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제 : 깨달음을 얻으면 자비심과 이타심은 당연히 발현되는가, 아니면 추가적으로 노력을 통해서 형성해야 하는가.
깨달으면 갑자기 자비심 이타심이 발현되나?

깨달은 후 자비심과 이타심이 자연스럽게 발현되느냐를 두고 스님들은 저마다 의견을 펼쳤다. 사진은 요양원에서 봉사하는 해인사승가대학 학인 스님의 모습.
깨달은 후 자비심과 이타심이 자연스럽게 발현되느냐를 두고 스님들은 저마다 의견을 펼쳤다. 사진은 요양원에서 봉사하는 해인사승가대학 학인 스님의 모습. 불교신문자료사진

탄공스님 ‘루시’라는 영화가 있는데, 깨달음과 비슷한 얘기를 담고 있다. 범죄 집단에 의해 납치된 여성이 인체 생성물질을 배 안에 넣고 가다가 터지는 바람에 생체반응에 의해 의식이 확장됐다. 뇌를 10% 사용하다가 100%까지 사용하면서 달라진 것을 보여줬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의식이 확장된 상태가 아닌가 싶다. 개인차는 물론 있다. 승가대학에서 공부하거나 선방에서 수행하는 것은 의식을 확장시키는 방편의 하나이다. 제 개인적으로 깨달음이란 부처님께서 증득한 것을 기본으로 우리 의식을 얼마나, 또 빠르게 확장시킬 것인가에 대한 문제 같다. 어록에서 선사들은 번뇌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반야지, 무지의 지이고 무상의 상이고 무념의 념인 그곳에서 자기가 얼마나 머무는지 보라고 했다. 제가 번뇌가 일 때 자각의 방편으로 머리를 만지는 것이나, 지혜의 상태에서 나를 관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살피는 게 깨달음을 향한 걸음이 아닐까.

일감스님 탄공스님은 중생과 나를 둘로 보지 않는 경지에 가면 자비심과 이타심은 저절로 발현되기 때문에 따로 닦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다른 스님들 의견은 어떤가.

원산스님 초기 경전의 사례를 통해 말씀드리겠다. <사문과경>에는 출가해서 수행 들어가기 전부터 마지막 깨달음을 얻는 과정까지의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자세히 나와 있다. 거기 보면 본질적인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자비희사를 닦으라고 한다. 또 <자애경>의 인연설화를 보면, 500명 정도의 스님이 수행을 하러 숲속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나무 정령들이 스님들이 수행하러 와서 정말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다 스님들이 몇 주가 지나도 가지 않으니 불편해, 일부러 악취를 풍기고 끔찍한 소리를 내 스님들을 내쫓았다. 그 때 부처님께서 스님들에게 <자애경>을 일러주고 수행하라고 해서 결국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저 개인적으로 해석하기에는, 저도 선방에 잠깐 다녀봤지만 자애심이 발현되지 않으면 옆 사람이 부스럭대기만 해도 예민해지고, 화가 난다. 선방에 가면 옆 스님이 방귀를 뀌거나, 잠꼬대 하는 것 때문에 불편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자애를 닦고 나서 수행하도록 유도했다. <사념처경>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탐착심을 내려놓고 수행을 하라고 말한다. 들뜨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수행하라는 말일수도 있지만, 자애를 갖추고 수행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수행 전에 자애를 닦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비심과 이타심은 깨달음 후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부터 닦아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일스님 저 역시 탄공스님과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 부처님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이냐 할 때 연기에 대한 것이 아니겠는가. 연기는 결국 ‘동체대비’라고 하겠다. 학인 스님들에게 지구 반대편에 기아로 고통 받는 아이들을 보여주는 것을 보며 연민과 동정, 동정과 자비의 차이를 묻는다.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불쌍해서 돕는다면 동정이다. 고통 속에 있는 아이들을 대상화하지 않고 그 모습이 나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즉각적으로 자각한다면 자비심이 당연히 발현된다. 연기법을 깨달았다면 세상에 대한 사유방식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또 다른 나가 지금 굶고 있는데 어떻게 한가하게 적선 하듯 보시하겠는가. 무조건 일단 살리고 보는 것이다. 당연한 귀결이다.

