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따습고 배 불리려고 출가한 것 아니다”

‘원력(願力)은 도력(道力)을 능가한다’는 말에 걸맞게 법일스님은 산청 대원사 중창을 서원하고 참선도량으로 일구는 일을 화두 삼아 평생 두타행(頭陀行)을 실천했다.
‘원력(願力)은 도력(道力)을 능가한다’는 말에 걸맞게 법일스님은 산청 대원사 중창을 서원하고 참선도량으로 일구는 일을 화두 삼아 평생 두타행(頭陀行)을 실천했다.

 

만허당(萬虛堂) 법일(法一)스님(1904~1991)은 지리산 대원사(大源寺)를 오늘의 대가람으로 일군 원력보살이다.

대원사는 지리산 천왕봉 동쪽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로 신라 진흥왕 9년(서기 548)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했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평원사(平原寺)였는데 임진왜란 때 전부 불타버렸다. 그 뒤 1685년(숙종 11)에 중창하여 대원암(大源庵)이라 했다가 1890년(고종 27) 중창을 거쳐 지금처럼 대원사가 되었다. 근대에 와서는 1914년 1월2일 밤 불이 나 절 전체가 타버렸다. 1915년 3월에 중창불사를 시작, 1917년 불사를 완료했다. 12동 건물에 184칸 규모의 대가람을 이루었다. 

그러나 1948년 여순사건의 여파로 다시 절이 불타버린데 이어 1950년 6·25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됐다. 1955년 법일스님이 주지로 와서 중창을 서원했는데 불교정화운동의 여파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1959년 고등법원에서 승소하여 난관을 극복하고 어려운 여건아래 한두 채씩 전각을 지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를 두고 운허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사중(寺中)에 일정한 수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와주는 이도 별로 없이 혈혈단신으로 한 채 지을 자재가 생기면 한 채를 짓고 두 채 지을 시주를 얻으면 두 채를 지으면서 불상을 조성하고 대종을 신주(新鑄)하여 불사를 했다. 그 고심과 노력은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니 한 비구니의 몸으로 이렇게 거대한 공사를 하였다는 것은 대원사를 위하여 서원하고 태어난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다.”(1977년 1월) 

대원사는 경남 산청군 삼장면 평촌 유평로 453에 있다. 해인사 말사로 언양 석남사, 양산 내원사와 더불어 비구니 선수행(禪修行)도량으로 유명한 대원사는 주변의 빼어난 산세에다 숲이 울창하고 계곡이 깊어 예나 이제나 탐방객의 발길이 사철 끊이지 않는 도량이다. 

‘원력(願力)은 도력(道力)을 능가한다’는 말에 걸맞게 법일스님은 폐허가 된 대원사를 40년 가까이 한마음으로 불사를 하여 오늘날 20여 채의 당우로 위용을 빛내는 여법한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일구어냈다. 비구니들의 열악한 수행환경을 개선하여 참선도량으로 일구는 일을 화두 삼아 평생 두타행(頭陀行)을 한 법일스님의 그 원대한 원력과 정진력은 후대의 귀감이 되고 있다. 

문성스님을 친견하고…

1904년 8월23일(음력) 서울 종로구 관훈동 140번지에서 아버지 청풍 김씨 유찬공과 어머니 진주 강씨 영순씨 사이에 2남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스님의 집안은 부유하고 개화된 분위기였다. 모친의 태몽에 조부께서 대봉(大鳳)을 가슴에 안겨주었다고 한다. 또 흰 머리에 두건을 쓴 노인이 대봉을 안고 대문을 거쳐 중간문에 들어와서 조부께 “대봉을 받으면 80동리가 모두 다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하여 어릴 적 이름을 봉이라 지었다 한다. 

스님의 성격은 천진난만하여 밝고 맑았으며 매사에 정확했고 유머가 풍부했다. 경기 보통학교 경기여고를 거쳐 동덕여고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을 떠나려고 진주에 있는 외가에 들렀다가 식산은행에 입사하여 10여년 근무했다. 

지리산 대원사를 오가면서 문성스님을 친견하게 되었다. 문성스님의 수행과정을 존경하여 출가를 결심하게 됐다. 1936년 9월16일 문성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스님 나이 33세 때다. 1937년 9월9일 조영암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1940년 대원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하고 쌍계사 국사암에서 고봉스님 만공스님을 모시고 수행했다.

1950년 4월8일 해인사에서 효봉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아 지녔다. 1953년 동화사 비구니 총림 교무국장을 역임하고 중앙종회의원을 수년간 역임했다. 1954년 운문사 비구니 강원 교무국장. 1955년 9월5일 대원사 주지로 발령을 받아 그때부터 중창불사 원력을 세우고 대작불사를 진행, 갖은 고난 끝에 대가람을 일구었다. 

1982, 1983년 제3, 4회 단일계단 구족계 존증아사리를 역임한 스님은 1991년 10월10일(음력) 새벽3시 도량석 목탁소리에 맞추어 사바세계의 인연을 거두었다. 세수 88세 법랍 55년. 

입적하기 전 1991년 어느 날 툇마루에 나와 앉아 넘어가는 해를 눈부신 듯 바라보던 스님이 시자에게 물었다. 

