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제: 대승불교의 종교성(불보살신앙)은 초기불교 자력수행(무아열반)의 가르침과 어떻게 조화되는가?②
"대승불교, 부처님시대 자비사상으로 돌아가자는 의미"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나누는 가장 큰 요인은 서원이나 발원, 회향사상이다. 사진은 결제철 선원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의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나누는 가장 큰 요인은 서원이나 발원, 회향사상이다. 사진은 결제철 선원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의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도관스님 사회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을 보자. 소련이나 중국에서 사회주의 실제 모습이 아니다. 기득권이 세력을 유지하려하고 노동계층은 살기 어려워진다. 그에 따른 여파로 자본주의로 바뀐 나라도 있고, 마르크스주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불교에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넓게 보자. 초기불교 대승불교 따질 것 없다. 자기 마음가짐이 어떤가. 불보살 사상으로 진짜 신도들 위해 기도하고 이타심 갖고 생활하면 누가 뭐라고 하겠나. 그것을 돈벌이로 활용하니까 지탄을 받는 것이다.

정운스님 대승불교는 초기불교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시대 자비사상으로 돌아가자는 측면이 맞을 것 같다. 초기불교에서 이타가 없느냐. 그건 아니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나누는 근원적이 요인은 서원이나 발원, 회향사상이다. 나도 수행하지만 다른 사람도 함께 수행해서 해탈 열반으로 가자는 ‘함께’가 대승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보일스님 다만 원산스님 말씀 중 초기불교 하는 분이 논리성을 갖는 대신 종교성이 약하다거나 신심이 떨어진다는 내용은 동의하기 어렵다. 저희 승가대학에서 토론대회를 하다보면, 초기불교 공부를 통해 깨달음에 대한 두루뭉술한 이해 또는 신비주의에서 벗어나 특정 개념에 대한 이해가 매우 정교하고 치밀해지는 경험을 한다. 그 과정에서 학인들이 환희심을 느끼기도 한다.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게 어느 단계에서는 우리 신심을 더 증장할 수 있다고 본다.
 

원산스님 동국대 인도철학과 박사과정
동국대 인도철학과 박사과정 원산스님.

원산스님
초기불교의 목표는 아라한
아비달마 풍토 너무 강해져
붓다에 대한 신심 강조한 것

원산스님 제가 말하는 신심을 잃었다는 것은, 그들이 깨달음에 대한 신심,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신심을 잃었다는 것이 아니다. 불보살에 대한 신심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불교나 남방불교를 하는 분들이 다 그렇다는 것도 아니다.

붓다께서 열반에 드신 후 부터, 대승불교가 일어나던 시기까지 모든 불교수행자들의 목표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었다. 붓다는 열반했기에 이곳에 없고, 붓다의 가르침이 곧 붓다이기에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신심을 굳건히 하고 아라한이 되기 위해 매진했다. 하지만, 대승불교가 흥기하던 시대에는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당시 승가풍토는 붓다에 대한 가르침을 발전시키려는 아비달마적 풍토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붓다는 안보이고 아라한만 보게 된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아라한을 만나기는 더더욱 어려워져만 갔다. 이 때 붓다 자체에 대한 신심을 강조하면서 나타난 것이 대승불교 불보살 사상이다. 대승불교 운동의 근간은 쿳타까 니까야의 자타카인데, 당시 아비달마 학파들의 사상적 근간은 4부 니까야 중심이었다. 대승불교의 근간이 쿳타까 니까야의 자타까이기에 새로운 방식의 초기불교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대승불교의 불보살 사상의 핵심은 이 시대에도 계속해서 부처님이 계시다면 좋겠다는 것이다.

서담스님 신심 문제로 말씀 오가는 걸 들었다. 한국불교가 근본적인 뿌리는 초기불교, 대승, 화엄 선에서 찾을 수 있지만, 교단의 뿌리는 임진왜란 이후 형성됐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지금은 퇴색됐지만, 조선시대 중후기에 들어 법맥이 강조됐다. 그 원류를 찾아보면 청허휴정스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청허휴정스님 이후 조선후기까지 스님들이 어떤 수행을 했는지 살펴보면 삼문수업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삼문수업은 교와 선 염불이다. 출가한 스님이 처음에는 강원에서 교학을 배우고 그것을 통해 선수행을 한다. 주목할 점은 스님들이 마지막 입적을 앞두고 10~30년 정도 염불수행으로 삶을 회향한다는 것이다. 만일염불회라는 게 당시 유행했고, 스님들 재가자들이 관심 갖고 한국불교에 재정적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단순히 교리적인 것과 신앙적인 것들이 사회 속에서 반비례 관계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한국불교가 지금까지 오게 된 토대를 생각했을 때 조선 후기 모습을 간과할 수 없고 이런 흐름에서 신앙과 교리간 접점을 모색하고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보일스님 “이론의 표면적인 차이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변화의 본의를 찾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는 얘기가 결론을 맺어주는 것 같다. 결론은 ‘콘텍스트(Context)’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너무 텍스트(Text)에 매몰되어 있다. 우리가 미래불교를 얘기해야 하는 상황인데, 우리는 화엄, 대승을 얘기하고 있다. 수백년 천년 전 스님들이 시대와 역사에 대해 고민했던 것을 현재의 우리가 못해내고 있는 것 같다. 맥락에 대한, 콘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 텍스트에 대한 이해도 새로워질 것이라고 본다. 한국불교가 갖고 있던 논강 중심의 전통은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그러나 맥락에 대한 이해는 부족한 것 같다. 특정 과목을 한 학기 내내 배워놓고 그 과목을 수강했다는 사실 자체를 통째로 잊어버리는 현상은 결국 학인들이 과목 상호간에 이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맥락에 대한 교육과 이해도를 높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도관스님
불보살사상 지탄 받는 이유는
중생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벌이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