일감스님 탄공스님이 순수한 평정심이란 말씀을 했는데, 일상의 평상심과 차이가 있나.
 

탄공스님 동화사 율학승가대학원 연구과정
동화사 율학승가대학원 연구과정 탄공스님.

탄공스님 일상적인 평상심이나 일상적인 마음인데, 우리는 태어나면서 학습에 대해 이분법적 사고에 길들여져 있다. 선에서 얘기하는 것은 이분법적 사고를 내러놓는 마음일 것이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은 나를 기준으로 너를 보는 것이다. 싫다는 것은 좋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좋고 싫고를 떠나서 보는 즉시 바로 아는 이런 마음이 순수한 마음이고 반야의 지가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분법적 사고를 제외한 순수한 마음이 정토고 극락이라고 아닐까.

진광스님 우리가 상구보리 하화중생 한다고 한다. 지혜를 구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들이 과연 차제적이냐 동시적이냐는 얘기가 있다. 탄공스님 말씀은 이론적으로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그러나 깨달았다고 자비심과 이타심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자비심 갖고 수행해야 깨달음에 이르면 어느 정도 하겠지만, 사람은 기본적인 성품이나 훈습이 있다. 일정 깨달음이 있다고 해서 성인처럼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깨달음의 순간이 왔다고 갑자기 자비심과 이타심이 발현되는 게 아니라 그대로 노력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서담스님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정각자만이 자리이타가 구비된다고 했는데, 정각을 이루지 못한 출가한 사람이 추구해야 할 것이 자리일까 이타일까. 우리 승단은 사회요구를 충족시켜야 하고, 종교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승가집단이 마냥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키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타의 기준, 지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탄공스님 정각이라고 표현한 것은 자각의 상태다. 항상 깨어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깨어있기 힘들다. 돈오돈수, 돈오점수에 대해 얘기하는데, 자각의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느냐가 출가수행자가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왜냐면 깨달음하고 연결되기 때문이다. 자기가 깨어있지 못하면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모른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께서 길을 가다가 머리에 파리가 앉았다. 파리를 쫓고 하시는 말씀이 내가 방금 파리를 쫓았는데 팔이 올라가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도마복음에 보면 예수가 어부를 데리고 전도를 하러 가는데, 어부가 “지금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고 예수님과 같이 전도하러 가겠다”고 하니 예수가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장례지내 게 두고 너는 나를 따라 법을 전하러 가자”고 했다. 성경에서도 자각 없는 일상적인 삶을 죽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자각이라고 하면 깨어있는 상태가 얼마나 가는지에 대한 얘기다. 깨어있는 상태, 자기 스스로를 보고 있는 상태를 말씀드린 것이다.

자리와 이타를 보면, 소승 대승경전을 나눌 때 기준이라고 본다. 중국 도선율사는 “사분율 소승계율을 가지고도 이타가 되면 그것은 대승”이라고 말했다. 자리이타의 개념은 나만을 보느냐, 전체를 생각하느냐가 기준이라고 본다.

출가자가 지향할 점은 무엇인지를 물었는데, 제가 늘 생각하는 것이 어떤 방법으로 자기를 볼 수 있는 힘을 끊임없이 지속시킬 수 있는가이다. 내가 자각을 얻었다고 해서 지속되지 않는다. 자각이 지속되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을 지속해야 하는 것이 스님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스님은 직업승이 될 수밖에 없다. 출가수행자라면 자각을 어떻게든 지속하고 자기 삶에 녹아내야 한다.