“저 앞산에 뭐가 있느냐?” “나무가 많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껄껄 웃으면서 “텅 비었다. 삼라만상이 텅 비었어” 했다. 그러고는 스님은 자리에 누웠다. 스님의 환우 소식을 듣고 문중 스님들과 후학들이 스님의 병문안을 왔다. 시자가 스님에게 후학들이 마음에 새길 말씀을 해주십사 여쭈었다. 

“무슨 할 말이 따로 있느냐. 중노릇 잘하고 있는데 무슨 군더더기 말이 필요하다고 조르느냐. 학인들 배고프다. 빨리 따뜻한 밥이나 챙겨 먹여라.” 이렇게 답하고 나서 스님은 다시 자리에 누웠다. 의사의 간곡한 말에도 스님은 곡기를 물리쳤다. 시자가 걱정스럽게 ‘스님!’하고 부르면 “방해하지 마라”하며 화두를 놓지 않은 법일스님. 대작불사를 하면서도 정진열을 불사르던 스님의 평생 모습이었다. 

스님 입적 후 문도들은 2013년 <방장산 대원사와 만허당 법일스님>이란 책을 엮어내며 스님을 기렸다. 방장산(方丈山)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이 세상에서 승려로 살아가기가 어찌 쉽고 편안하기만 하겠느냐. 우리는 등 따습고 배 불리려고 출가한 것이 아니다. 나고 죽는 윤회의 업장을 벗어나고 녹여 없애기 위해 출가하지 않았느냐.” 대원사 중창불사를 하면서 지칠 대로 지친 상좌들이 스님에게 다른 절에 가서 좀 쉬면서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떠냐는 말을 하자 스님이 단호하게 상좌들에게 한 말이다. 
 

여순사건 6·25전쟁 등으로 
폐허됐던 지리산 ‘대원사’
오늘날 20여동에 이르는 
대가람으로 일군 원력보살 

불사할 때는 ‘선방 우선시’
선객들 부처님 모시듯 해
대원사 탑전 동국제일 칭송 
쌍계사 국사암 선방도 개원 

“나고 죽는 윤회업장 녹여 
없애기 위해 출가하지 않았나”
비구니 수행환경 개선 위해 
평생 참선도량 일구는 두타행

“대원사를 위해 서원하고 
태어났다 아니할 수 없어” 
-운허스님 말씀 중에서

 

‘비구니와 대처승 싸움’ 주목

스님인들 왜 상좌들 마음을 모르랴. 불교정화운동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찰은 비구승과 대처승의 싸움인데 비해 대원사의 경우는 비구니와 대처승 간의 싸움이라 당시에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처측은 비구니에게 밀리거나 질 경우에는 걷잡을 수 없는 패배의 회오리 속으로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강한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다.

법정시비에 변호사를 선임할 비용도 없었고 종단에서도 지방 사찰의 법정투쟁까지 도와 줄 여력이 없었다. 상좌들에게 절을 지키라고 부탁한 뒤 스님은 홀로 진주로 나와 변호사 없이 ‘진실에 대한 믿음’ 하나로 대처승 측과 맞섰다. 재판은 1년반을 끌었다. 결국 재판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스님과 상좌들은 지칠 대로 지쳤고 상처 또한 깊었다. 

중창불사를 계속할 힘도 다했고 더구나 절을 짓기 위해 어렵사리 모은 시줏돈은 전부 재판 비용으로 날아가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또 신도들에게 불사를 위해 시주하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형편이기에 상좌들이 스님께 드린 말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스님의 말이 이렇듯 단호했다. 당신의 강한 뜻을 내비친 스님은 또 한 편 ‘단단한 땅에 물이 고인다’는 말로 상좌들을 다독이고 새 힘을 불어넣었다.

법일스님은 지리산 자락 두 곳에서 선방(禪房)불사를 했다. 쌍계사 국사암에 머물면서 선방을 개원했고 또 하나는 대원사 탑전 불사다. 스님이 불사를 할 때는 어떤 당우(堂宇)보다 선방을 우선시 했다. 선방을 찾는 선객들을 부처님 모시듯 했다. 대원사 탑전을 오늘날 ‘동국제일선원’이라 일컫는 데서 스님의 원력을 알 수 있다. 

대원사 불사에 매진할 때다. 어느 날 스님은 출타했다가 어두운 밤 절로 돌아오는 길에 듬성듬성 틈이 벌어진 나무다리를 건너다가 다리 사이에 빠져 계곡 아래로 떨어졌다. 스님을 기다리던 대중이 그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놀라 달려가 보니 스님은 멀쩡했다. 계곡 돌 틈에 끼인 채 떨어진 것도 잊은 듯 화두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스님은 추운 겨울에도 방이 뜨뜻하게 불을 때는 일이 없었다. 장작 서너 개로 지리산의 매서운 냉기를 이겨냈다. 시자가 장작 한 개비라도 더 태울 때면 엄하게 나무랐다. 

“장작 한 개비의 은혜가 얼마나 무거운지 생각해 봐라” 시주의 은혜를 중히 여겨 휴지 한 조각도 아껴 쓴 스님. 법일스님은 험난한 세월을 살아가면서 정진과 불사를 함께 이루어 수행자의 표상의 되고 있다. 

■ 도움말 : 도행스님(대원사)  
■ 자     료 : <방장산 대원사와 만허당 법일스님>, 전통사찰 총서20<경남의 전통사찰3>(사찰문화연구원刊:2005년).

[불교신문3499호/2019년6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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