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60주년 맞이 특별기획’
불교신문으로 보는 근현대 불교사 명장면 ① 1960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신문인 불교신문은 1960년 창간 이후 현재까지 한국불교 역사를 기록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포교지로서 역할을 해왔다. 본 기획에서는 불교신문 창간 이후 현재까지 한국불교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순간들을 선정해 6회에 걸쳐 소개한다.

불교신문은 1960년 창간 이후 한국불교 역사를 기록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포교지로서 역할을 해왔다. 불교신문 창간호 1960년 1월1일자
불교신문은 1960년 창간 이후 한국불교 역사를 기록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포교지로서 역할을 해왔다. 불교신문 창간호 1960년 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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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신문 전신 대한불교 창간
1960년 1월1일 불교신문 창간은 한국불교 정화운동의 산물이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됐던 정화운동 흐름 속에서 불교 대중화와 포교 현대화를 모토로 대한불교(불교신문 전신)가 창간됐다. 당시 발행인이자 사장이었던 총무원장 청담스님 창간사에도 종단과 신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잘 나타나 있다.

청담스님은 창간사에서 “<대한불교>지가 비록 좁은 지면이지만 종단의 발전상 필요 과제를 비롯하여 평론 교리 문예 그리고 종보 교계소식지 다방면의 원고를 취합할 계획인 바 이에는 각자의 참된 협조가 필요불가결의 조건”이라고 강조하며 신문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또 당시 종정 동산스님의 ‘불교도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교시를 통해 종단 정화운동의 정신과 이념을 선양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 6비구 할복과 전국승려대회
수행과 청정성 회복을 내걸고 시작된 불교정화운동은 한국불교의 전통을 되살리기 위한 불사였다. 1955년 8월 승려대회를 통해 법적 정당성을 갖추고 조계종이 출범했지만 정화운동의 길은 쉽지 않았다. 비구-대처 갈등은 심화됐으며, 종단을 부정하는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1960년 11월 조계사에서 승려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결국 대처 측의 손을 들어 준 대법원 판결에 항의하며 스님 6명이 할복하는 ‘6비구 할복사건’이 일어났다.

이같은 상황에서 불교신문은 정화운동의 당위성을 피력하는데 중점을 뒀다. 당시 특보(1960년 11월24일자)를 통해 ‘제2회 전국승려대회’, ‘정화완수 순교단조직’, ‘순교제일단 할복 대법원장실에서’, ‘전국신도비상대회’ 등 관련 기사와 스님들의 단지혈서 사진 등을 보도하며 불교계 여론을 주도했다.

- 종단정화운동과 통합종단 출범
종단정화불사는 1962년 통합종단 출범으로 일단락됐다. 불교신문 역시 통합종단 출범의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다. 통합종단 출범을 위한 종헌 선포를 다룬 ‘드디어! 종단은 정화되다’(1962년 4월1일자) 기사는 ‘출가독신으로 여법수도교화에 전력하는 자만이 승려’, ‘획기적신종헌선포’ 등의 부제를 통해 통합종단에 대한 기대감을 소개했다. 또 승려의 자격을 출가독신으로 명확히 규정해 정화불사 정신의 계승을 강조하고 있다.

이어 ‘통일종단 종정과 총무원장 취임식 거행’(1962년 5월1일자) 기사에서 역사적인 통합종단 출범을 알렸다. 취임식에서 종정 효봉스님은 “만물이 꽃피는 이 때에 불교종단이 단합했음은 매우 뜻깊은 일로서 우리는 앞으로 시들지 않는 한국불교의 꽃을 가꾸어나가자”는 유시를 내리며 통합종단 출범 의미를 강조했다.

- 대학생 불교학생회 붐과 대불련 창립
1960년대 초‧중반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불교 붐이 일었던 시기다. 대학생 불자들의 뜨거운 수행 열기는 불교를 역동적으로 만든 원동력이 됐다. 각 대학 불교학생회를 중심으로 수련회가 활발해졌으며, 이는 1963년 9월대학생 불교 연합 조직인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창립으로 이어진다.

불교신문은 당시 사설(1963년 10월1일자)을 통해 대불련 창립 소식을 다뤘다. 사설에서는 “우리는 한국대학생들이 불타의 가르침에 따르며 그들의 순수한 의욕과 정열을 바칠 광장을 스스로 마련한데 대해 기대가 큰 것이다… 그들의 가슴에타는 불씨가 불타의 대비원력을 받들어 새 역사의 창조에 거화가 될 것을 바라는 바이다”라고 기대감을 나타났다.

- 도제양성 포교 역경 ‘종단 3대 사업’ 정립
통합종단 출범 이후 종단은 도제양성과 포교, 역경을 3대 지표로 삼아 불교발전을 모색해 왔다. 3대 사업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63년 11월 제5회 종회다. 불교신문도 1963년 12월1일자 종정 교시와 ‘3대 사업을 적극 추진’이라는 제목으로 3대 사업이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종단과 보조를 맞추며 힘썼다.

당시 종정 효봉스님은 교시에서 “새해에는 3대 사업을 위시한 불자본연의 임무에 온힘을 다해야겠습니다. 종회의원 여러분은 이번 정기회에서 3대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위한 기본 계획과 건설적인 구상을 결의하여 도제양성과 신도포교 그리고 역경 출판에 박차를 가해 매진하도록 힘써주기 바랍니다”라고 종단 3대 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이듬해인 1964년 1월 제6회 종회에서 3대 사업이 확정됐다.

