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화쟁사상 바탕 … ‘세계유일’ 간화선 종주국

한국선의 역사적 분류는 대략 아홉 단계로 나누어진다. △신라 말기 이전 : 구산선문 이전 최초의 선사인 법랑과 정중종의 무상대사 △나말 여초 : 구산선문 및 여러 산문의 전개, 특히 마조계 선풍 도입 △고려 초기 : 위앙종·조동종·법안종의 전개와 교종의 발달 △고려 중기 : 보조 지눌의 간화선 전개 및 결사운동 △고려 말기 : 태고·나옹·백운을 중심으로 임제 간화선 도입 및 몽산의 선풍 전개 △조선 초기 : 척불과 통한의 불교계(무학·함허득통·벽송지엄) △조선 중기 : 서산 휴정의 휴정계와 부휴 선수의 부휴계 선풍 전개 △조선 말기의 선 논쟁 : 백파의 <선문수경>을 중심으로 130년간에 걸친 선법논쟁 △구한말~현대 : 경허 및 경허계 문하·용성의 선풍 전개이다. 
 

조계종은 종헌에서 종조는 혜능의 증법손 서당지장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은 도의국사로 명문화했다. 사진은 도의국사 진영.
조계종은 종헌에서 종조는 혜능의 증법손 서당지장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은 도의국사로 명문화했다. 사진은 도의국사 진영.

법맥 및 사자상승 재고 

법맥은 조선 중기이후부터 재고해 보자. 17세기 전반 무렵, 중기만 해도 청허 휴정(1520~1604)과 동문인 부휴 선수(1543~615)의 계보가 나란히 번성했다. 휴정은 할아버지 벽송 지엄, 스승 부용 영관, 수계사 경성 일선의 행적을 다룬 〈삼로행적(三老行蹟)〉에서 법맥 계보를 표명했다.

이는 벽송 지엄(1464∼1534)이 송대의 대혜 종고(1089~1163)와 원대의 임제종 고봉 원묘(1238~1295)를 계승했다고 밝힌 데서 유래한다. 그러다 사명대사와 친분이 깊은 1612년(휴정과 사명 입적 후), 허균이 법통을 정리했다.

허균은 법안종·임제종·조동종의 선(禪) 계보, 고려의 보조 지눌에 이은 ‘나옹 법통(평산처림과 지공의 법맥)설’을 주장했다. 그러다 허균이 역적죄로 죽음을 당한 이후 휴정의 만년 제자인 편양(1581~1644)이 다시 법통설을 주장했다.

고려 말 나옹이 아닌 ‘태고 법통’을 주장한 것이다. 곧 석옥청공-태고보우-환암혼수-구곡각운-벽계정심-벽송지엄-부용 영관-휴정이다. 근대의 경허선사도 이를 강조했으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물론 20여 년 전부터 태고와 보조 법통 문제로 논쟁이 있었다. 

현 조계종 종법에 종조는 도의, 조계종 중천조 보조 지눌, 중흥조 태고 보우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당시 편양이 고위관료에게 부탁해 휴정의 비문과 문집에 명시한 것이다. 이 점은 당시 사회 상황과도 관련된다.

명→청 교체가 된데다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청나라를 거부하며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식이 팽배했는데, 당시 유학자들이 정통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불교도 ‘임제태고 법통’을 통해 승가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조선 후기에 들어 서산 휴정의 휴정계와 부휴 선수의 부휴계, 양대 문파로 나뉜다.

휴정계는 편양파·사명파·소요파·정관파 등이 크게 발달했다. 편양파는 최대 문파로서 묘향산과 금강산 등 북방에서 활동했고, 사명파는 18세기 이후부터 저조해 문하가 드러나지 않는다. 소요파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정관파는 호남을 근거지로 문중이 발전했다. 한편 부휴계는 청허계 못지않게 문중이 크게 번성했는데, 의승군으로 활동한 벽암 각성(1575~1660)이 화엄사, 쌍계사, 법주사 등지에서 활동했고, 이후 순천 송광사를 중심으로 본산을 삼았다. 
 

