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립간 마루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400년, 신라 서라벌

고구려의 5만 대군이 신라를 향해 출병했다. 위풍당당한 출병을 보면서 실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원군과 함께 서라벌에 도착한다면 자신은 신라를 구원한 신(神)으로 불릴 것이었다. 그런데 영명하기 짝이 없는 고구려의 대왕은 자신을 위해준다는 이유로 실성이 고구려의 원군과 동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단옷을 걸치고 하릴없이 왕궁에서 시간만 보내고 있자니 몸은 편한데 마음이 고달팠다. 

예상대로 신라로 향한 고구려의 원군은 연일 승전보를 보내왔다. 그때마다 실성의 가슴에는 분노가 쌓였다. 그가 갔다면 승리할 때마다 백성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을 것이었다. 인질로 갔던 왕자가 돌아와 신라를 구원했다는 이야기는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전설이 될 것이었다.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친 실성은 허공을 향해 소리를 냅다 질렀다. 

“아악! 10년을 병사들과 훈련을 시키더니 이번에는 편히 있으라니! 목숨을 걸고 싸울 테니 제발 나를 신라로 보내달라고!”

그동안 신라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혀온 왜군은 고구려의 대군이 몰려온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싸워보지도 않고 퇴각했다. 신라 땅에서 왜군을 몰아낸 고구려의 대군은 내친김에 군사를 가야 땅으로 돌렸다. 가야는 쑥대밭이 되었고 가야연맹이 무너지면서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의 긴밀한 동맹도 중심을 잃었다. 고구려군을 피해 가야로 숨은 왜군들의 목이 떨어지는 낙엽처럼 쌓였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는 갈팡질팡하다 이내 움직임을 멈춘 채 쓰러졌다. 가야의 너른 들판은 병사들의 시신으로 가득했고 강과 바다는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고구려군을 가장 두려워한 것은 신라였다. 백제와 왜, 가야라는 세 가지 위협은 사라졌으나 고구려의 대군은 신라에 남아있었다. 용맹한 5만의 정예군은 그 자체로 위협적이었다. 고구려가 신라의 적이 아니라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대왕의 하늘같은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신라는 영원히 고구려의 신하이자 동생이옵니다.”

허리가 굽고 백발이 성성한 내물왕은 오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위풍당당한 고구려 장군 앞에서 무릎을 꿇고 복종을 맹세했다. 내물왕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이를 지켜보던 신하들과 백성들도 함께 울었다.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그 승리는 신라의 것이 아니었다. 내물왕은 마치 패전국의 임금이 된 것처럼 약소국의 서러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그해 가을, 풍년은 아니었으나 몇 년간 계속된 극심한 흉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신라의 백성들은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 고구려의 대군을 극진히 대접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렵게 거둔 곡식은 한번 실컷 먹어보지도 못한 채 고구려의 대군에게 보내졌다. 다행히도 겨울이 오기 전, 고구려 원군이 떠났다. 일부 군사들은 신라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서라벌에 남았지만 어쨌든 대군은 고구려로 돌아갔다. 애써 웃는 얼굴로 이들을 배웅한 내물왕은 월성으로 돌아오자마자 쓰러지고 말았다. 
 

“조카 실성, 10년 동안의
질자 노릇을 마치고
이렇게 서라벌에 돌아와
마립간 마루하를 뵈옵니다”

그 살기 어린 목소리에
보반 부인은 몸을 떨었고
내물왕은 미간을 꿈틀했다

10년 전, 마립간 부부는
눌지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기어이 그를 고구려로 보냈다

지난 10년간 그 생각만 하면
화를 다스릴 수가 없었고
눌지를 당장 죽여버리고 싶었다

 

실성의 귀환 

고구려 원군이 돌아온 이듬해, 마침내 실성이 서라벌로 돌아갔다. 스무 살 나이에 고구려에 와서 꼬박 10년을 인질로 지내다가 마침내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의 자리를 대신할 인질은 오지 않았다. 신라 내물왕이 고구려 장군 앞에서 몸소 충성을 맹세한 덕분이었다. 실성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사신이 와서 전하길 내물왕은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있다고 했다. 내물왕의 장남 눌지는 스물이 되지 않았고, 보해와 미해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흐흐흐흐흐”

신라 국경을 넘은 후 실성은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잡아 내렸다. 서라벌에 들어서서는 더욱 표정 관리에 힘썼다. 

