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60주년 맞이 특별기획
‘상구보리 하화중생’ 현장⑤
50년 단청ㆍ탱화 외길 단청장 동원스님


행자시절 관음도 그린 계기로
은사 혜각스님과 인연 맺어져
촛불 켜고 밤새 시왕초 연습
항주미술학교서 수묵화 배워

국내서 가장 큰 조계사 탱화
400평 통도사 설법전 단청
스님 손 거치지 않는 곳 없어
올겨울 팔상도 대작불사 시작

직접 그린 단청문양으로 만든 병풍을 배경으로 앉은 동원스님. 스님은 평생 해온 단청과 탱화불사는 출가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조사 스님들 전통에 따른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직접 그린 단청문양으로 만든 병풍을 배경으로 앉은 동원스님. 스님은 평생 해온 단청과 탱화불사는 출가자가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조사 스님들 전통에 따른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삼국시대부터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문화는? 바로 불교다. 불교가 전래된 이래 1700년 동안 불교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이자 철학이며 문화였다. 사찰을 창건하고 전각에 모실 불상과 탱화를 조성하는 문화는 오늘날까지 계속 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48호 단청장 동원스님도 우리의 전통문화, 불교문화를 이어오는 주인공이다.

조계종을 대표하는 금어(金魚)인 스님은 우리나라에 가장 큰 탱화인 조계사 후불탱화를 그렸고, 큰 전각인 통도사 설법전을 장엄했다. 통도사 사명암에 주석하고 있는 스님을 지난 6월24일 찾아갔다. 사명암 마당이 내려다보이는 일승대(日昇臺)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동원스님은 부처님 회상에서 부처님 이름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고 자평했다. 정신적으로는 자유를 추구했다. 부처님 법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부터 찾은 자유는 결국 부처님이 말씀하신 해탈이었다. 산천을 보며 여행을 좋아했던 스님은 사찰순례도 많이 다녔다. 여여로움을 얻기 위해 단소와 대금을 불기도 했다. 스님이 출가자로서 할 일을 찾은 것이 바로 단청과 탱화이다.

어릴 때 스님은 한 생 어떻게 잘살고 갈까 고민했었다. 취직을 할까 출세를 해볼까 생각했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열일곱이 되던 해인 1966년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대전을 출발해 광주와 목포, 제주도를 둘러보고 다시 부산으로 올라온 스님은 경주 불국사로 가기 위해 터미널에 갔다가 통도사 얘기를 듣고 양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소나무 숲길을 걸어 절로 들어가는데 반월교 계곡과 일주문 앞 고목을 보면서 스님은 낯설지 않았다고 한다. 도착해서 보니 저녁예불시간이 가까워졌는지 젊은 스님이 대종을 치러 내려왔다. 여관비도 아낄 겸 스님에게 얘기해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부탁을 했다. 절로 올라가는 길에 스님은 홍법스님을 만났다.

“홍법스님이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물었다. 몸도 마음도 자유롭게 평생 여행하며 살고 싶다고 대답을 했더니 스님이 되면 딱 맞겠다고 했다. ‘절은 경치 좋은 데 있으니 출가해서 자유롭게 살라’는 홍법스님의 말을 들으니 솔깃해 6개월만 해볼까 싶더라. 다음날 친구는 돌아가고 나만 남았다.”

그렇게 통도사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날 스님은 행자실에 걸린 관세음보살 그림을 보고 펜으로 따라 그렸다. 스님이 그린 관세음보살을 보고 행자들 모두 잘 그렸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홍법스님이 그림을 보더니 “유 행자는 혜각스님을 모시고 단청을 하면 좋겠다”고 하며 은사 스님을 정해줬다. “그 때 혜각스님은 단청하러 다른 절에 갔던 때라 뵙지도 못하고 은사 스님과 연을 맺었다”고 동원스님은 회상했다.

스님이 단청을 한 것은 신기한 마음에서였다. 산 속에 궁궐같이 잘 지어진 집이 있어 신기했고, 색이 잘 칠해져 있는 것도 신기하고 문양을 예쁘게 그린 것을 보니 어떤 철학인가 궁금하기도 했다. 탱화를 잘하려면 초를 잘 해야 한다고 했다. 밑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는 말이다.