정치 일선으로 드러난 스님이든 민초 같은 삶을 살다간 스님이든 출가사문은 한국불교의 한 역사다. 그 가운데 수행자의 길을 묵묵히 걸으며 등불이 된 선사들의 삶을 후학들은 다양한 형태로 남기며 따라가기도 한다. 그 가운데 한 가지가 부도이다. 사진은 해인사 부도밭.
정치 일선으로 드러난 스님이든 민초 같은 삶을 살다간 스님이든 출가사문은 한국불교의 한 역사다. 그 가운데 수행자의 길을 묵묵히 걸으며 등불이 된 선사들의 삶을 후학들은 다양한 형태로 남기며 따라가기도 한다. 그 가운데 한 가지가 부도이다. 사진은 해인사 부도밭.

‘조계종’ 종명 

조계종 종명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역사에 몇 차례 등장했다. ‘조계(曹溪)’라는 명칭은 6조 혜능이 주석했던 곳의 명칭에 연원을 둔다. ‘조계’는 신라 말 887년에 세워진 쌍계사 ‘진감국사비’부터 등장하며, 고려 전기 승과에 ‘조계업(曹溪業)’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그러다 조계종 종명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1172년(고려 명종 2)에 지어진 대감국사 탄연(사굴산문)의 비명이다. 이 비문의 ‘고려국 조계종 굴산하 단속사 대감국사비(高麗國曹溪宗堀山下斷俗寺大鑑國師碑)’라는 구절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조계종풍을 크게 떨쳤다” 혹은 “동국의 선문을 중흥하였다”는 표현이 등장했다. 

고려 초기~중기에는 화엄·유식·천태종 등 교종이 발전하면서 선종이 주춤했다. 원응국사 학일의 비문에 전하듯이 대각국사 의천이 1097년에 천태종을 개창하자, 선종 승려 70%가 개종했다. 이때, 구산선문 교단이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나마 담진(사굴산문)과 학일(가지산문)이 외부세력에 흔들림 없이 선종 승려로 남았다.

이때 구산선문에서 천태종과 확실하게 구분하며, 선종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조계종이라는 종명을 썼던 것으로 본다. 이렇게 쓰인 조계종 종명은 조선 초기에 이를 때까지 300여 년간 지속됐다. 

정확한 전거는 알 수 없지만, 이후 조계종은 독자적인 종파의 하나로 유지됐다. 조선시대에 들어 태종 6년(1406)에 선종 11개종→7종으로 통폐합될 때 조계종이 포함돼 있었다. 세종 때 국가에 의해 선교 두 종파로 통폐합되면서 ‘조계종’ 명칭은 사용되지 않았다.

이후 교종이니 선종이니 하는 것조차 사라진 무종파로 불교가 흘러왔다. 조계종 종명이 다시 등장한 것은 조선 역사 500년이 지나서다. 1941년 4월23일 일제의 사찰령 시행규칙이 개정되면서 1945년까지 조계종 종명을 다시 쓰게 됐다. 

조계종 종명이 세 번째로 등장한 것은 1954년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정화 담화에 자극받은 불교계는 6월20일 조선불교 교헌을 개정해 종명을 ‘조선불교’에서 ‘대한불교조계종’으로 변경했다. 이런데도 1954년부터 1962년까지 비구·대처 간의 분규가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1962년 비구·대처의 통합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했다.

다시 비구와 대처간의 불협화음으로 난항을 겪던 중, 1970년 대처 측이 ‘한국불교태고종’을 창종하면서 조계종은 청정 비구·비구니만의 교단이 됐다. 현 조계종은 1940년대 초대 종정인 한암(1876~1951)스님으로 시작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국선의 정체성 

조계종은 한국불교의 장자격이요, 대표 종단이다. 조계종의 수행법은 염불, 간경, 주력, 참선 등이다. 하지만 조계종은 선(禪)을 근간으로 하며, 선풍은 임제선풍으로 전 세계에서 유일한 간화선 종주국이다. 한국선의 정체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보자. 

첫째, 우리나라는 오롯이 선(禪)만을 지향한 선사들도 많지만, 선과 교를 모두 인정하며 일치를 강조한다. 허응 보우(1509~1565)는 ‘선과 교가 물과 얼음의 관계처럼 일체’라고 보았다. 그런데 선사들은 전반적으로 선을 바탕에 두고, 교를 일치시켰다. 선주교종(禪主敎從)·통교귀선(通敎歸禪) 적인 선교일치이다.