도관스님 초기불교에 대한 자료가 영국에 많은데, 서양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분석적으로 초기불교를 접근해 이론적으로 발전시켰다. 서구 기독교 학자로부터 대승불교 보살사상이 예수의 사상과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얘기를 들었다. 차원이 다르다고 본다. 초기불교 전공자는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많아 그런 자취가 많이 남아 있고, 대승불교는 신앙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일감스님 서담스님은 열반은 절대 경지라고 표현했다. 절대경지는 항구적인 건가 일상적인 것인가 순간적인 것인가. 전 열반이 일상에서 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일상의 삶 순간순간 열반이 있어야 하고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있는 절대 경지를 향해 가려고 하다 보니 일상의 열반을 놓치는 것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일감스님 원산스님에게 묻고 싶다. 대승경전 얘기하면서 용궁에서 가져왔다. 삼매관에서 경전을 썼다는 예를 들었는데, 지금 우리가 대승경전을 써도 되나? 우리시대에 맞는 경전이 필요하지 않나.

원산스님 이 시대에 맞는 경전이 써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승경전이 용궁에 왔다는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지지만, 여러 가지 다른 학설도 있다. 삼매상태에 부처님께 법을 요청해 부처님께서 설한 법을 정리했다고 하는데, 그 삼매의 경지가 보통 수행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눈을 뜨던 감던 부처님 계신 곳을 떠올리고 법을 청하는 경지에 이른 수행자가 있다면 경전을 쓸 수 있지만, 지금 과연 그런 경지에 이른 분들이 있을지 의문이다.

당시 대승불교 스님들이 절박한 심정에서 경전을 썼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대승경전이 논서로 전해져 왔다면, 대승비불설로 비판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거기에 경전적 지위를 부여하면서 다양한 비판들이 나온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우리가 또다시 새로운 대승경전을 만들어낸다면 문제가 될 것이라고 본다. 티베트에서 여전히 경전이 만들어진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지금도 경전이 많아서 다 보지 못하는데 새로운 경전을 만들어야 하나.

대승불교 경전이 만들어진 시대 사람들은 공통된 견해를 갖고 있었다. 당시 부파불교, 아비달마 승려들은 자신들의 논서가 초기불교의 경전의 내용과 통한다면, 붓다의 직설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의 논서가 정밀하기 때문에 붓다의 경, 율보다도 더 높은 지위에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승사상가들은 대승경전의 내용이 초기경전의 내용과 통한다면, 마찬가지의 경전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적 분위기가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에 새로운 경전을 편찬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본다.
 

불보살전에 열심히 기도하는 불자들의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불보살전에 열심히 기도하는 불자들의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일감스님 21세기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세상과 너무 다르다. 일본에서는 AI 부처님도 등장했다. 그런 상황임에도 절대경지에 이른 사람이 아니면 경전을 쓸 수 없다는 원산스님 의견에 대해 다른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나.

보일스님 제 생각은 좀 다르다. 2600년 불교 역사는 혁신의 역사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혁신했기 때문에 연결고리를 찾아야한다. 화엄이 왜 10바라밀이 됐을까. 육바라밀 외에 방편바라밀, 원바라밀, 역바라밀, 지바라밀을 더한 건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불교가 사바세계에 사라지지 않으려면, 부처님 핵심 가르침의 내용적인 면은 가져가되,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주되고 재해석 돼야 한다. 그런 노력의 결정체가 경전, 논서라고 본다.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이 토론도 그런 부분의 작은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노력이 없으면 불교는 사라진다고 본다.

우리가 21세기 경전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냐는 부분에서 전 너무 늦었다고 본다. 또 다른 형태의 돈황이 있을 수 있고 또 다른 형태의 티베트에서 경전이 나올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화엄에 머물러 있다. 세상과 우리 사이에 간극이 너무 크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학인들은 인공지능을 얘기하고 생명공학에 대해 궁금해 하는데, 1000년 전 얘기를 하면 학인들은 잔다.

