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사찰 순례…섬 여행 때는 스님들과 조우

친구 박광순 교수와 축성암 등
인근 사찰 다니며 불교 접해
대학시절엔 흑산도 다물도서
도광·도천스님과 우연히 만나
수행생활에 대한 이야기 경청
‘스님이 되고 싶다’는 꿈 꿔

법정스님이 방문했던 흑산도 면소재지인 진마을 앞 모래톱.
법정스님이 방문했던 흑산도 면소재지인 진마을 앞 모래톱.
1950년대 초 법정스님 일행이 찾은 흑산도 진마을.(맨 우측이 법정스님)
1950년대 초 법정스님 일행이 찾은 흑산도 진마을.(맨 우측이 법정스님)
흑산도 진마을 위치 지도.
흑산도 진마을 위치 지도.

불교 종립학교인 정광중학교와 인연을 맺어서인지 법정스님은 목포에서도 여러 사찰을 순례하고 섬을 여행하며 정신세계를 넓혀간다. 대표적인 곳이 지난 호에 언급했던 진도 쌍계사였고 이번 호에 언급하는 영암 축성사와 신안 흑산도다. 흑산도에서는 당대의 선지식었던 도광스님과 도천스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스님과 절친했던 박광순 전남대 명예교수는 2010년 3월 19일자 연합뉴스에 학창시절 사진을 공개하며 “둘이서 주말이면 목포 축성암 암자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던 때가 기억난다” 회고했다. 박 교수는 2017년 국립목포대학교 인문대학과 도서문화연구원이 주최한 ‘인문축제 명사특강’에서 발표한 글에서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법정스님과) 빼놓을 수 없는 곳이 가재절(축성암, 현 삼호조선소 일대)을 비롯한 산사탐방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주말이면 재철이와 함께 국도 1호선과 2호선을 연결해 주는 용댕이 나룻배를 타면 금방 영암 용댕이(용당리)에 내려준다. 거기부터 서쪽(법정의 고향 방향)으로 한참 걸어가면 염전(후에 목포공항이 됨)이 나오는데, 늦은 봄철이면 염전가 웅덩이에 노란 송화가루가 날아와 쌓여 있는 걸 보면서, 아! 올해도 벌써 소금농사의 절반을 넘기는구나하고 속으로 헤아리며 금년 소금농사(실적)는 어떠한지 궁금해 하나의 습관처럼 되었다. 축성암은 해발 100m도 되지 않는 바위 산 위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산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조그만 곶(갑)이었다. 이 곶의 끝자락과 허사도, 고하도 사이에는 50m도 채 되지 못하는 좁은 물길이 흐르고 있어 고하도는 연륙되지 못하고 외로운 섬이 되고 만 것이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 목포 신항과 삼호조선소, 그리고 해남과 진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 되고 있다.”

지금은 목포 북항과 고하도를 연결하는 목포대교가 2012년에 개통돼 쉽게 자동차로 축성사에 갈 수 있다. 과거 축성암으로 불렸던 사찰은 목포항 건너편 전남 영암군 삼호읍 용당리에 위치한 절로 바닷가 위에 있던 사찰이었으나 삼호조선소 조성단지로 편입돼 1985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 돼 축성사가 됐다. 이 과정에서 마애불도 옮겨와 많은 지역 불자들의 기도처가 되고 있다.

현재의 축성사 모습을 보기 위해 자동차로 목포대교를 건넜다. 곧바로 행정구역이 영암군으로 바뀌었고 도로 우측에 축성사 입간판이 보였다. 널찍한 터에 자리한 축성사는 바닷가 위 사찰이 아니라 평지에 개로 반듯하게 세워져 있었다. 다만 마애부처님은 법당 우측 100여 계단을 오른 위쪽에 모셔져 있었다.

축성사 주지 몽산스님은 “축성암은 과거 남해바다의 여러 섬을 연결해 오가는 배로 다니던 사찰이었으나 이제는 연륙교가 건설돼 쉽게 다니는 절이 됐다”며 “법정스님도 이곳 마애불에 기도하며 신앙심을 키웠다니 소중하게 가꿔야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명사특강에서 법정스님과 긴밀했던 관계를 설명했다.

“우리의 산사랑 바다사랑은 이곳에서 자라기 시작하여 서쪽으론 흑산도 홍도에 이르고, 동남쪽으론 월출산, 두륜산, 달마산으로 번져갔다. 법정은 바다보다 산, 그리고 산사를 특히 좋아하였는데 그런 인연이 마침내는 출가로 이어지게 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스님의 저서 <물소리 바람소리>의 ‘변하지 않는 모습’에는 흑산도를 다녀왔을 때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1984년 10월에 쓴 글은 ‘화엄사 주지 도광스님 9월 19일 오전 5시 30분 입적. 9월 23일 오전 11시 화엄사에서 장례’라는 전보를 받으면서 과거 회상을 떠올린다.