붓으로 밑그림을 그린 초를 주고 연습하라고 했다. 습화를 3000장은 해야 필력이 생긴다고 들어 밤바다 연습했다. 옛날엔 오후9시면 절에 모든 불이 다 꺼졌다. 어두운 밤 촛불 하나 켜놓고 콧구멍이 새카맣도록 초를 그렸다. 시왕초를 시작으로 초를 연습하면서 그림에 열중했다.

스님이 단청과 탱화를 배울 때만 해도 교재 같은 게 없었다. 다양함을 어떻게 익혔을지 궁금해 하자 스님은 단청은 ‘따라서’ 달라진다고 말했다. 건물에 따라, 환경에 따라, 배치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금단청, 머리단청, 긋기단청, 가칠단청으로 구분되긴 하지만 사실 단청은 무량하다”는 스님은 “평생을 해도 새로운 문양이 나온다. 마음이 끝이 없으니 단청도 끝없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법당에 그려야 할 벽화, 선방에 그릴 벽화는 다르다. 법당에는 팔상도 같이 부처님 관련한 그림만 그린다. 선방에는 마음을 찾는 심우도를 그리는 것이다. 영각 따라 다르고, 요사채 따라 다르다. 예전에는 크게 지을 집, 높게 지을 집, 작게 지을 집이 다 달랐다. 스님은 요새 그런 철학이 많이 사라진 것 같다. 큰 옷이 아무리 좋아도 맞지 않으면 못 입는 것처럼 무조건 크고 화려한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조화가 필요하다.

“단청은 음과 양의 철학이고 하늘과 땅 천지의 색깔이다. 거기에서 끝없이 변화해서 음양의 조화로 한량없는 색이 나온다. 그게 바로 단청의 문양이다. 단청이 그래서 재미있다. 일상생활도 단청이 잘 돼야 한다고 하는데, 조화가 잘 돼야 한다는 말이다. 정치인은 정치인으로서의 도, 기업인은 기업인으로서의 도가 있어야 한다. 조화롭게 생활하라는 의미인데 그게 곧 단청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박물관은 동원스님이 기증한 단청 병풍 속 문양으로 엽서를 제작해 판매하기도 했다. 동원스님이 샌프란시스코 박물관이 제작한 엽서를 보여주고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박물관은 동원스님이 기증한 단청 병풍 속 문양으로 엽서를 제작해 판매하기도 했다. 동원스님이 샌프란시스코 박물관이 제작한 엽서를 보여주고 있다.

스님은 단청을 “재미있다”고 표현했다. 재미있다고 하면 가볍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스님이 말하는 재미는 세상 사람들이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과 같은 재미와는 다른 의미다. “단청이라는 단어 자체가 재미있다. 단은 붉은색으로 음을 뜻하고, 청은 푸른색으로 양을 상징한다. 음과 양의 색깔이 단청이다. 음과 양의 철학을 가지고 음과 양의 한없는 진리를 문양으로 나타내는 게 단청이다.”

음과 양으로 한량없는 진리를 문양으로 표현한 게 단청이기 때문에 단순히 모양이나 색깔만 봐서는 의미가 없다. 은사 혜각스님은 단청 문양 중 하나인 ‘파련초(波蓮草)’의 철학이 한량없는 진리라고 말씀했다.

단청은 부처님을 모신 곳을 장엄하는 불사로, 그 안에 정신, 의식, 사상이 담겨야 한다. 옛 스님들이 조각한 불상이 방광을 한 것처럼, 스님이 3년에 걸쳐 조성한 조계사 후불탱화가 방광했다고 인사를 받은 적이 있다. 그만큼 신령스런 마음으로 불사를 해야 한다는 게 스님의 철학이다.

불교를 잘 안다고 해도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신령스러운 마음을 낼 수 없다. 그저 지식이나 상식이 될 뿐이다. 마음은 안 되는 게 없다. 눈깜빡할 순간에 과거로 가고, 세계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다. 기도하고 마음을 개발하면 한량없는 세계가 펼쳐진다. 단지 깨달아 쓰지 못할 뿐이다.