- 법정스님과 불교신문
법정스님과 불교신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간직하고 있다. 법정스님 글이 최초로 본지에 게재된 것은 1963년 4월1일자로, 당시 스님은 ‘어진사슴’을 시작으로 불교설화를 자주 연재했으며, 1964년 10월1일자를 시작으로 ‘부처님 전상서’라는 코너를 통해 한국불교의 낡은 인습을 비판하기도 했다.

“부처님 당신의 가사와 발우를 가진 제자들은 오늘날 이 겨레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는 글은 승가교육과 급조승, 무속행위, 무분별한 불사 등 불교계 내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또 1966년 7월초 ‘역사여 되풀이 되지 말라’는 글을 통해 총무원에서 전국 사찰에 ‘월남파병 무운장구 백일기도’를 지시한 점을 비판하는 등 종단 발전을 위해 애정어린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해인총림 방장 성철스님 인터뷰를 다룬 불교신문 1967년 9월3일자
해인총림 방장 성철스님 인터뷰를 다룬 불교신문 1967년 9월3일자
군승장교탄생 순간을 보도한 불교신문 1968년 12월8일자
군승장교탄생 순간을 보도한 불교신문 1968년 12월8일자

- 해인총림 설립과 성철스님 백일법문
통합종단 출범 이후 종단은 청정수행 가풍과 비구승단 전통 회복을 위해 총림 설립에 나섰다. 봉암사 결사를 주도했던 청담스님, 성철스님 등에 의해 1946년 해인사에 가야총림이 설립됐지만 열악한 재정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통합종단 출범은 이후 총림 설립이 본격 추진됐고, 1967년 7월 종회에서 총림법이 통과되면서 해인총림 시대가 막이 올랐다.

초대 방장에는 성철스님이 추대됐다. 방장 취임 이후 성철스님은 1967년 12월2일부터 100일간 법문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백일법문의 시작이었다. 당시 불교신문은 ‘해인총림방장 성철스님’(1967년 9월3일자) 인터뷰 기사를 소개했다. 성철스님은 “계‧정‧혜 삼학을 바탕으로 엄격한 계율과 일관된 이론 그리고 철저한 참선을 닦아 견성성불을 지상목표로 하겠다”고 총림운영의 기본방침을 밝혔다.

- 군불교의 첫걸음 군승 파견
종단 차원에서 군승 파견을 공식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1964년 12월이었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은 국방부에 군종승제도 실시를 요청하는 청원을 제출한 데 이어, 이듬해인 1965년 2월에도 2차 청원을 제출했다. 국방부가 1968년 5월 군종장교 요원 선발규정을 발표하며 마침내 군종승제도가 실시됐다.

후보생으로 5명이 최종 합격했으며, 군사훈련을 떠나는 후보생들을 종단에서는 고불식을 열고 대대적으로 환송했다. 불교신문 역시 후보생 5명의 사진과 함께 ‘군승장교 고불식’(1968년 9월15일자) 기사를 보도한 데 이어, 1968년 11월30일 임관식 현장을 담은 ‘군승장교 탄생’(1968년 12월8일자) 기사와 사설 ‘감개무량한 군승장교’을 게재하며 불교계 오랜 숙원이 이뤄진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했다.

- 전국비구니회 모태 우담바라회 창립
비구니 스님들은 한국불교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이다. 비구니 스님들의 활동이 본격화된 시기는 1968년 2월 현 전국비구니회 전신인 우담바라회가 창립되면서 부터다. 정화운동에 적극 참가하며 비구니 스님들의 전국 조직 결성이 논의됐고, 우담바라회 창립으로 결실을 맺게 됐다.

당시 불교신문은 ‘전국비구니단합 총회 비구니 우담바라회 발족’(1968년 3월17일자) 기사를 통해 ‘한국불교 새 역사 탄생’으로 평가했다. 기사는 “불교현대화를 위한 인재양성과 시대가 요구하는 포교의 근대화를 위해 전국에 산재한 5천여비구니들이 단합했다”고 창립 의미를 밝히며 전국비구니 사암의 실태 파악, 획일적인 교육 과정, 포교 내용을 통일하는 교화대책 마련 등 활동계획을 상세히 소개했다.

- 부처님오신날로 봉축행사 명칭 통일
4월초파일, 석가탄신일, 석탄일, 불탄절 등 과거에는 부처님오신날을 부르는 명칭이 사찰이나 단체별로 각양각색이었다. 명칭이 통일된 것은 1968년 3월19일 제2차 봉축행사준비위원회 회의였다.

당시 불교신문은 ‘4‧8 봉축 위원회 구성’(1968년 3월24일자) 기사를 통해 “교계스님들과 각신도단체, 종립학교대표 25명이 참석한 이날의 회의에서는 제일 먼저 석가세존의 탄일에 대한 공식명칭결정에 관해 심각히 논의, 우선 사월초파일을 ‘부처님오신날’로 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회의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후 ‘4월초8일을 부처님오신날로 금년부터 일체의 봉축행사도 통일 모든 불자 가슴엔 리본달고 1주일 전부터 각종 행사’(1968년 4월14일자) 기사를 통해 전국 사찰이 통일된 명칭을 사용하도록 계도하는데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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