탄공스님
논리 사상은 변하는 게 진리
부처님 말씀도 뿌리 같지만
변화에 따라 잎 모양 다른 것

원산스님 지금 전 세계에 논문들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경전을 새롭게 만드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이 든다. 경전은 부처님께서 설한 것이지 않은가. 불교는 사람의 마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번뇌다. 번뇌는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이다. 경전을 볼 때 교리와 사상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의 문제로 보면 이 시대에 할 이야기가 많다. 탐진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내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지금 나온 경전과 논서, 율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당시에도 번뇌로 많은 비구와 사람들이 고민했다. 사상사적 이해, 교리적 이해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학술회에서 이야기 할 부분이다. 마음의 문제로 돌아가자고 하면 새로운 경전은 필요하지 않다.

보일스님
쉼 없이 변하고 재해석 된 불교
사상간 연결고리 제대로 알아야
현대인에 맞게 불교 얘기할 때

보일스님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데 동의한다. 문제는 그 단순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대, 학인 스님들에게 왜 또 결국 마음이냐에 대한 논의인지 중간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논리를 만들어야 한다. 현재 우리의 승가내부에서 통용되는 언어방식과 논술방식으로는 힘들다. 그래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관스님 지금 한문경전 속 논리구조는 현대인의 사고방식과 다르다. 불교를 현대인에 맞는 언어로 다시 얘기해 줘야 한다. 예전에 병을 얻은 사람은 과보 또는 업 때문이라고 말했다. 안젤리나 졸리라는 유명 헐리우드 배우는 암유발하는 유전인자가 있다고 해서 암이 발병하지도 않았는데 발생할 확률 때문에 유방과 난소를 절제했다고 한다. 또 최근에 <늙지않는 비밀 : 텔로미어(Telomere) 효과>라는 책이 발간돼 화제가 됐다. 염색체 양쪽 끝단에 텔로미어라는 부분이 있는데, 나이가 들어 세포증식을 하면서 텔로미어가 점점 짧아진다. 텔로미어가 짧아지면 수명을 다한다는 게 확인됐다. 명상이나 마음챙김을 하면 텔로미어가 보존된다는 연구결과도 있고, 스트레스를 받거나, 가공육(햄, 소세지 등) 많이 먹으면 텔로미어가 짧아지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연구도 있다. 세상은 그만큼 빠르게 변하고 있다. 대승불교도 진화해야 한다. 시대에 맞게 적절하게 달라져야 한다. 근본을 알고 있으니 얘기하는 방식을 달리해야 한다. 초중고등학교 때까지 서구 영향을 받은 공부를 했기 때문에, 요즘 세대들에게 과거 방식으로 얘기하면 전달이 안 된다. 현대에 맞는 언어로 불교를 새롭게 얘기해보자.

일감스님 정토신앙, 아미타불을 향해 수행하는 것과 초기불교가 다르지 않을까.
 

서담스님 동국대 한국굽료융합학과 석사과정
동국대 한국불교융합학과 석사과정 서담스님.

서담스님
경율론 삼장 어떻게 해석해
현대 사회문제 풀어가야 할 지
중국불교 교판서 답 찾아야

서담스님 초기불교와 정토신앙의 접점을 논술할 때 고민을 많이 했다. 초기불교 입장에서 서술하면 교리적인 측면이 강하게 설명돼 정토신앙의 신앙적인 측면을 놓치게 됐다. 후자를 취하면 전자를 놓쳐서 고민이 됐다. 그 접점으로 논술에 쓴 것처럼 유식학적 심식론을 채택했다. 인도에서 발흥했던 유식적 입장, 중국 동아시아권에서 논의가 많이 됐던 여래장, 아뢰야식까지 아우를 수 있기 때문이다. 논지를 정리하면서 비약도 있고 인용도 부족하다. 차후 보충할 일이다.

지금 시대에서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것은 저 역시 동의한다. 교리적인 것 특히 용어 문제 때문에 일반인들이 어려움을 토로하고, 스님들도 진입장벽이 높다는 생각을 했다. 과연 우리가 경율론 삼장 전체를 새롭게 바꿀 것인지 아니면 경과 율은 두고 논장만 새롭게 해석해 나갈 것인가는 많은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시대에서 사회와 불교의 접점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는 중국불교의 교판이란 개념에서 답을 찾고자 한다. 교판은 새로운 인도경전들을 중심으로 논사들이 체계를 어떻게 짜 맞출 것인지 고민한 것이다. 구마라집 스님이 경전 번역하면서 제자들이 체계를 맞췄고, 선불교가 태동하기 전까지 교판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이 부분에 대해 지금 주목해야 한다.

지금 시대에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에 경과 율이 쏟아져 나올 수 있을까. 지금 기준에서 논서나 경율론 삼장을 이 시대 어떻게 해석해나갈지 찾아나가야 한다고 본다. 사회에서 안락사, 사형제도 논의가 많이 이뤄진다. 법률적인 문제지만, 불교 내에서도 삼장이 있기 때문에 삼장으로 어떻게 해석해서 사회문제를 풀어나갈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정리=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3503호/2019년7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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