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씨름 활쏘기 말달리기로 새로운 영웅 선발

몽골의 설날 ‘차강사르’에 새 옷을 입고 음식을 먹는 모습. ⓒkotra china
몽골의 설날 ‘차강사르’에 새 옷을 입고 음식을 먹는 모습. ⓒkotra china

길상의 하얀 명절, 차강사르

의식주를 온통 흰색으로 갖추고 새해를 맞는 이들의 마음은 참으로 정갈할 것이다. 13세기에 몽골을 방문했던 마르코 폴로는, 당시 군주인 칸(Khan)과 백성 모두가 흰옷을 입고 흰색 물건을 주고받으며 서로 껴안고 기쁘게 잔치를 벌이는 몽골사람들의 풍속을 〈동방견문록〉에 기록했다. 하얀 게르에 사는 그들은 지금도 설날이면 가축의 젖으로 만든 흰 음식에 하얀 하닥을 펼쳐 새해인사를 나누고, ‘하얀 마음’으로 정성어린 ‘하얀 덕담’을 주고받는 가운데 한 해를 맑고 성스럽게 열어간다. 

몽골사람들은 설날을 ‘하얀 달’이라 하여 ‘차강사르’라 부른다. 흰색을 뜻하는 ‘차강’이란 말은 상서롭고 좋은 일을 나타내는 관용어로 쓰여 고운 마음씨를 ‘차강사나’, 맛난 음식을 ‘차강이데’라 표현한다. 따라서 설날인 차강사르는 열두 달 가운데 가장 좋은 달이란 뜻이다. 본래 가축의 젖이 풍부한 9월을 차강사르이자 한 해의 시작으로 봤으나 13세기 초 칭기즈칸의 부족통일을 기해 태음력의 1월로 바뀌었다. 이 무렵은 혹한이지만 ‘차강사르 다음은 봄’이라는 말을 즐겨 쓰면서 새봄을 기다리는 기쁨과 희망의 달로 맞이하고 있다. 

차강사르는 몽골 최고의 명절이다. 갖가지 명절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해놓고 스님들도 예외 없이 속가를 방문한 가운데 흩어져 살던 전 가족이 모이는 특별한 날이다. 설날 아침에 나누는 세배는 독특하여 아랫사람이 손윗사람에게 흰색이나 푸른색 하닥을 걸쳐드린 뒤 양팔로 윗사람의 양팔을 떠받들면, 연장자는 아랫사람의 볼과 이마에 입을 맞추며 덕담을 해준다. 세뱃돈과 선물 또한 아랫사람이 어른에게 드리고 있어, 노인에 대한 존경과 봉양의 의지가 담긴 아름다운 전통이라 할 만하다. 

섣달그믐 자시(子時)가 되면 사원에서는 묵은해와 새해를 잇는 자비의 기도가 울려 퍼진다. 섣달그믐을 ‘꽉 찼다’는 뜻의 ‘비퉁’이라 부르는데, 한 해를 채우고 새해가 오니 이날 ‘배도 꽉 차야’ 새해에 배를 곯지 않는다 하여 집집마다 ‘보츠’라는 전통만두를 배불리 먹는다. 특히 차강사르를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 그 해 운세가 좌우된다고 믿어 좋은 이들과 다복하고 즐겁게 지냄은 물론, 과음과 다툼을 피하고 사냥과 도축을 하지 않는다. 아침을 먹고 나서는 사원과 어워를 찾아 기원하니 몽골사람들의 설은 ‘하얀’ 명절임에 틀림이 없다. 
 

나담축제의 ‘말달리기’에 출전한 말과 조련사와 기수들. ⓒ세븐데이즈
나담축제의 ‘말달리기’에 출전한 말과 조련사와 기수들. ⓒ세븐데이즈

몽골전사들의 자부심, 나담축제

몽골의 최대명절로 겨울축제인 차강사르와 함께 여름축제인 ‘나담’이 꼽힌다. 차강사르가 혈연 중심의 정숙형 축제라면, 7월 여름의 ‘나담’은 공동체 중심의 개방형 축제이다. ‘나담(Naadam)’은 ‘놀이, 축제’를 뜻하는 고대 몽골어로, 차강사르와 나란히 3일간의 휴일 동안 사람들은 저마다 전통복장으로 거리를 누비며 나라 전체가 떠들썩하게 여름축제를 즐긴다. 

