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는 없어서 불편한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402년, 서라벌 월성

실성이 귀국한 이듬해, 내물왕은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내물왕은 오랫동안 왕의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긴 재위 기간 내내 끊임없는 전쟁과 흉년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허리가 굽었을 무렵엔 백제와 연합한 왜군이 신라의 국토를 짓밟고 백성들을 약탈했다. 내물왕은 신라에 구원군으로 온 고구려의 장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여 나라와 백성을 지켰다. 내물왕의 인생에서 기쁨은 오직 늦게 얻은 왕비 보반 부인에게 세 아들, 눌지와 복호, 미해를 얻은 것이었다. 

장례에 참석한 고구려 장수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님도, 극락왕생을 위한 염불도 없는 왕의 장례가 너무 낯설었기 때문이다. 실성은 입으로 곡을 하고 있었으나 눈은 웃고 있었다. 내물왕의 세 아들은 어렸고 태자 눌지도 아직 스물이 채 되지 않았다. 신라의 왕족과 귀족들은 고구려 군사와의 친밀해 보이는 실성이 두렵고 부러웠다. 전쟁에 승리하여 백제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가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기세만으로 왜군을 물리친 고구려가 아니던가. 고구려와 적이 된다는 것은 멸망을 의미했다. 신라가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것은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 그 동맹의 중심에 실성이 있었다. 비록 실성은 인질로 고구려에 갔으나 지금은 고구려 대왕과 장수들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화백회의에서는 어린 눌지 태자를 대신하여 실성이 왕위에 오를 것을 결정했다. 

그토록 원했던 마립간의 자리에 앉게 된 실성은 숙부 내물왕에게 복수를 다짐했다. 담덕은 사신을 보내 내물왕의 승하를 애도하고 실성의 즉위를 축하했다. 고구려 대왕의 축하와 고구려 군사의 호위를 받으며 실성은 위풍당당하게 왕위에 올랐다. 이제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아들을 얻는 것이었다. 하루빨리 아들을 낳고, 오래도록 왕의 자리를 지켜 조카 눌지가 아니라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그 전에 눈에 거슬리는 조카들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실성은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나는 왜에, 하나는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면 되겠군.”


“사찰입니다
아, 스님도 안 계십니다 
법문 듣고 예배 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실성은 곤란한 듯 
미간을 한껏 좁혔다 

“게다가 신국에서 
사찰을 세우거나 
스님을 공인하는 것은 
귀족들 허락을 받아야 하니…”
실성은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췄다


고구려 군사가 원하는 것

왕위에 오르자마자 실성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고구려 군사에게 술과 고기를 푸짐하게 베푼 것이었다. 선왕을 애도하는 기간에는 금주가 원칙이었으나 실성은 개의치 않고 직접 고구려 장수들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고구려 군사가 자신의 편이라는 것이 실성은 진정으로 흐뭇했다. 왕위에 오르고 나니 지난 10년의 고생이 억울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위를 축하드립니다.”

“고맙소. 참으로 고맙소. 고구려에 내 청춘을 바쳤다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받은 것이 더 큰 것 같소.”

“10년이면 긴 세월입니다. 전투 한 번 치러보지 않고 오신 분께서 잘 버티신 거지요.”

“맞소. 고구려에 갔을 때 검 쥐는 법도, 창을 쓰는 법도, 군사를 다루는 법도 모르는 애송이였소. 이제는 장군과 마주하여 술을 마시고 있으니 대왕의 은혜가 하늘같소.”

실성은 월성으로 초대한 고구려 장수들과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거나하게 술이 오른 실성이 호기롭게 말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뭐든 말해보시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소.”

“선왕께서 이미 많은 배려를 해주셨는데 어찌 더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선왕이라는 말에 실성의 미간이 좁아졌다.

“선왕은 선왕이고, 지금은 내가 마립간이오. 타향살이라면 나도 해볼 만큼 해봤소. 아무리 배려를 받는다 해도 불편한 것이 있지 않소?” 

