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기록 ‘잃어버린 성지’] <5> 철원 안양사
[현장기록 ‘잃어버린 성지’] <5> 철원 안양사
  • 박봉영 기자
  • 승인 2019.06.2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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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갇힌 동안 국가 귀속 ‘질곡의 성지’

금강산 통하는 길목에 위치
한국전쟁 거치며 폐허 추정
특별조치 통해 소유권 회복
통제완화로 거주 출입 가능
사찰기능 회복 가능성 충분
원형 확인할 발굴조사 시급
금강산으로 향하는 최단거리 길목에 있던 철원 안양사는 해방 직후 북한령이었다가 한국전쟁 이후 남한령이 됐지만 거주와 출입이 불가능한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묶여 어떻게 폐허가 됐는지 알 수 없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국가 소유로 바뀌었다가 최근에야 불교의 품으로 돌아왔다. 전체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전체 사역과 도량의 원형을 확인하지 못한채 수목과 풀이 무성하게 자리 잡았다.
금강산으로 향하는 최단거리 길목에 있던 철원 안양사는 해방 직후 북한령이었다가 한국전쟁 이후 남한령이 됐지만 거주와 출입이 불가능한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묶여 어떻게 폐허가 됐는지 알 수 없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국가 소유로 바뀌었다가 최근에야 불교의 품으로 돌아왔다. 전체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전체 사역과 도량의 원형을 확인하지 못한채 수목과 풀이 무성하게 자리 잡았다.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역사문화적 미술사적 가치가 높아 국보 제63호로 지정돼 있다. 현존하는 철불 가운데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수려한 성보 작품이다. 이 철불은 신라 경덕왕 때인 865년 철원지역의 신도 1500명의 발원으로 조성됐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도피안사 철불에 얽힌 설화는 안양사(安養寺)와 얽혀 있다. 이 철불은 사찰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조성된 모양이다. 새로 조성해 안양사로 이운하던 중 철불이 사라졌다. 이운하던 스님들이 백방으로 찾아나섰다. 찾아낸 장소가 지금의 도피안사다. 부처님이 사라져 피안에 이르렀다는 의미로 이 곳에 도량을 만들고 피안사라 이름했다.

그런데 도피안사에 모셔진 부처님의 원래 자리가 안양사로 전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안양사는 주지 임명 및 재산 변동 등의 기록을 통해 1945년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3.8선 이북에 위치해 해방과 함께 북한에 귀속됐다. 이후 공식적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남한의 영토가 됐지만, 휴전선과 인접해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지역이 됐다. ‘민통선으로 불리는 민간인 통제구역에 포함돼 버렸다. 일종의 군사보호구역이다.

민간인 통제구역은 군이 허락한 사람들만 일정한 지역에서 거주할 수 있다. 철원읍 율이리, 보개산 자락 고대산에 위치한 안양사는 과거에는 서울과 금강산을 통하는 최단거리 길목에 자리잡은 요지의 사찰이었으나 한국전쟁 후 누구도 거주할 수 없는 지역에 포함됐다. 안양사는 스님도 머물 수 없는 상태로 방치되면서 폐허로 남았다.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폐허가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철원지역이 한국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 중 하나였던 점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금강산으로 통하는 안양사 앞길은 군사용 전술도로로 쓰이면서 확장돼 안양사 터의 일부는 잘려나갔다. 지금도 안양사로 진입하는 길 양편은 처리하지 않은 지뢰밭이 남아 있고 군부대와 군훈련장 등이 있어 남북분단의 현실을 실감할 수 있다.
 

'유점사본말사지'에 수록돼 있는 일제강점기 안양사 모습.
'유점사본말사지'에 수록돼 있는 일제강점기 안양사 모습.

<유점사본말사지>에 따르면, 안양사는 신라 경문왕 때인 863년 사굴산문의 개산조인 범일국사에 의해 창건됐다. 창건 당시 극락삼성은 나무로, 관세음보살 2위는 돌로 만들어 봉안하고 안양사라고 이름지었다. 이후 부속암자로 복혜암(福慧庵), 대승암(大乘庵), 수월암(水月庵) 등이 추가로 세워졌다. 주지 임명 기록이 남아 있는 조선총독부 관보에서는 대승암과 복혜암은 확인되지 않고 복희암이 등장하는데 복혜암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40년대 안양사의 사진이 <유점사본말사지>에 수록돼 있어 폐사 전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안양사의 폐사는 정확한 원인을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한국 현대사의 피해를 받은 사찰이라는 점이다.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묶인 뒤 사찰이 통째로 국가 소유로 바뀌어버렸다. 해방 직후 북한령이 되었다가 다시 남한으로 수복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하더라도 국방부의 거주 및 출입 불가도 모자라 국가 소유로 뒤바뀐 것은 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벌어진 횡포와 다름 아니다.

조계종단은 민간인 통제구역 해제 직후 국가를 상대로 터만 남은 안양사를 되돌려달라는 신청을 제기해 1992년 전각들이 위치해 있던 자리와 밭 등 5필지의 소유권을 회복했다. 하지만 이것은 안양사의 일부에 불과하다. 사역으로 추정되는 지역과 산림으로 바뀌어버린 주변의 임야, 진입로 등은 여전히 국가 소유다.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통해 발견된 유물 역시 국가 소유로 편입돼버렸다.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 또한 숙제처럼 남게 됐다. 지금도 인근 지역주민들은 안양사의 소유지가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묶인 동안 소유자가 바뀌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중심사역에 대한 시굴조사 당시 항공사진. 안양사 전체 사역을 확인하기 위한 발굴조사가 필요하다.
중심사역에 대한 시굴조사 당시 항공사진. 안양사 전체 사역을 확인하기 위한 발굴조사가 필요하다.

조계종은 안양사를 직할교구 말사로 지위를 회복해 안양사가 사찰로서의 기능을 되찾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왔다.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주관한 2013년 지표조사와 2016년 시굴조사에서 안양사명 기와 조각이 발견돼 사명이 밝혀진 점이나 중심 사역의 형태 및 건물지 등이 확인된 점 등은 안양사의 역사성과 맥을 확인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통해 정밀한 발굴조사의 필요성도 얻어냈다. 주지 임명을 통해 잃어버린 성지 안양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노력도 병행하고 있어 안양사 터가 안양사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도 갖고 있다.

그러나 시굴조사가 진행된지 3년이 지났지만 안양사 터는 여전히 발굴조사로 이어지지 못한고 있다. 특히 시굴조사가 진행된 유적이 수목이 자리 잡는 등 점차 산림이 확산되는 현상이 나타나 원형 훼손의 우려가 상존해있다. 더 이상의 훼손 없이 전체 사역과 원형을 온전히 확인하려면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빠른 시일내 이뤄져야 한다.

김진덕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팀장은 역사적, 문화적, 학술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안양사지는 군사보호구역에 위치하고 있어 체계적 관리가 불가능한 상황인데다가 인근 지역주민 등에 의한 경작활동과 채취활동 등으로 지속적인 훼손이 발생하고 있다사역 전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시급히 이뤄져야 하고, 안내판 설치 등 보존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계종은 안양사의 원형을 확인하기 위해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진행했으나 전체 사역에 대한 발굴조사는 이뤄지지 못했다. 2016년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주관한 시굴조사 현장설명회.
조계종은 안양사의 원형을 확인하기 위해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진행했으나 전체 사역에 대한 발굴조사는 이뤄지지 못했다. 2016년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주관한 시굴조사 현장설명회.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시행한 안양사지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안양사명 기와 조각.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시행한 안양사지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안양사명 기와 조각.

[불교신문3499호/2019년6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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