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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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직장의 거리가 조금 먼 한 가장이 있었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피곤함이나 직장 스트레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그도 힘겨워졌다. 가족이 자신의 힘겨움을 알아주지 않는 것도 못내 서운해졌다. 가족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점점 불만에 가득 차게 됐다. 가족 또한 매사 불평이 많아진 남편과 아버지가 편하지는 않았다. 

갈등 끝에 부부가 나를 찾아와 말했다. “너무 이해하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나도 두 사람처럼 화가 난다고 말했다. 한 가족구성원의 사소한 감정에서 비롯된 일들이 가족 문제에서 벗어나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 같아서 화가 났고 자기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자꾸만 자신을 알아달라는 그들이 연민스러웠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살아가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부모의 개인적인 삶 정도는 포기할 줄 알아야 훌륭한 부모일 수 있고 그것이 삶의 기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삶의 기로에 섰을 때, 지금까지 살아온 희생적인 삶에 비중을 두지 않고, 말그대로 열 번 잘했어도 한 번 잘못한 걸로 그 사람은 항상 잘못한 걸로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특히나 인과법을 알고 있는 불자의 삶에서도 그런 일들은 많이 일어난다. 

우리가 선행을 베풀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은 진정 사랑이 아니었고 자신의 욕망에 한 부분 아니었나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삶의 태도라고 한다면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이다. 나도 깨닫고 상대도 깨달을 수 있도록 방법과 길을 열어주는 것. 나도 행복하고 상대도 행복할 수 있는 공존의 삶인 것이다.

어린 시절 한번 씩 겪어봤을 어머니의 거짓말은 “엄마는 생선 머리가 더 맛있어.” 나는 그 말 뒤에 숨겨진 어머니의 진심을 이제는 안다. 너희가 행복해져 나도 행복하게 해달라고 하는 불교의 가장 합리적인 삶의 태도였던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 것인가를 항상 고민하자는 것이다. 무엇을 하면서 사는 것이 나도 행복하고 상대도 행복하게 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 아닐까. 

[불교신문3503호/2019년7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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