 수도 방위와 직결되는 지역이다. 그렇다 해도 경주에서는 한 참 떨어진 변방이다. 해안을 따라 중앙 정치 무대에서 밀려난 이들이 강릉과 그 인근으로 밀려왔다.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김주원이 대표적이다. 그는 강릉 김씨 시조다. 도의국사가 중국에서 도입한 선종이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곳 역시 동해 일원이다. 

범일국사 의해 대찰로 성장

강릉 일대에 자리 잡은 강릉김씨 호족과 선(禪)이 만나니 곧 굴산산문이다. 개창조 범일국사는 중국 마조 도일의 법을 이은 선사로 그 역시 강릉김씨 집안 출신이다. 삼화사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대찰로 번성한 것도 범일국사에 의해서다. 삼화사는 굴산산문의 수사찰이었다. 자장율사가 창건했으나 그리 큰 이름을 얻지 못했던 삼화사는 범일국사에 의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범일국사는 삼공(三公)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강릉 단오제의 주신이 바로 범일국사다. 그만큼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범일국사에 의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삼화사는 고려 왕건에 의해 고려 시대 내내 왕조의 보호를 받는 왕실 사찰로 다시 한번 사격을 신장하고 역사와 함께 한다. 동해 일원은 후삼국 시절 삼국이 쟁투를 벌이는 각축장이었다. 937년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병합하여 완전한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따랐다. 

통일전쟁으로 가족과 재산을 잃은 후삼국 유민들의 슬픔과 불만을 달래는 것은 왕조의 숙제였다. 태조 왕건은 전국의 인연 있는 사찰에서 천도재를 베푸는 등 민심 수습에 나섰다. 부처님의 자비로 얼어붙은 민심을 달래고 국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노력이었다. 

삼화사는 그 중심이었다. 삼국을 재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은 세 나라의 명운이 걸린 전쟁터에다 서로 화합 협력하자는 의미에서 삼화(三和)라는 이름을 지었다. “태조께서 임금이 된 후 이 절에 조칙을 내려 절 이름을 문안에 기록하고 후사에 전하게 했다. 신성왕께서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그 영험이 현저하였으므로 이 사실을 이용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라고 고쳤다”고 역사는 전한다. 

고려의 창업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만큼 고려시대 삼화사는 번성을 누렸다. 관음 지장 미타 나한 보질도 등 전각과 당우가 무려 24방에 이르고 많은 산내 암자를 거린 동해 최대 규모의 왕실의 후원과 관심을 받은 사찰이었다. 고려 충렬왕 때 간관(諫官)이자 시인인 동안거사 이승휴(李承休, 1244~1300)가 외가 인 이곳에 머물며 삼화사에서 불경을 빌려 읽고 ‘제왕운기’를 짓기도 했다. 
 

무릉 계곡.
무릉 계곡.

고려 조선 창업과 인연

고려의 창업과 함께 했던 삼화사는 고려가 막을 내리고 조선이 문을 열 때도 함께 있었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삼척지방으로 유배됐다가 궁촌에서 교살된다. 태조 이성계는 이들 고려 왕족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동해 남해 서해에 수륙대재를 봉행하는데 동해는 삼화사가 그 역을 맡았다. 이것이 무형문화재인 삼화사국행수륙대재다. 

조선 정부가 공인한 수륙대재를 봉행하는 사찰이라는 사격 때문에 삼화사는 억불시대에도 탄압받지 않고 사세를 유지했다. 삼화사 역시 국찰로서 그 역할을 다했다. 임진왜란 때 삼화사는 관군과 의병들의 병참지원을 했다. 그로 인해 왜군에 의해 불타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민족과 운명을 함께 했기에 유학의 지배 아래서도 삼화사는 지역의 자랑으로 남았다. 

삼화사는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산업화의 기초인 시멘트 원료가 되는 석회암 산지 한 가운데 삼화사가 자리했다. 이에 쌍용양회는 조계종단과 협의하여 보상금을 내고 삼화사를 지금의 무릉계곡 자리로 옮겼다. 종단은 그 보상금으로 스님들 교육기관, 중앙승가대학을 만들려 했다. 당시 종단은 현대식 승가교육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강원을 다시 열고 동국대 불교대학에 장학승 제도를 마련했지만 스님들만의 현대식 학교에 대한 욕구는 채워지지 않았다. 

근대화 위해 기꺼이 희생

국가는 많은 석회암을 파내 도로를 닦고 건물을 세우는 산업발전이 급선무였다. 절을 원래대로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와 국민의 행복과 안위가 더 중요했다.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백성과 나라의 평화를 기원하였으며 나라가 외적의 발굽에 밟혀 신음할 때는 폐찰을 각오하고 전쟁에 나갔던 삼화사는 배불리 먹고 잘 살아보겠다며 몸부림 치는 나라에 그 몸마저 모두 내놓았다. 

삼화사는 이처럼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장 중요한 시기 가장 극적인 순간을 함께 했다. 그리고 모든 순간 백성들의 이익 나라의 명운을 앞세웠다. 오늘날 삼화사에는 휴식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아름다운 무릉계곡과 나무가 우거진 두타산은 지친 몸을 쉬려는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삼화사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원래 삼화사가 있었던 쌍용양회 공장 모습.
원래 삼화사가 있었던 쌍용양회 공장 모습.

동해=박부영 상임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04호/2019년7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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