“1950년대 초 여름방학의 한 때를 흑산도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 무렵에는 흑산도가 관광지로서 세상에 알려지기 전이었다. 섬마을의 어려운 생활상을 조사한답시고 여름방학 때마다 친구들과 어울려 그 머나먼 바닷길을 찾아가곤 했었다. 물론 출가 전의 일. 닷새에 한 번씩, 그것도 날씨가 좋은 날만 가려 목포에서 떠나는 배편이 있었다. 몇 몇 섬을 거쳐 흑산도에 기항하는 정기 여객선이 다니던 그런 시절이었다. 흑산도에서 다시 서쪽으로 까마득하게 수평선 위에 떠 있는 홍도를 가려면,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배편이 없기 때문에 어선을 빌거나 아니면 그 섬으로 돌아가는 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흑산 본도를 이틀 동안 돌아보고 나서 우리는 진마을(면소재지) 바닷가 모래톱에서 어정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곳에 몇 사람이 몰려왔는데, 투표함을 싣고 홍도로 들어가는 배편이 그날 있을 거라고 했다. 아마 정부통령 선거일이 임박했기 때문이었을 듯싶다. 귀가 번쩍 뜨인 우리들은 면직원을 찾아 사정을 이야기한 끝에 태워주기로 약속을 받았다. 그때 모래톱에 먹물 옷을 입고 허름한 걸망을 맨 두 스님이 눈에 띄었었다.…(중략)…10톤도 안 될 조그만 통통배를 타고 투표함과 함께 그날 홍도에 간 일행 중에는 그 두 분 스님도 있었다.”

여기에 나오는 글처럼 법정스님은 일찌감치 스님들에 대한 호기심을 보이고 있은 듯하다. 두 스님을 정식으로 대면한 이야기도 한다.

“며칠 후 우리는 흑산도로 나오는 고깃배를 타고 다물도라는 섬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다시 두 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반가웠다. 그때 우리는 그 섬의 유지 격인 친구집에 묵고 있었는데 그 집 사랑에 스님들도 들게 되었다. 식사 때 보니 깨소금과 장만을 찬으로 맨밥을 먹는 걸 보고, 우리는 부끄럽게 생각했었다. 목포로 나올 때도 스님들과 같은 배를 타게 되었다. 배 위에서 우리는 불교의 수도생활에 대해해서 여러 가지로 물었던 것 같다. 목포에 내려 부둣가에서 헤어질 때에는 서운해 했었다. 그 후 절에 들어와 살게 되었을 때, 지금은 그 장소를 잊었지만 어디선가 그 두 스님을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랐다. 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더니 두 스님들도 아주 반겨주었다. 이런 지나간 생각을 하면서 화엄사에 다다르니 감회가 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중 한 분이 이번에 불의에 입적한 도광스님이, 다른 한 분은 진산 태고사에 계시는 도천스님이다.”

정찬주 작가의 책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에도 흑산도 이야기가 나온다.

“스님들은 흑산도와 다물도에서 탁발하고 다녔지만 위의(威儀)가 당당했다. 범어사에서 온 도광스님과 도천스님이었다. 스님들은 먹는 것도 아주 담백했다. 젓갈이 들어간 김치나 생선조림 반찬을 일절 먹지 않고 고깃국도 입에 대지 않고 그대로 물렸다. 깨소금과 간장만으로 맨밥을 맛있게 먹었는데, 탁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던 대학생들이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생이던 법정스님은 두 스님이 존경스럽고 호기심이 나 산중의 절 생활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두 스님이 함께 다니는 이유도 들었다. 걸망에 거울을 넣고 다니는 도광스님이 말했다. ‘우리는 전쟁 전에 금강산 마하연 선원에서 처음 만나 약속했어요. 성불할 때까지 서로 탁마하는 수행도반이 되기로 했어요.’ 대학생 법정은 스님생활이 좋은 도반을 만나기만 한다면 외롭지 않겠구나하고 생각했다. 구도의 길을 함께 걷는 도반은 의리를 곧잘 저버리는 세속의 사람들과는 다르구나 하고 직접 눈으로 보고 느꼈다. 목포 부둣가에 내려 두 스님과 헤어지고 나서 다른 대학생들은 곧 두 스님을 잊어버렸지만 집으로 돌아온 대학생 법정은 그 스님들을 떠올리면서 ‘나도 스님이 되고 싶다’고 꿈꾸었다.”

법정스님은 도광스님과 도천스님에 대한 존경심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다. <물소리 바람소리>라는 책에서도 “처음 뵈었을 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데가 없이 30여 년 전 모습 그대로라는 인생이 내게는 간직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행자가 변하지 않는 모습을 지닌다는 것은 투철한 자기 질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격변하는 세월 속에서 시류에 때묻지 않고 소탈하면서도 꿋꿋하게 자기 분수와 자기 자리를 한결같이 지키리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수행자의 상(像)이 아닐까 싶다.”고 기록하고 있다.

법정스님의 여정을 따라 지난 6월 24일 흑산도를 찾았다. 항구는 변했고, 배편도 쾌속정이었지만 물길은 똑같았다. 매물도를 스쳐 흑산도에 내려 해안도로를 따라 법정스님 일행이 머물렀던 면사무소 진마을(진리, 진말)을 찾았다. 과거 사진에 나오는 고운 모래톱은 아니지만 자갈이 섞인 모래톱이 파도를 맞이하고 있었다.

흑산도 일주를 안내하는 택시 기사에게 진마을과 법정스님과의 인연을 전해주며 ‘흑산도 안내할 때 활용하시라’고 부언했다. 법정스님이 흑산도에 왔다는 소식을 처음 접한 그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흑산도를 나오는 뱃머리에 서서 물보라 일으키며 멀어지는 흑산도를 보며 ‘청년 박재철’의 마음이 되어 본다. 이미 그의 뇌리에는 삭발염의한 출가수행자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법정스님이 박광순 교수와 자주 찾았던 영암 축성암 마애불.
법정스님이 박광순 교수와 자주 찾았던 영암 축성암 마애불.

※ 취재협조: (사)맑고 향기롭게

목포·영암·신안=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불교신문3502호/2019년7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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