몽골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은 천호제(千戶制)라는 뛰어난 군사조직력을 갖춘 것으로도 이름 높다. 전시에 동원할 수 있는 최소집단을 십호로 하여 십호, 백호, 천호의 대장을 각기 뽑아 하부조직을 다스리게 하면서 95개의 천호를 칸이 최종 지휘했던 것이다. 이때 각 우두머리는 씨름과 활쏘기ㆍ창던지기, 말타기 등으로 병사를 뽑았고, 혈연과 신분을 떠나 능력만 있으면 합당한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개방과 실용의 정치를 펼쳤다. 당시 기량을 겨룬 종목을 연마하는 가운데 공동체의 역동적인 놀이문화로 정착된 것이 바로 ‘나담’이다.

따라서 나담은 다른 나라의 축제와 달리 ‘씨름ㆍ활쏘기ㆍ말달리기’ 경기가 핵심을 이룬다. 강인한 체력과 기량을 지닌 북방유목민 출신의 몽골전사들이 대대로 겨루어온 전통종목들로 해마다 새로운 영웅을 뽑는 것이다.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은 씨름으로, ‘부흐’라 부르는 씨름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체급구분이나 시간제한이 없는 점이 특이할뿐더러, 이긴 자는 두 팔을 독수리 날개처럼 펼쳐든 채 맴돌며 승리를 과시하고 진 사람은 그 팔 아래로 통과하게 하여 승리를 만끽하게 된다. 

나담의 상징이자 백미는 초원을 질주하는 말달리기이다. 초기엔 어른이 출전했으나 십년 전부터 4~7세 아이들이 기수가 되어, 말의 나이에 따라 15~30km까지 여섯 경기로 구분해 달린다. 먼 옛날 그들의 선조처럼 꼬마기수들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말과 하나가 되어 초원을 질주한다. 우승은 가문의 명예이기에 말을 조련시킨 부모에게 관심이 집중되고, 말의 엉덩이에 아이락을 뿌리며 우승자를 축하하는 노래를 불러준다. 꼴찌로 들어온 말을 위한 노래도 있다. ‘위가 꽉 찬 말’이라 부르면서, 말이 너무 많이 먹어 잘 달릴 수 없었다고 기수를 위로하는 훈훈한 풍습이다. 

바람소리 들리는 노래

“새끼양 새끼양, 결혼하고 말을 탔네. 두 개의 법도와 풍습, 존중하며 사세요.” 

전통혼례에서 신부를 신랑 집으로 떠나보낼 때 그들은 어김없이 노래를 부른다. 신랑 측에서 신부 집을 방문해 하닥과 음식 등의 선물을 바치고 나면 함께 음식을 먹는데 이를 ‘잔치 합치기’라 한다. 양쪽 술을 한통에 섞는다는 뜻으로, 위의 노래가사처럼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남녀가 서로 순응하며 하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두 남녀를 맺어주는 중매의 역할을 하고 혼례를 이끌어가는 이를 ‘다’라 부른다. ‘다’는 신랑신부의 친척이 아닌 사람으로 예법에 밝아야 할 뿐만 아니라, 노래를 잘 부르고 시적 운율에 맞추어 축사와 칭찬을 잘하는 이라야 한다. 단순한 중매자요 진행자가 아니라 문학적ㆍ예술적 소양을 지녀야했으니, 드넓은 초원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멋과 흥을 짐작할 만하다. 이처럼 노래와 춤을 즐기며 삶속에서 일상적인 ‘나담’이 수시로 벌어지기에 몽골에서는 가무에 능한 사람이 인기가 높다. 

