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한복판 절에서 만나는 ‘추사’
더할 나위 없는 행복과 여유 만끽
한중수교 27주년 기념 추사전 열려
추사 작품 87점에 담긴 정서 감상

 

백학기

일주일에 한 두 번 때때로 틈이 나면 들르는 서울 강남 봉은사 운하당 입구에는 스님들 신발이 돌계단 위에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한 사발 물처럼 정갈한 두 개씩 짝지은 스님들 신발은 묘한 울림을 준다. 신발을 신은 스님들이 돌아다닌 이력이 와 닿기 때문이다. 아침 산책길에 가본 봉은사 운하당에는 쑥꾹새 울음이 청아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내가 봉은사에 가는 이유는 대웅전 예불도 예불이려니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만나는 어떤 정갈함을 이곳에서 맛보기 때문이다. 한여름 봉은사 신록 숲 사이에서 바라보는 강남의 초고층 빌딩들을 뒤로 하고 봉은사 내 이곳저곳 발길 닿는대로 한두 시간 돌아보는 여유는 행복이다.

봉은사에 가면 또 다른 특별함이 있다. 바로 ‘한국 최초의 한류스타’인 추사 김정희 선생(1786~1856)의 판전 현판을 볼 수 있다.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이라고 낙관한 판전(版殿)은 추사가 71세의 나이로 과천에 살면서, 병환 중에도 이곳 봉은사를 왕래할 무렵 썼다. 특히 이 판전 글씨는 입적 사흘 전에 썼다. 참으로 기괴한 아름다움을 품은 서체다. 어리숙해 보이면서도 추사 특유의 굳건하고 강건한 서력이 느껴진다.

판전 편액이 걸린 지붕을 올려다보면 꾸밈이 없는 졸박(拙樸)하면서도 추사 김정희 선생 말년의 청정무구한 심상이 담겨 있는 듯 하다. 봉은사 판전에는 신중도와 후불화로 비로자나불화가 모셔져 있다. 앞 1열과 2열의 흰 소를 탄 대자재천(大自在天)의 신중은 엄숙하고 거룩하며, 연꽃대좌 위 결가부좌의 비로자나불은 금빛으로 반짝인다.

문득 추사가 30년 만에 썼다는 두 글자 침, 계가 떠오른다. 물푸레나무(梣), 시냇물(溪). 침계(梣溪)는 조선 후기 문인 윤정현(1793~1874)의 호다. 이 두 자를 쓰기 위해 3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추사가 함경도로 귀양갔을 때 함경감사를 지낸 윤정현으로부터 호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은 추사가 한나라 예서에 침(梣)자가 없어 30년간 고민하던 끝에 예서와 해서를 합해 썼다는 것이다.

침계를 쓰고 나서 추사는 적었다. “예서로 쓰고자 했으나, 한비에 첫째 글자가 없어서 감히 함부로 쓰지 못해 마음 속에 두고 잊지 못한 것이 이미 30년이 되었다. 요즘 북조 금석문을 많이 읽어본 바 모두 예서와 해서의 합체로 쓰여 있다. 이제야 부탁을 들어 쾌히 오래 묵혔던 뜻을 갚을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서체에 대한 깊은 고뇌와 울림을 찾아 나선 추사의 이력은 놀랍다.

때마침 중국 베이징에서는 한중수교 27주년을 기념해 ‘추사 김정희와 청조 문인대화전’이 목하 열리는 중이다. 중국 국가미술관과 한국 예술의전당, 과천시 추사박물관이 공동으로 개최한 이번 추사 김정희 전시는 ‘괴(怪)의 미학’ 이란 부제처럼 추사의 기괴한 아름다움을 두루두루 맛볼 수 있는 전시라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현판 두루마리 서첩 병풍 등 87점에 담긴 추사 서체의 ‘기괴’한 정서를 한 눈에 감상하는 뜻 깊은 자리다. 유교와 불교, 도교까지 아우르는 학문과 사상을 담은 추사. 1809년 추사 나이 24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한국 서체로 한류의 정점에 섰던 추사가 210년 만에 다시 동아시아의 서예역사를 채색하고 있다.

봉은사 판전의 글씨를 올려다보면서 말년의, 질박하면서 청정무구한 그러나 한없이 굳센 경지의 정신을 보여준 추사를 떠올린다. 

[불교신문3501호/2019년7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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