“철학이 없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라 기술, 재주에 지나지 않는다. 기술과 재주는 익히면 된다. 아무리 잘 깎아놓고 그려도 감상하는 부처님, 감상하는 탱화에 지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철학과 정신, 얼을 갖고 불사를 해야 한다. 단청도 마찬가지다.”

동원스님은 석굴암 부처님을 예로 들었다. “석굴암 부처님은 신라인의 염원이 담긴 국가차원의 불사로 봐야지 시주자 김대성이 혼자 발원해서는 쉽게 이뤄질 수 없는 불사”라고 평가한 스님은 “지금은 더 좋은 돌을 구해 더 나은 기술로 더 정확하게 불상을 조각할 수 있지만 당시만큼의 신심과 철학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뛰어넘을 만큼의 불상을 조성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예술에도 철학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요새 스님은 바깥활동을 잘 하지 않는다. 언론 인터뷰나 외부 법문을 청하면 거절하고, 찾아오는 신도들만 만난다. 다른 사찰 단청이나 탱화도 사양했다. 50여 년 단청과 탱화의 외길을 걸어온 스님은 지금 팔상탱을 준비하고 있다. 올 겨울 밑그림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완성하려면 족히 10년은 걸릴 대작불사다.

“스님이 돼서 부처님 일대기를 조성하고 싶다고 원력을 세웠다. 20대 때 팔상도를 조성한 적이 있지만 경험이 부족해 재주만 부린 것 같다. 부처님 일대기를 사유하면서 팔상도를 그려 사명암 법당 좌우 벽에 모셔두고 열반하면 좋지 않겠나.” 영축산이 울리도록 호탕하게 웃는 스님의 손끝에서 펼쳐질 부처님 생애가 기다려진다.

▶동원스님은...

1950년 대전에서 태어난 스님은 1966년 혜각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월하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고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출가해서 스님은 평생 4가지를 하며 살았다. 신적으로는 자유를 추구했다. 산천을 좋아해 여행을 다녔다. 스님으로 할 일을 찾아 단청과 탱화를 하고, 중국 항저우미술학교에서 수묵화도 배웠다. 여여로움을 얻기 위해 단소와 대금을 불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인 스님은 조계사 대웅전 후불탱화, 통도사 설법전 단청 외에도 사명암, 캐나다 서광사, 청도 운문사, 대구 동화사 등 100여 사찰에서 불사를 했다. 전통문화보존과 계승에 기여한 공로로 2015년 화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단청

단청은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 등 다섯 가지 색을 기본으로 궁궐이나 사찰 전각을 장엄하는 것을 말한다. 단청은 목재의 보존과 건물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됐는데, 사찰단청은 불보살을 봉안한 전각을 장엄하는 목적이 크다. 불교관련 소재를 문양으로 활용해 다채로운게 특징이다. 무엇보다 사찰단청은 스님들에 의해 맥이 이어지면서 한국단청의 면모를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하겠다.

불교에서는 단청하는 스님을 금어 또는 화승, 화사로 불렸다. 임진왜란 후 소실됐던 사찰 당우가 복원되면서 단청불사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20세기 전후활동한 단청장을 살펴보면, 동원스님 은사 일옹혜각(一翁慧覺, 1905~1998)스님은 화응(華應)스님 문하에서 5년간 전통단청기법을 전수받았다. 혜각스님은 국보 1호 숭례문, 보물 1호 흥인지문, 우정총국, 예산 수덕사 대웅전, 개성 안화사 대웅전, 안변 석왕사 대웅전, 구례 화엄사 각황전 등 200여 곳에 단청을 남겼다. 그 길을 동원스님이 잇고 있으며 스님의 상좌 중 도행스님과 도진스님 등이 탱화단청을 하고 있다.

이밖에도 다양한 스님들이 단청에 헌신해 왔다. 김한옥의 <단청도감>(현암사, 2007)에 따르면 금호선사를 시작으로 보응스님(1867~1954)-일섭스님(1900~?)-법해스님(1912~1985)-신상균(현 단청장 보유자)로 이어지는 맥이 있다. 김예운스님-만봉스님(1910~2006), 완호스님-덕문스님(1913~1992) 등 계보로 활동 중이다.

 [불교신문3504호/2019년7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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