자비심 이타심 깨친 후 아닌
바로 지금부터 닦아나가야

도관스님 이 주제는 깨달음을 어떻게 볼 것인지 먼저 정의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깨달음은 자기 자신의 의식에 혁명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이기적인 유전자를 얘기했지만, 우리에게는 생존본능이 있고 DNA를 증식하려는 임무를 갖고 있다. 획기적 계기가 없으면 본능적으로 행동하기 마련이다. 획기적인 의식변화가 있어야 한다. 부처님께서 깨달음 증득하신 후에 깨달음 펼칠까 말까 고민하셨다. 깨달음을 펼칠 거라고 생각하면서 논리적으로 연기법, 팔정도, 사성제를 설했다. 깨달은 순간에는 그런 논리적인 체계는 서지 않았다고 본다. 일시적인 내면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훈습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지켜보고 깨어있지 않으면 어느 순간 자기 본능대로 행동한다. 그 후에도 추가적인 노력과 자기점검, 수행과 기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일감스님 탄공스님은 의식의 확장과 평상심을 얘기했다. 도관스님은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의식의 변화라고 했다. 의식의 혁명적 변화는 갑자기 일어나나 서서히 일어나나.

도관스님 변증법에서 말하는 ‘양질의 전환’처럼, 순간순간 축적되다가 어느 순간 양적으로 팽창하면서 질적으로 변한다. 의식의 변화도 혁명적이다. 부처님께서 6년간 고행하셨는데, 그런 것들이 총체적으로 결집돼서 수행하는 순간에 깨달음이 이뤄졌다고 추측된다.

탄공스님 의식의 확장과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우리가 출가하는 것만 해도 평상시 의식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없으면 절대 못한다. 스님들끼리 생활하다보면 ‘참스님’이 계신다. 참스님을 보면 마음에서 분별하지 않아야 하지만, 분별하는 중생마음이 일어난다. 그 때 다잡을 수 있는 건 출가자가 아무리 막행막식을 하지만 수행자다. 그리고 아무리 많이 수행한 불자라도 어떤 부분을 접하면 궁극적인 부분에 맞닥뜨리면 출재가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보일스님 스님 말씀대로라면 우리가 열심히 수행하면 의식의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서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인가. 선방에서 20~30안거를 성만하면 양이 축적돼서 혁명적으로 깨달을 수 있을까.

탄공스님 열심히 수행만 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행의 질의 문제다. 농부가 거름을 준거에 따라 사과의 맛이 다르듯, 수행도 마찬가지다. 그저 30안거 300안거를 난다면 거름 없이 키운 외형만 보기 좋은 사과와 다를 바 없다. 숫자가 많다고 해서 질적인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선방 스님들은 다 깨달아야 한다.

일감스님 자각의 상태란 자기가 없는 상태인가.

탄공스님 자기가 없는 상태, 자기라는 것은 내외형적으로 주관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수행하면서 조금만 집중하면 자기가 없어진다. 그 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가, 내가 없어졌음을 인식하는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 내가 없어졌다고 느끼고 있는 지혜가 자각의 상태다. 이 상태가 가장 깨끗하게 깨어 있는 상태다.
 

사회를 맡은 일감스님(조계종 백년대계본부 사무총장)
사회를 맡은 일감스님(조계종 백년대계본부 사무총장).

일감스님 자각의 상태에 자비심과 이타심이 저절로 있나.

탄공스님 있다고 생각한다. 자비와 이타는 나를 기준으로 한다. 내가 없는 데, 이타라는 말이 의미가 있나. 너와 나라는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개념이 없다. 내가 타(他가) 되고 타가 내가 되기 때문이다.

자리이타는 수행의 방법론
나와 중생 아끼고 사랑해야

원산스님 깨달음 후를 얘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깨달음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자리와 이타개념은 대승불교에 굉장히 많이 나와 있다. 초기불교에서 자리이타는 깨달음 수준에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수행의 방법론으로 드러난다. 자비희사의 ‘자’가 ‘자리’이고 ‘비희’가 이타에 해당한다. 자는 나와 중생들을 똑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다. 비는 상대방이 고통 받고 있을 때 애처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내가 과거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힘들어 할 때 느꼈던 애처로움을 기억해 내고 이것을 중생들을 향한 마음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희는 상대방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같이 기뻐해주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이타다. 이 마음들을 일으킴으로써 자연스럽게 실천으로 이어진다.

