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둘은 연인이로구나, 어찌할꼬…”

 

398년 12월, 위나라 

고구려와 백제가 전쟁에 한창일 때, 화북은 위(魏)나라와 연나라가 대립하고 있었다. 위나라를 건국한 탁발규는 진나라의 황제 부견에 의해 멸망한 대나라의 후예였다. 395년, 탁발규는 오랜 숙적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포로로 잡힌 군사 5만명을 참합피에서 처형했다. 분노한 연나라 황제 모용수는 일흔의 나이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의 주요 지역을 함락했다. 하지만 평성으로 향하던 길목인 참합피에서 연나라 군사의 시체가 산을 이룬 것을 목격하고 만다. 충격에 빠진 모용수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수도 중산으로 돌아가던 중 끝내 세상을 떠났다. 

모용수의 죽음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탁발규는 곧바로 40만 대군을 동원하여 연나라를 공격했고 수도 중산을 점령했다. 이로써 연나라의 기세는 크게 꺾였고 위나라는 화북의 패자로 자리매김했다. 이어서 탁발규는 연나라 수도 중산 및 주요 도시의 관리와 백성들을 강제 이주시켜 저항의 싹을 잘라내고 강력한 통치체제를 구축했다. 398년, 평성으로 수도를 천도한 탁발규는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남북조 시대의 시작이었다. 이듬해 봄, 탁발규는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했다. 위나라가 화북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위나라의 사신단이 고구려에 도착할 무렵, 담덕은 백제의 움직임 때문에 한껏 예민해져 있었다. 오래전 담덕이 거란을 이용해 백제를 압박했던 것처럼 백제는 왜를 이용하여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고구려를 압박하고 있었다. 왜의 대규모 수군은 백제의 묵인 하에 신라의 영토를 마음껏 짓밟았고 신라는 다급하게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신라는 한시가 급했으나 고구려가 군사를 움직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담덕은 신라의 영토에서 전쟁을 벌이려는 백제의 영악한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백제는 고구려군이 신라에 도착하자마자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공격할 것이었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백제와 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려면 신중해야 했다. 군사를 보내기 전,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전쟁에서 이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렇게 담덕의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을 때, 동맹을 제안하는 위나라의 사신이 도착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먼저 사신을 보내신 황제의 배려에 감사를 전하오.”

위나라 사신은 담덕의 치사에 고개를 숙였다. 위나라 사신으로 고구려에 온 이들 중에는 위구르의 혈통을 지닌 ‘굴마’라는 남자도 있었다. 그는 압도적인 기상과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담덕을 보며 감탄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하더니 고구려의 주인도 대단한 용이로다.’

굴마는 젊은 나이에 대나라를 재건하고 화북 통일이라는 패업을 이룬 위나라 황제 탁발규에게 진심으로 충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고구려에 와보니 이곳의 왕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고구려 왕과 위나라 황제는 분위기는 물론 나이도 비슷해 보였다. 

‘만약 고구려와 위나라가 서로 적이 된다면 전쟁이 끊이지 않겠구나.’

굴마는 이번 동맹이 얼마나 중요한 사안인지 단번에 알았다. 담덕과 탁발규, 두 영웅이 맞붙게 된다면 어느 한쪽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양국의 백성들은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리게 될 것이었다. 위나라와 고구려가 국경을 맞대지 않고 있다는 것과 연나라라는 공동의 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고도령, 위나라 사신을 맞다 

“이곳은 초문사입니다. 고구려 최초의 사찰이지요. 사신단께서는 성문관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여기 고도령은 사신단을 모시는 책임을 맡은 여관입니다. 알현을 원하시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미리 말씀을 주십시오.”

담덕과 첫 알현을 마친 후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굴마는 내관의 목소리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멍하니 걷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보니 사신들이 머무는 성문관을 마주 보고 있는 사찰이 보였다. 현판에는 ‘초문사’라는 사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곳이 진나라의 황제 부견이 파견한 승려가 주석한다는 사찰이로구나. 왕을 비롯하여 왕족과 귀족들이 드나드는 사찰이라고 들었는데 백성들에게도 활짝 열려있다니 참으로 놀랍다. 게다가 건축은 어떠한가. 고아한 운치가 있으면서도 전혀 위압적이지 않은 것이 일주문만 보아도 부처님의 차별 없는 자비가 느껴지는구나. 가히 고구려 백성의 의지처가 될 만하다.’

현창화상의 재가 제자이자 불심이 남달랐던 굴마는 초문사의 입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사찰 안에 들어가지 않았으나 일주문만 보아도 불교가 고구려에 빠르게 자리를 잡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신단이 성문관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굴마의 시선은 초문사 일주문을 떠나지 않았다. 이를 알아챈 고도령은 재빨리 굴마의 곁으로 가서 작게 속삭였다.

“예불은 아침과 저녁에 있습니다. 혹 예배를 드리고 싶으면 언제든 가셔도 됩니다.”