“실성 왕자가 아니십니까?” 

“오! 장군, 계림에 계셨군요. 여기서 뵈니 더 반갑습니다.”

“고국에 오니 얼굴이 활짝 피셨습니다. 물도, 산도, 바람도 고향의 것이 제일이지요.”

“네. 10년 만에 와보는 서라벌입니다.”

실성은 고구려에서 몇 번 본 적 있던 장수가 아는 척을 해오자 과장되게 인사를 했다. 서라벌의 모든 백성과 귀족 그리고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있는 늙은 숙부와 어린 세 아들을 껴안고 불안에 떨고 있을 젊은 숙모에게 자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리고 싶었다. 그 세월 동안 자신을 인질로 보내놓고 얼마나 편히 살았는지 따져 묻고 싶었고 고구려 장수들과 친분을 과시하며 그들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일단 마립간께 인사부터 올리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셔야지요. 고구려군은 월성 남쪽에 머물고 있습니다. 와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서라벌 안의 국내성을 보는 것 같으실 겁니다.”

“하하하, 정말 궁금하군요. 곧, 찾아뵙겠습니다.”

실성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며 월성으로 들어갔다. 보이는 시선과 보이지 않는 시선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대전에 올라선 실성은 누워있는 내물왕을 향해 큰절을 올린 뒤 보란 듯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립간 마루하,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조카 실성, 10년 동안의 질자 노릇을 마치고 이렇게 서라벌에 돌아와 마립간 마루하를 뵈옵니다.”

그 살기 어린 목소리에 보반 부인은 몸을 떨었고 내물왕은 미간을 꿈틀했다.

“네가 눌지로구나. 의젓해 보이는 것이 과연 장남이로구나. 음, 네가 복호일테고 아마도 네가 막내겠구나. 내가 떠날 때는 아주 아기였는데 많이 컸구나. 이제는 혼자 밥도 잘 먹을 수 있겠지?”

“네! 형님!”

미해는 실성을 향해 천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실성의 표정이 굳자 그의 눈치를 살피던 보반 부인이 미해를 안으며 서둘러 설명했다. 

“미해야, 이리 오너라. 실성 왕자, 미해가 아직 어려 호칭을 익히지 못했소. 어여쁘게 봐 주시오.”

“어여쁘다마다요. 왜군도 물러갔는데 무슨 다른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안색이 어둡습니다. 설마 이 조카가 돌아와서 못마땅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백모님?”

실성의 말에 대신들과 궁녀들은 숨을 잠시 멈췄다. 무례함이 도를 넘어섰으나 감히 실성을 말릴 수가 없었다. 보반 부인과 궁녀들의 불안해하는 표정을 보면서 실성은 재밌다는 듯 씩 웃었다.

“백모님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오랜만에 가족들과 만나니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실성의 무례함에 제동을 건 사람은 눌지였다. 

“다행입니다. 태자비는 아버님께 인사드리시오.”

“태자비 아로, 아버님께 인사 올립니다.”

눌지 옆에 앉아 있던 미해 또래의 소녀가 사뿐사뿐 걸어와 절을 올렸다. 실성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누구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의아해하는 실성을 향해 보반 부인이 말했다.

“실성 왕자, 그대의 딸이라오. 엄마를 닮아 얼굴도 곱고 성품도 아름답기 그지없어 두 해 전, 태자의 비로 맞았다오.”

보반부인의 설명에 실성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던 딸을 만났다는 기쁨보다 ‘태자비’라는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자신의 딸을 조카 눌지의 아내로 삼은 마립간 부부의 속내가 훤히 보였다. 10년 전, 마립간 부부는 눌지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기어이 그를 보냈다. 지난 10년간, 그 생각만 하면 화를 다스릴 수가 없었고 눌지를 보면 당장 죽여버리고 싶었다. 눌지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사실 실성이 누려야 할 것이었고, 실성이 겪고 있는 모든 고생은 사실 눌지의 몫이었다. 복수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는데, 눌지는 그의 사위가 되어있었다. 실성은 마립간이 놓은 덫에 또 걸려버린 것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저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신 마립간의 은혜에 참으로 감사드리옵니다.”

[불교신문3502호/2019년7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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