“마립간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걸 보니, 고구려에 계실 때 서운하신 것이 있으셨나 봅니다.”

담덕의 신임을 받는 백전노장 염 장군의 말에 실성은 뜨끔해진 마음을 내색하지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내, 오늘 장군께 말하리다. 사실, 고구려에 갔을 때 편히 지낼 줄 알았는데 대왕께서 군사들과 지내라고 하셨을 때 깜짝 놀랐다오.”

“하하하하, 알고 있었습니다. 저희 모두 다 알고 있었지요.”

“아니, 내가 그렇게 티도 안 내고 묵묵하게 열심히 지냈는데 다 알았단 말이요?”

“네, 정말 티 많이 났습니다. 군 생활 안 해본 티도 확실히 나셨지요.”

“덕분에 지금 최고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고구려 군사들과 10년을 군영에서 보낸 최초의 신라 군주가 되지 않았겠소?”

실성의 고백 아닌 고백에 또 한 번 웃음이 쏟아졌다. 

“한 가지 청이 있긴 있사옵니다.”

장수들과 눈빛을 교환한 염 장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제야 털어놓는 거요? 어서 말해 보시오.”

“고구려에는 있는데 신라에는 없는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고구려는 대국이고 신라는 이렇게 작은 나라인데 어디 딱 하나뿐이겠소? 내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열 개가 넘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없어서 불편한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사찰입니다. 아, 스님도 안 계십니다. 법문을 듣고 예배를 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실성은 곤란한 듯 미간을 한껏 좁혔다. 

“아, 그거는 좀 쉽지 않은 일이오. 아니, 어려울 것 같소. 신라의 백성들이 신라를 신국(神國)이라 부른다오. 신국에는 신국의 법과 신국의 도리가 있소. 내가 고구려에서 지내면서 대왕을 따르지 못한 유일한 것이 바로 부처님이라오.”

“역시 아니 되는 것이군요. 혹시나 해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아쉽습니다.”

“게다가 신국에서 사찰을 세우거나 스님을 공인하는 것은 귀족들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오. 그러니.”

실성은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니 들키지 말고 고구려 거리에서 몰래몰래 예배도 보고, 법회도 보면 되지 않겠소? 너무 눈에 띄지 않게, 들키지 않게.”

초문사, 고구려 국내성 

“스님을 모시고 싶다는 전달이 왔다고요?”

평양의 승려 혜성이 가지고 온 소식에 순도의 눈이 커졌다. 신라에 남은 고구려 군사들로부터 승려와 불상을 보내달라는 전갈이 평양으로 왔다고 한다. 

“먼저 대왕께 아뢰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대왕께도 곧 아뢸 예정입니다. 헌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정식으로 사신을 보내달라는 것이 아니었기에 순도스님께 의논을 드리고 함께 대왕을 뵈러 가려고 합니다.”

“대왕의 명을 받은 스님이 불상을 가지고 신라로 가게 될 텐데 정식 사신이 아니라면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신라는 아직 불교가 전해지지 않았고, 왕족들이나 귀족들, 백성들도 불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은밀하게 신라에 다녀온 스님들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위로는 백제를, 옆으로는 가야를 두고 심지어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있는데도 그렇단 말입니까?”

“신라인들은 스스로 신라를 신국, 신의 나라라고 부르는데 신국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고 한답니다.”

“그럼 신라에 가게 될 스님은 어떤 명분으로 가시게 되는 겁니까?”

“그 명분을 찾아야 합니다. 대왕을 설득할 명분을 말입니다. 고구려 군사들이 부처님께 예배하지 못하고 스님을 뵙지 못한 지 몇 달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오죽하면 술자리에서 실성왕에게 스님을 모시는 것을 부탁하여 허락을 받았겠습니까?”

순도의 주름진 얼굴이 무거워졌다. 구법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신라에 간다면 그 스님은 수미산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셈이었다.

“하아….”

순도의 한숨이 깊어지자 덩달아 혜성의 입에서도 한숨이 흘러나왔다. 

[불교신문3504호/2019년7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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