굴마의 시선이 마침내 고도령을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고도령의 동공에 작게 지진이 일어났다. 굴마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하얀 것인지 검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오묘한 피부색에 쑥 들어간 눈과 갈색 눈동자, 높이 솟은 콧날 등 위구르의 혈통의 특색을 고루 지닌 그의 외모를 본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굴마가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하자 고도령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예불은 아침ㆍ저녁에 있습니다
혹 예배를 드리고 싶으면 
언제든 가셔도 됩니다”

굴마의 시선이 
마침내 고도령을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고도령의 동공에 
작게 지진이 일어났다

일주문을 들어오는 
굴마와 고도령을 본 아도스님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국의 사내를 바라보는 
고도령의 눈빛은 
지난날 순령을 닮아 있었다…

 

아득한 인연

동맹을 제안하기 위해 온 위나라의 사신들은 한가로웠다. 담덕은 동맹에 호의적이었고 반대하는 대신들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고구려와 위나라가 힘을 합쳐 연나라를 견제하는 것이었는데 이것 역시 의견이 일치했다. 굴마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고도령에게 이것저것을 부탁했다. 그는 고도령의 얼굴을 보는 것이 즐거웠고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다. 두 사람은 초문사에서 나란히 예불을 드리기도 했다. 다른 사찰도 가보고 싶다는 굴마의 요청에 고도령은 그와 함께 이불란사를 찾았다. 합장 반배를 하며 일주문을 들어오는 굴마와 고도령을 본 아도스님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국의 사내를 바라보는 고도령의 눈빛은 지난날 순령을 닮아 있었다. 고도령의 머리칼을 정돈해주는 굴마의 손길 또한 정이 가득했다.

‘저 둘은 연인이로구나. 어찌할꼬. 부부가 되어 해로할 수 없는 인연임을 알면서도 이미 마음을 주고받았구나. 야무지고 똑똑한 고도령은 어찌 저리 착한 것만 어미를 닮았단 말인가. 험난한 길을 기어이 선택하는구나.’

굴마와 고도령을 본 날부터 아도스님은 혈육에 대한 집착과 정을 끝내 놓지 못하는 자신을 참회했다. 그리고 고도령을 위해 기도했다. 여름이 오기 전 위나라 사신단은 돌아갔다. 고구려와 위나라의 동맹을 확인하는 좋은 소식을 들고 귀국하는 것이었으나 굴마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고도령과의 예정된 이별이 너무나 괴로웠기 때문이다. 칠월칠석날, 홀로 이불란사를 찾은 고도령은 아도스님에게 자신이 생명을 품었음을 고백했다. 아도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녀를 위해 기도할 뿐이었다. 

실성의 야망

“대왕이시여, 아우의 나라인 신라를 도와주십시오. 백제의 부추김을 받은 왜의 군사들이 신라의 영토와 백성들을 유린하고 있습니다. 부디 구원병을 보내주십시오.”

고구려에 볼모로 온 지 10년, 담덕 앞에 몸을 던진 실성은 신라 사신단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자존심을 버린 채 신라를 위해 애원하는 실성의 모습을 본 사신들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담담한 사람은 담덕 뿐이었다. 담덕은 실성이 흘린 눈물의 절반은 저를 위한 것임을 알았다. 볼수록 실성은 정치와 술수에 능한 자였다. 

“부디 군사를 보내주십시오. 하루가 급하옵니다. 고구려의 군사가 하루빨리 도착하면 신라의 백성들은 지옥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모르지 않는다. 고구려는 신라를 모른 척하지 않을 것이다. 허나 신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안위가 우선이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위나라와 동맹을 맺은 것을 안 연나라가 군사를 일으켰다. 고구려를 치기 위해 모용성이 3만 병력을 이끌고 오는 중이다. 지금 신라에 구원군을 보내면 고구려를 잃을 수도 있다. 이것이 옳겠는가? 신라는 고구려의 동생임을 자처하면서 그대를 지켜줄 형이 적의 손에 의해 사라지는 것을 원하는가?”

신라의 사신들은 한숨을 참으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고구려는 연나라와 백잔(백제)만큼 원한이 깊다. 상황을 지켜본 후, 구원병을 보낼 것이니 그리 알라.”

신라의 사신들은 별 소득 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실성은 눈물로 그들을 배웅하였으나 돌아선 그의 얼굴에는 영악한 미소가 빛나고 있었다.

‘연로하신 마립간이 과연 이 위기를 감당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셋이나 되는 제 아들들은 죄다 너무 연소하다며 나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지. 그래, 왕자들은 여전히 연소하니 만약 마립간이 세상을 떠나고, 고구려에서 보낸 구원병이 신라를 위기에서 구한다면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신라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어린 왕자들? 아니면 고구려의 대왕을 설득해서 신라를 구원한 나, 실성?’

실성의 볼이 씰룩했다. 몸을 낮추고 굴욕을 견뎌온 시간을 보상받을 때가 오고 있었다. 백제와 왜, 고구려가 모두 자신의 편인 것 같았다. 

‘드디어 나, 실성의 시대가 오는구나.’ 

[불교신문3498호/2019년6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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