자리는 자애수행과 관계있다. 자기를 이롭게 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 이 순간보다 더 나은 인격으로 발달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것을 내가 일상생활에서 실천해 가는 것이다. 순간순간 잊지 않고 내가 왜 출가했는지 상기하고, 내 속에서 탐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차리며, 중생들을 위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자리이타를 행하는 것이다.

깨달음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초기불교에서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없어진 상태라고 말한다. 붓다는 깨달음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깨달음은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사라진 상태라고 했다. 또 깨달음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라고 천착해서 수행의 의지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깨달음은 지혜의 성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깨달음에 대해 일반인에게 자세히 이야기하기보다 일상생활 즉,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살면서 분에 넘치는 탐욕과 참지 못하는 분노들과 후회의 삶을 사는지 돌아보고, 탐, 진, 치를 매일매일 줄여 나가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제가 이해하는 초기불교 수행방법론은 점진적이다. <자타카>를 보면 부처님께서 전생부터 닦으면서 깨달음을 얻지 않았나. 현상을 보면 한 번에 깨달은 것 같지만 인연법을 보면 차제가 없을 수 없다.

일감스님 깨달음과 자비심, 이타심이 연계되느냐는 얘긴데 깨달았다는 분이 왜 자비심과 이타심이 없을까. 한국 스님들이 자비로운지, 이타심으로 불교를 펼치고 있는지 의문이 있다. 다른 나라 불교를 보면 복지, 자애로움을 잘 하지만 깨달음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는다. 우리는 깨달음에 대한 논의에서는 절대 안 지는데, 자비 이타는 그렇지 않는 것 같다.

서담스님 이타에는 기준이 없다고 생각한다. 남을 위해 살자는 게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 부분에 대해 승가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고, 그 기준을 어디까지 제시해야 하는 지 궁금했다. ‘무아’ 말씀을 많이 했는데 ‘무아’가 단순히 나와 너, 승가와 재가 이분법적 사고가 없음을 말하는 것인지, 어떤 경지에 들어가면 감각이나 인지자체가 없어지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 부분에 대해 설명해줬으면 한다.

또 출가자가 견해를 나누다보면 절대적인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차이가 난다고 말씀하셨다. 지금 이 논지에 의거하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면 분별심이 없어야 한다. 출가 재가가 결정적인 순간 사고차가 발생한다면 그 또한 분별심 아닌가. 그렇다고 재가자는 깨달을 수 없나 질문해보면 <유마경>을 보면 또 그렇지 않다.

탄공스님 분별은 있어야 한다. 선분별은 있어야 한다. 선에서는 반야지라고 한다. 분별이 없으면 바보가 된다. 번뇌와 망념에 흔들리지 않고 제대로 분별하는 것은 선분별의 지혜작용이다. 분명히 있어야 한다. ‘선분별’은 분명히 있다. <육조단경>에서는 최상승법을 설하면서 출재가를 가리지 않는다. 출가, 재가는 전혀 수행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는 종자를 갖고 있기 때문에 무분별의 분별, 즉 선분별의 상태로 들어가면 된다고 나와 있다.

‘무아’를 말씀했는데, ‘무아’라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일어나는 번뇌 망상이 없다는 것이다. 반야의 지혜작용이 없다는 게 아니다. 무아라고 하는 것은 공무일물의 상태로 번뇌나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순수한 반야지의 상태라고 본다. 이 상태에서는 보는 즉시, 지금 제가 말한 것을 느낀다면 그건 반야지혜작용이다. 만약 마음이 다른 데 있으면 느낄 수 없다. 스스로 마음작용이 있어 말하는 순간 인지하는 것이다. 선에서는 지가 없는 상태를 절대 경계한다. 무아의 ‘아’이고 무지의 지로 견문각지하는 반야지는 살아 있어야 한다.

일감스님 깨달음에 대해서 수 없이 많은 논쟁이 있었다. 탄공스님 얘기를 들어보면, 자각이 얼마나 지속되는지, 의식의 확장과 평상심, 무념을 얘기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깨어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깨어있는 마음이 다른 쪽에서 보면 번뇌, 분별일 수도 있다. 더 많은 논쟁을 해야 하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지혜가 얻어지리라 생각한다.

정리=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3503호/2019년7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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