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60주년 맞이 특별기획

참 많이도 변했다. 수행자는 빛바랜 사진을 보며 그렇게도 붙잡으려 애썼던 초심이 그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출가 초기 찍었던, 굳이 남기려 하지 않았으나 남아 있는 한 장의 사진을 다시 꺼내면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 저절로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조계총림 송광사승가대학 교수사 일귀스님이 그동안 한번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스런 ‘한 장의 사진’을 멋쩍게 다시 꺼냈다. 빛바랜 사진 속 수행자는 그때처럼 지금도 수행의 길을 묻고 있다.

 

1   굳은 결심으로 나선 출가의 길, 행자생활은 고단했다. 새벽 3시부터 시작된 일은 밤 9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온갖 허드렛일이었다. 이것을 견뎌야 비로소 수행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벼텼다. 방에 돌아가면 코피를 쏟은 날도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들 힘들 때였지만 행자생활은 유독 힘들었다. 

당시엔 행자복이 따로 있지 않았다. 여느 승복과 다르지 않았고 사미와 비구의 구분도 없었다. 하지만 차림새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발목 부위를 감싸는 행건이 색다르게 눈에 띈다. 행건은 넓은 폭의 바지에 때가 덜 타게 하도록 하는 천이다. 절 생활 뿐만 아니라 산일과 들일까지 해야하는 스님들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행건이 바지를 감싸 매일 바지를 빨아야 하는 번거로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매일 갈아입을 승복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 행건은 스님들의 의제 가운데 하나였다. 요즘은 행건이 필요할 만큼 빈곤하지 않은 것이다. 달라진 절 풍속이 옛 의제에 살아있다. 

힘든 행자생활에도 출가의 길을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사미계를 받기 전 어머니가 송광사를 찾아왔다. 출가 전 양친의 허락을 받았음에도 모친은 마음까지 보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집에 가자고 설득하러 온 어머니에게 행자는 차갑게 굴었다. 어머니는 행자에게 “엄마 생각 안나냐”고 물었다. 행자는 매몰차게 말했다. “안난다.” 사진이라도 한 장 찍자는 어머니.

그렇게 아들의 모습을 간직하고픈 어머니와 나란히 선 행자는 미련이 없는 듯 표정을 숨겼다. 손을 따뜻하게 잡지도 않았고 얼른 돌아가시라 재촉했다. 아들의 굳은 결심을 확인한 어머니는 이후 다시는 아들을 찾아오지 않았다. 모친의 이야기를 하는 일귀스님의 표정은 한번쯤 흔들릴만도 하지만 변화가 없다. 단 한번도 후회하지 않은 38년의 출가생활이 그 속에 담겨 있는 듯하다. 
 

2   일귀스님은 1981년 출가했다. 고향 해남엔 대흥사가 있었지만 집 가까운 곳으론 가고 싶지 않았다. 요즘처럼 어떤 절이 있는지도 몰랐고 집에서 먼 해인사로 가기로 마음 먹었다. 해인사로 향하던 발걸음은 고향땅을 벗어나기도 전 멈추고야 말았다. 이름이 꽤나 알려진 송광사를 보고 해인사로 가고자 했던게 화근이었다.

25년 짧은 경험상 이렇게 멋진 사찰은 처음 보았다. 해인사로 향하던 발걸음은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별좌 스님의 권유로 송광사에서 멈추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별좌는 사찰의 안살림을 맡는 원주 스님을 보조하는 소임이다. “절이 다 똑같은 절인데, 해인사까지 갈 필요가 뭐 있느냐”는 별좌 스님의 유혹에 넘어가고야 말았다. 8개월의 행자생활을 마치고 정작 사미계는 종단의 수계산림이 열린 해인사에서 받았다.

출가생활의 대부분을 강원에서 보내고 있는 일귀스님도 처음엔 참선수행의 길을 걸었다. 참선 수행이 최고라는 가풍을 좇았다. 첫 방부를 들였던 곳은 정혜사 선원. 대중과 함께 수덕사에 내려갔다가 부끄러운 일을 겪었다. 관람객이 주련에 적힌 한문을 물었다. 답하지 못했다. 

1982년 하안거를 마치고 해인사강원으로 향했다. 예비과정인 사미율의반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가야산 깊은 곳에 위치한 해인사는 세상과 떨어져 있었다. 공부하기 좋은 도량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해인사는 대중 울력이 유독 많았다. 눈 내리던 날, 그날도 규율이 엄격한 강원은 구역을 나눠 눈치우기 울력에 나섰다. 일귀스님은 울력하던 중 소박한 절 풍경이 담긴 사진을 남겼다. 여기저기 꿰맨 누비옷을 입고 행건을 찬 행색이 흐릿하게 기록됐다.
 

3   사진첩을 들추던 일귀스님의 손이 멈췄다.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1989년경 찍힌 사진으로 기억했다. 기억은 왜곡이 있는 듯했다. 수행이력을 살피다가 1990년이 맞다고 확인했다.

1990년, 일귀스님은 송광사 강원에서 중강으로 있었다. 어느날 잘 알고 지내는 신도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강의를 마치고 강원을 나서는 스님의 모습이었다. 사진을 찍는 줄도 몰랐다. 가사장삼을 수하고 무심히 도량을 걷는 일귀스님의 모습은 위의가 살아있다. 

일귀스님은 이후 승가대학원 재학시절을 제외하고는 줄곧 송광사에서 살았다. 강원의 중강과 교수를 거쳐 학장 소임을 다했다. 그 사이 강원은 종단 학제 개편으로 승가대학으로 바뀌었다. 학장 소임까지 마치고나니 교수사라는 직함으로 불리지만 이는 어른 교수라는 것 외에 별다른 것은 없다고 했다. 

일귀스님은 은사 구산스님과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출가했을 때 구산스님은 이미 송광사에서 가장 큰 어른이었다. 모두들 큰스님이라고 불렀고, 은사를 정해야 한다는 말에 큰스님 문하로 들고 싶다고 했다. 

극도로 건강이 나빠진 은사 구산스님을 모실 시자가 마땅치 않다는 전갈을 받고 송광사로 돌아왔다. 해인사 강원 치문반 수학 중 일이다. 마침 송광사에 강원이 다시 개원했다. 세속에서는 학교를 옮기는 ‘전학’이라고 하지만 불가에서는 강원을 옮기는 ‘전원’이다. 

구산스님의 노년 문하로 출가한 일귀스님은 은사로부터 별다른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 워낙 노쇠한 탓이 컸다. 하지만 일귀스님은 구산스님의 살아있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 구산스님은 삼경 시간을 제외하고는 노구를 바닥에 누이지 않았다. 말년에 꼿꼿할 수 있는 것은 젊어서도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저는 지금도 힘들면 눕습니다.” 일귀스님은 은사 스님이 몸소 보여준 ‘위대한 가르침’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송광사=박봉영 기자 bypark@ibulgyo.com

[불교신문3498호/2019년6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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