그들의 노래와 악기소리는 ‘바람’을 떠올리게 한다. 사막과 초원을 스쳐가는 황량한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동물을 부르는 비밀스런 휘파람 같기도 하여 공연장이 아닌 대자연 속에서 듣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소설가 이시백이 남성의 낮고 어두운 저음과 여성의 높고 청아한 고음의 조화에서 ‘몽골인은 푸른 늑대와 흰 사슴의 후손’이라는 신화적 원형을 떠올렸듯, 그들의 음색은 그들이 살아가는 자연과 참으로 닮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흐미(Hoomii)’라는 고유의 창법이다. 흐미에 대한 지식 없이 한 사람이 내는 두 목소리를 처음 접했던 경험은 충격이었다. 장중한 울림의 낮은 음이 베이스를 이루는 가운데 휘파람 같은 화음이 동시에 울려 퍼지는 노래는 몽골의 대서사를 담은 듯 신비롭다. 흐미는 산과 강, 바람과 동물 등의 소리로 자연과 인간을 연결하고 조상과 영웅을 경배하는 장엄한 내용을 담고 있다니, 그들의 독창적인 가창문화에서도 북방유목민의 특성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울란바토르 ‘투멩 에흐’ 전통공연장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들.
울란바토르 ‘투멩 에흐’ 전통공연장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들.

법열 충만한 불교무용 ‘참’

몽골의 노래에서 바람소리가 들린다면, 그들의 춤에서는 말달리는 몸짓이 느껴진다. 역동적인 기마민족의 후손답게 상하좌우로 들썩이는 어깨춤과, 사방을 오가며 힘차게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동작이 활달하기 그지없다. 

몽골의 춤을 말할 때 불교무용 ‘참(Tsam)’을 빼놓을 수 없다. ‘참’은 종교적 기원의 원초적 방식의 하나가 춤이요, 종교와 예술이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몸짓을 지녔다. 16세기 옛 수도 카라코룸에 세운 에르덴조 사원의 전성기 기록에 따르면, 100여 개의 법당에 1000여 명의 스님이 머물었는데 ‘참’ 의식을 행하는 108인의 스님이 있어 해마다 8월이면 야외에서 장엄한 종교의식이 개최되었다고 한다. 의식을 치르기 며칠 전부터 법회를 올리며, 향을 피우고 뼛가루와 분필로 구획선과 여러 개의 원을 그려 의례공간을 정화ㆍ결계한 다음 스님들이 가면을 쓰고나와 종교적인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참’에 쓰는 가면은 얼굴 두세 배의 크기에 무게도 30kg을 훌쩍 넘는다. 존상과 마왕의 경우 세 개의 눈을 달게 되는데, 이마 한가운데 있는 제3의 눈은 인간의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것이니 중생에게는 두려운 눈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푸른 얼굴에 험악한 표정과 해골장식을 한 분노존(忿怒尊)은 삿된 존재를 물리치고 중생의 악한 성정을 일깨우기 위한 장치로, 성큼 다가서는 몸짓만으로도 삼악도를 떠나게 만들법 하다. 

인도 민중예술로부터 시작되어 티베트불교에서 널리 알려진 ‘참’은 몽골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19세기 무렵이면 몽골전역에 있는 5백여 개의 대형사원에서 ‘참’이 성행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마다 전통예술과 토착신앙을 접목시켜 몽골만의 독자적인 불교무용 ‘참’으로 전승되었던 것이다. 

공산혁명을 겪으며 종교의식으로서 ‘참’은 사라졌지만 많은 이들이 머지않아 몽골사원에서 다시 ‘참’을 보게 될 것이라 믿고 있다. 중생을 깨우쳐 인간 내면과 외부에 있는 악을 없애고 평화로 이끄는 ‘참’은, 부처님의 뜻을 몸짓으로 전하는 법열(法悅) 충만한 춤이기 때문이다. 
 

몽골초원의 게르. 그림=구미래
몽골초원의 게르. 그림=구미래

[불교신문3504호/2019년7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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