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철규
조철규

우리는 대상을 대하고 의식한다. 이렇듯 삶의 방향은 무엇을 대하고 느끼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이러한 의식이나 신념은 아무리 똑같은 구조적 공간이나 조건적 시간 속에 처하여 있다하더라도 사람마다 다르다. 개인의 주관적 성정과 직·간접으로 느끼는 체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산 역시 저마다 주관적 감각으로 가지고 있는 느낌이 다르다.

이러한 의식이 산행을 통하여 자기만이 산을 사색하고 철학하게 만든다. 때문에 산은 누구나 자기만이 가질 수 있는 산이 있다. 그러므로 산은 누가 묘사하여 듣거나 바라봤던 산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꺼내온 산이거나 산에서 꺼내온 마음의 산이 내 안에 내재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산행을 통하여 실천하므로 구체화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산행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행위를 담보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정작 산에 있을 때 보다 생활 속으로 깊숙이 내려와 있는 산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산은 저마다 다른 삶과 다른 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차별 없이 받아주고 있다. 그러므로 산은 우리 곁의 가장 큰 실존적 대상으로 있다. 심지어 아버지의 산, 어머니의 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70%가 산지이다. 그 산을 개발의 이름으로 자꾸 깎아 뭉개고 있다.

하지만 산지국가에 살면서 이 산이라는 무한성의 용기에 나를 담아 내가 품고 있는 이기나 탐욕으로 가득한 나의 몸과 마음을 씻어주고 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생태의 보고로 예술과 창작, 취미와 건강, 믿음과 종교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산은 우리의 생활공간에서 근간이 되고 있다.

그래서 산은 예로부터 정신적 세계가 내재되어 있는 대상으로 여겼다. 누구는 그 산에 들어가 수행을 일삼아 도를 닦았고 기도를 드렸다. 누구는 산의 의미를 추론하여 따르거나 산의 경지를 열어 보이고자 했다. 또 누구는 산을 고통스럽게 생각하여 피하거나 두려워했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 나름의 산을 간직하고 있다. 나라는 존재가 자연과 인간이라는 경계를 뛰어넘어 산이 되기도 하고 산이 나를 담아 주거나 내가 산을 담아내기도 했다. 내가 산에 가거나 산이 내게 오거나 하는 관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왔다. 오히려 내가 산을 담아내거나 산이 나를 담아주므로 나라는 존재가 적극적인 행위의 주체자로 산행이 꾸려졌다.   

그 산이란, 바로 천하의 지수화풍파(地水火風波)를 다 갖추고 있다. 어느 곳은 높고 어느 곳은 깊고 또 멀리 있거나 아주 가까이 보여주고 있다. 그 산이 바로 참된 나의 의지처(意志處)로 나의 스승이요, 나의 길이다. 한 걸음 한 걸음, 아주 천천히 산을 찾아 길을 밟고 올라가 보자. 자연의 순리, 삶의 정의를 내릴 수 있다.

누가 무어라 해도 나의 신념과 사상, 나의 철학과 믿음이 산이고, 나의 생활이 산이고, 나의 운명이 산이다. 나의 삶이 향하는 산행은 끊임없이 이루어져 왔고 나는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삶이 산으로 향하고 있다.

산을 올라가보면 정상으로 가는 길이 위험할 때도 있다. 하지만 평탄하고 쉬운 길을 걸어 가볍게 가기보다 나의 가능성과 능력을 가늠하여 올라가 보자. 올라가보고 싶은 길은 얼마든지 있다. 다만 준비하고 생각하며 올라가야 하는 길이 산이다.

“인간의 철학 없이는 삶의 경험이론이 불가능하고 자연의 철학 없이는 인간의 철학이 불가능하다”는 독일의 철학자 플레스너(Halmuth Plessner, 1892~1985)의 말처럼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더욱이 그게 산으로 가는 길이면, 자기의 참된 모습과 자연의 본래이치를 사상하고 철학할 줄 아는 가치와 지혜가 필요하다. 

[불교신문3498호/2019년6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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