지눌은 <보조비문>에서 선에는 <육조단경>과 <대혜어록>, 교에는 이통현의 <화엄론>과 <금강경>을 강조했다. 화엄과 선에 관한 융섭이나 일치점이 신라 말기를 비롯해 조선 후기에 이른다. 대표 인물이 보조 지눌·환성 지안·연담 유일·백파 긍선·설두 유형 등이다. 한편 고려 초기에 선이 쇠퇴하는 무렵, 대각국사 의천에 교선일치가 있지만 이 또한 천태교관과의 회통으로 선을 바탕에 두고 있다. 

둘째, 수행법에 있어서는 ‘삼문(三門)’을 지향한다. 물론 앞 선교일치의 한 일환이기도 하지만, 조선 중기부터 시작해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는 삼문일치가 강조됐다. 즉 염불문(淨土)·원돈문(敎)·경절문(禪)이다. 허응 보우는 어리석은 중생은 자력이 어려우므로 ‘아미타불을 염하면 극락으로 인도될 것이라는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 점은 지눌의 사상과 비슷하다.

벽송 지엄(1464~1534)은 “조사선을 참구하고, 여러 교학을 공부하며, 여기에 정토왕생을 희구한다”고 했고, 서산 휴정도 <선가귀감>에 염불문·원돈문·경절문으로 분류했다. 여기서 염불문은 유심정토와 서방정토가 합일되어 염불 그 자체로서 인정됐다. 현대의 고암스님은 염불에 있어 참선을 통해 삼매에 들든, 염불을 통해 삼매에 들든 차이가 없다고 하면서 “염불도 그 자체로서 화두가 된다”고 보았다.

셋째, 우리나라는 이론적으로 조사선(祖師禪)이지만, 수행방법상에 있어서는 간화선이다. 나말여초에 조사선이 전개되었고, 보조 지눌·진각 혜심의 주도로 간화선이 보급됐다. 고려 말기에는 태고 보우·나옹 혜근·백운 경한이 직접 송나라에 들어가 법을 받아와 간화선을 전개했고, 몽산 덕이(1231∼1308)의 간화선 선풍이 유행했다. 이어 조선 중기 들어 서산 휴정과 편양 언기에 의해 간화선적인 흐름이 주류가 되어 근자에까지 이르고 있다.

넷째, 나말 여초~10세기 고려 말까지 선교일치였다면, 조선으로 들어와서는 불교와 유교와의 일치이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함허 득통·청허 휴정 등이 유불도(儒佛道) 일치를 강조했다. 선교 일치는 불교계 입장에서 자발적인 사상 정립이라면, 유불도 일치는 외부 세력에 대한 견제의식과 불교의 정당성을 드러내기 위해 타의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어떤 사상이나 이념과 대립이 아닌 불이(不二)·화쟁사상을 바탕에 두고 있다. 

에필로그 

10년 전 미얀마 파옥(pa-auk) 센터에서 몇 달간 머문 적이 있다. 결제철이 아닌데도 자국인과 외국인(400여명), 모두 합쳐 800여명이 상주했고, 결제철에는 1000명이 넘는다. 파옥 센터는 수도 양곤과 315km 정도 떨어진 시골인지라 외국인에게는 척박한 곳이다. 오래 머물고 싶었으나 비자 문제로 한국에 돌아와야 했다.

당시는 군부독재 체재였던지라 비자 받기가 쉽지 않았다. 그곳에서 필자는 고국의 불교를 염려했다. ‘간화선의 종주국인 우리나라 선에 왜 외국인들이 매력을 느끼지 못할까? 한국에 돌아가면 내 조국의 불교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하지만 10년이 넘도록 그냥 저냥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인물로 읽는 한국선사상사’를 18개월간 신문에 연재하면서 늘 마음 한 켠을 짓누르고 있던 빚을 갚은 느낌이다. 선사들의 탑과 진영을 구하기 위해 우리나라 전역, 수천km를 다녔다. 우리나라 불교사에 정치 일선으로 드러난 스님이든 민초 같은 삶을 살다간 스님이든 한국불교의 영원한 등불이다. 미래 한국선에 눈 푸른 선지식이 배출되기를 고대한다. 지금까지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나무아미타불 
 

도갑사 부도밭.
도갑사 부도밭.
화엄사 부도밭.
화엄사 부도밭.

[불교신문3499호/2019년6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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